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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66화 (66/102)

66화

끙끙… 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방 안 풍경이 보인다. 눈을 깜빡거릴 기운도 없어 넋을 놓고 있다가 오른쪽 팔을 들어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바닥을 짚는데 엉덩이에서 찌르르 시작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율은 허리를 부여잡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고 제대로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겨우 기어가 문을 밀었더니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교미를 마친 뒤 혼절한 것은 분명한데 이후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밖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는데 엉덩이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맥없이 기둥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왕구가 뒤뜰에서 튀어나온다.

“방울아!”

그는 서둘러 오더니 율의 안색을 살피었다.

“괜찮냐? 눈이 퀭한 것이 몰골이 말이 아니다.”

면경이라도 있으면 확인해 볼 텐데. 율은 거칠어진 자신의 뺨을 문지르고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락의 방 앞에 신이 없는 거로 보아 그는 어딘가로 외출을 나간 모양이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 왔습니까?”

목소리가 갈라지자 왕구가 냉큼 물 한 잔을 떠다 준다.

“어제 온천에서 쓰러진 걸 형님이 안고 왔다. 계속 잠만 자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세상에…. 그럼 하루가 꼬박 지났단 말인가. 아아, 율은 기둥에 머리를 쿵 찧었다. 온몸에 기운이 없는 가운데 배에서는 눈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왕구가 부엌으로 뛰어가 사발에 무언가를 담아 온다.

“이거 잣죽이다. 형님이 너 깨어나면 먹이라고 만드셨어.”

“…….”

“기력 회복하는 데 효과가 있다니까, 한술 떠라.”

옆에 놓아 주길래 고맙다고 힘겹게 인사를 했다. 그때 어디선가 휘이- 하고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짧게 두 번 더 들리자 왕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가 허락도 없이 우리 땅을 밟았나 보다. 넌 여기에 꼼짝 말고 있어. 곧 형님이 오실 테니.”

“이락 님은… 어디 가신 겁니까?”

“마을에. 정오까진 돌아오실 거야.”

왕구가 율에게 죽 그릇을 쥐여 준 뒤 사립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그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율은 그런 왕구의 뒷모습을 보다가 수저를 들어 죽을 한 입 떠 넣었다.

어찌나 기운이 없는지 수저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입술 또한 부르터 따갑고 쓰라렸다. 그래도 고소한 잣 내음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죽을 몇 수저 간신히 뜨고 있는데 저 멀리서 처음 보는 이들이 걸어온다. 하나는 궤짝을 지고 있었고 하나는 장검을 지닌 무사였다.

“영월관에서 왔습니다. 이락 님은 계십니까.”

그들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고 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섰다.

“지금 안 계십니다. 외출하신 거 같은데….”

율은 무사의 얼굴을 응시하다 장검 끝에 달린 붉은 술을 눈여겨봤다. 검은 장식이 있는 술은 특이한 모양이었음에도 낯이 익었다. 그사이 무사는 하인을 시켜 가져온 궤짝을 지게에서 내리라 명령했다. 마루에 탁, 올려 두는데 소리가 꽤 묵직하다.

“어르신께서 보내신 선물이라고 하면 알 것입니다.”

율은 궤짝과 무사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뒤늦게 영월관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이락이 검을 휘둘러 양반의 목을 베기 직전 등장한 나이 지긋한 영감…. 그 영감의 뒤로 여러 명의 무사가 있었는데 모두 같은 술을 검에 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온 거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무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하인을 데리고 돌아간다. 율은 궤짝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락은 말하지 않았으나 그날 영월관에 있던 이들이 수군대는 걸 율도 들었다. 병조 판서 어쩌고 하는….

그런 지체 높은 양반이 왜 이락에게 선물을 보내온 걸까. 궁금증은 쌓여 갔으나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왕에게 온천도 하사받는 이락이니 병조 판서에게 선물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거니, 그리 여겼다.

때마침 이락이 나타난다.

마주치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이락이 어느덧 코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깨어났구나.”

이리 와 앉아. 율은 마지못해 원래의 자리로 가서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락이 곁으로 와 종이에 싼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고 그것이 만두라는 것을 열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마을에 갔다가 네 생각이 나서 샀다.”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이번엔 품에서 다른 것을 꺼내었다. 천에 둘둘 만 것을 풀자 산삼이 들어 있다. 꽤 굵직하였고 한눈에 봐도 상품이었다. 이락은 그것의 다리를 뜯어 율의 입가에 가져갔다.

“씹어.”

율은 고집스럽게 버티며 이락을 흘겨봤다. 전생에 산삼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인상을 쓰고 있으니 기어코 한 뿌리 쑤셔 넣는다. 율은 마지못해 그것을 꾸역꾸역 씹었다.

“상단에 들러 좋은 삼으로 달라고 했다. 먹고 나면 기운이 날 거야.”

율은 심사가 뒤틀려 살짝 비아냥거렸다.

“육지 속담에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락 님께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겁니다.”

이락이 웃으면서 받아쳤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도 있지.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생소한 말이라 율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무슨 뜻입니까….”

“안 알려 줘.”

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산삼을 얼른 씹으라고 재촉하길래 마지못해 그것을 꿀꺽 삼켰다. 그랬더니 남은 뿌리도 또 뜯어서 입에 넣어 주려 한다. 율은 질린 표정으로 이락을 보다가 뒤에 있는 궤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가리켰다.

“방금 어떤 이들이 다녀갔습니다…. 어르신께서 보낸 선물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그걸 가져온 이가 말했습니다.”

이락은 그제야 궤짝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뚜껑을 연 그의 얼굴은 어딘가 서늘함이 느껴졌다. 율은 그것이 궁금하여 고개를 쭈욱 빼고 쳐다봤다. 아주 오래된 서책으로 보였는데 빛이 바래다 못해 겉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이락이 진귀한 책들을 모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저리 낡은 고서를 무엇에 사용하려 하는 건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무슨 책입니까.”

“원래는 내 것이었지.”

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낡았는데요? 족히 수백 년은 더 되어 보입니다.”

이락은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에 영문 모를 애틋함과 슬픔이 배어 나왔다. 율은 이락의 그런 표정을 여태 본 적이 없어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궤짝을 닫고 그것을 창고 방으로 옮긴 뒤 손에 연고를 들고나왔다.

“엎드려. 약을 발라 줄 테니.”

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어제도 내가 직접 발랐다.”

“직접이요?”

“뭘 그리 놀라? 혹시 배앓이를 할까 걱정되어 배 속에 가득 들어 있던 씨물도 내가 다 긁어냈는데.”

“…….”

“어떠냐. 내 퍽 다정한 구석이 있지 않아?”

율은 할 말을 잃었다. 어제 정자에서 이락에게 깔려 흐느끼며 울던 게 머릿속으로 떠오르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괜히 의식이 되어 시선을 피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반쯤 남은 산삼 뿌리만 응시하였다.

“어서 엎드리래도.”

“싫습니다…. 안 아픕니다.”

“찢어졌는데 안 아플 리가 있나.”

율은 남은 산삼을 그대로 내려놓고 연고를 빼앗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제가 바르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이락이 따라 들어온다. 문을 사이에 두고 율은 안쪽에서 고리를 잡고 버텼고 이락은 밖에서 당기었다.

“왜 이리 고집을 부려. 내가 뭘 한대? 약을 발라 준다는 것뿐이잖아.”

“제가 한두 번 당합니까! 저리 가십시오!”

“튕기지 마라. 양물도 입으로 빨아 줬는데, 거기 약 발라 주는 게 뭐 대수라고.”

문이 벌컥 열리고 몸이 확 밖으로 튕겨 이락의 품에 안착하였다. 고개를 들자 이락이 저를 쳐다보고 다정하게 웃는다. 속이 간질거려 고개를 떨구던 율은 뒤늦게 누군가 마당에 서 있음을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락을 밀어내는데 그가 오히려 더 엉겨 붙었다.

“도망갈 생각 말고 어서 옷이나 벗어.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율은 황급히 이락을 쳐다보며 하지 말라고 눈짓을 보냈다. 이락도 눈치를 챘는지 뒤를 돌아본다. 그에게 가려졌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고 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언제 왔는지 무령이 가마도 없이 혼자 고고한 자태로 마당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본 이락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이런. 방해꾼이 왔네?”

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다 들었나. 남들이 이락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걸 알면 손가락질을 할까 두려워졌다. 이락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니 그가 허리를 당겨 바싹 끌어안는다. 그러고는 무령을 향해 턱을 치켜들고 뻔뻔하게 웃는다.

“무령. 그만 가 주지 않겠나. 내가 쥐방울하고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무령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온다.

“선비님, 서운합니다. 그동안 이락과 많이 친해지셨나 봅니다.”

율은 입을 벙긋거렸다. 둘 사이에 신경전이 도가 지나칠 정도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려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무령의 눈빛이 붉게 변하더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근데 기억하십니까? 지난번 화적 떼에게서 목숨을 구해 줬던 날이요.”

“…….”

“제게 약조를 하셨지요. 꼭 은혜를 갚겠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락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율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습니다…. 기억합니다…. 그러자 무령이 환하게 웃는다.

“모르셨겠지만, 여우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아니면 큰일이 나지요.”

큰일이 난다는 말에 율은 당혹스러워졌다.

“그리고 이건 그날의 증푭니다.”

무령이 오른손을 들자 그의 손목에 금색 실이 나타난다. 저건 무엇이지? 그런데 율의 손목에도 똑같은 실이 생겨난다. 놀라서 번갈아 쳐다보니 이락이 이를 빠득 간다.

“너…!”

무령은 부채를 펴 입을 가리고 눈으로만 활짝 웃었다.

“제게 은혜를 갚을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이락은 그를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입 다물어, 이 여우 새끼야.

무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락을 멀리하십시오. 손도 잡지 말고 입맞춤도 안 됩니다. 그 약속만 지키면 선비님은 무사할 겁니다.”

이락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하였다. 그는 한쪽에 세워 둔 도끼를 집어 들고 마루를 내려갔다. 하지만 무령이 한발 빨랐다.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마당에는 깔깔깔 경박하게 웃음소리만 남았다. 이락이 도끼를 쥔 채 홱 돌아봤고 율은 움찔하여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락의 눈빛이 붉은빛으로 일렁인다.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턱이 파르르 떨리고 누구 하나 잘못 걸리면 죽여 버릴 기세였다. 율은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키고자 마루 아래로 내려갔고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이락 님. 일단 진정을,”

순간 불길이 화륵, 치솟는다. 으악, 놀란 율이 손을 떼어 냈고 불길은 감쪽같이 사라졌으나 이락의 표정은 뜨거운 불만큼이나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찌하여 여우에게 함부로 약속하였느냐?”

분노로 가득한 그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몰랐습니다…. 그냥 저는 인사치레로 한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은혜를 갚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 여우와의 약속을 깨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해서 나를 화나게 만들어! 너는 대체….”

빌어먹을.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화를 주체 못 하는가 싶더니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숨을 몰아쉰다. 순간 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가만… 이게 꼭 나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락과 닿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어제처럼 아플 일도 없을 테고…. 오히려 용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히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괜찮은데…?

“쥐방울, 너.”

이락이 성큼 다가왔고 율은 뜨끔하여 표정을 감췄다.

“예…?”

그러나 귀신은 속여도 이락을 속이는 건 어려웠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위협적으로 율을 내려다보며 서늘하게 일갈했다.

“아주 좋아 죽겠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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