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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63화 (63/102)

63화

[연모합니다, 이락 님! 저는 이락 님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를 마구 범해 주시어요.]

헉. 잠깐 잠든 사이 율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밖은 아직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꿈인가…. 꿈에서 자신이 이락을 붙들고 연모한다고 하는 것도 모자라 옷고름을 풀고 범해 달라 애걸하고 있었다.

율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아니다, 이것은 내 탓이 아니야.

[쥐방울이 연모하는 이를 보여 주거라.]

거울은 어째서 이락의 얼굴을 보여 줬을까. 만약 기진이 나왔다면 수긍했을 것이다. 존경심이니 뭐니 포장을 하였어도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이락이라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이락이 왜…. 혹시 몸을 섞어서일까. 아니면 거울이 장난친 걸까. 그래, 마물이니 스스로 거짓을 꾸며 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필시 나를 놀리려 함일 거야.

다시 누웠으나 도통 잠은 오지 않고 가슴만 답답해진다. 뒤척이다 보니 어느덧 세상이 푸르스름하게 바뀌어 온다. 결국엔 도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어차피 잠은 다 잔 거 같으니 이대로 나가 아침을 준비하는 게 도움이 되겠구나 싶었다.

밖으로 나온 율은 가장 먼저 우물에 가 세숫물을 길었다. 찬물로 얼굴을 적시고 가슴을 한껏 부풀려 새벽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부엌으로 옮겨 가려는데 왼쪽 손님방이 열리며 왕구가 나온다. 왕구와 왕태는 머무는 곳이 따로 있음에도 가끔 이곳에서 잠을 청하였다.

“방울아. 왜 벌써 일어났어? 어디 아프냐?”

“아닙니다…. 잠이 일찍 깨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왕구는 손을 뻗어 율의 이마를 만졌다. 따뜻한 손길이 닿으니 나쁘지 않다. 이락이 만지면 몸이 긴장하여 자꾸만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데, 이상한 일이다.

“네가 어젯밤 저녁을 먹자마자 잠드는 바람에 걱정했다. 영월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왕구는 아직도 많이 미안해했고 율은 괜찮다며 도리어 그를 위로했다.

“그냥 피곤하여 그런 겁니다. 마음이 심란하기도 하고….”

“심란해? 어째서? 화병이 아직도 낫질 않았어?”

“그게 아니라….”

율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들어도 형님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니,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흐음. 그러자 왕구가 턱을 괴고 고민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짝! 친다.

“속이 답답할 때 개운해지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 주랴?”

율은 대답하지 않았고 왕구는 신이 나서 떠벌렸다.

“가끔 형님들이 내 기분을 좆같이 할 때가 있거든. 그럼 난 저 뒤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를 지른다. 막 욕도 하고, 그러면 나아지더라.”

“대나무 숲이요…?”

“그래. 거기 나무가 빼곡하여 소리가 밖으로 잘 새어 나가지 않아.”

율은 고민했다. 대나무 숲에는 귀신이 있지 않은가. 혼자 가기엔 무서운데…. 눈이 무의식적으로 이락의 방으로 향하였다. 그의 신발이 사라졌다. 아침 일찍 온천이라도 간 걸까.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왕구가 끼어든다.

“큰형님도 어젯밤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야. 내가 오줌 싸러 나왔다가 네 방 앞에 서 계신 걸 봤다.”

“제 방을요…? 거기서 뭘 하셨는데요?”

“가만히 쳐다만 보시던데.”

“가만히…?”

“나도 조금 이상하긴 했어. 너한테 화는 내셨지만, 마음이 쓰이셨나.”

율은 불현듯 이락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밤에 투호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깨어나길 기다린 걸까. 손가락까지 걸고 한 약속인데 그걸 지키지 못하였으니 실망하였겠지. 아이처럼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제가 이락 님과의 약속을 깜빡하였습니다….”

“무슨 약속?”

“실은… 어제 투호 놀이를 하기로 하였거든요.”

“투호?”

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왼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거기에 오른 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하였다. 이거, 말입니다. 이거. 지켜보던 왕구가 눈만 끔뻑끔뻑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와하하 자지러진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그는 마루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겨우 진정을 하고 일어나 앉았다.

“대체 그걸 누가 가르쳐 줬어?”

“만물상 주인이… 이락 님이 좋아하는 거라고 하여….”

“좋아하긴 하지. 아니, 환장하시지. 근데 너, 그게 뭔지 아냐?”

왕구의 반응에 율은 슬슬 불안이 몰려왔다.

“뭡니까…?”

“씹질이다, 씹질. 교미란 말이다!”

왕구는 또 배를 잡고 웃었고 율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나중에는 점점 질려 갔다. 그럼 내가 어제 이락한테 대놓고 교미를 하자고 한 건가. 맙소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형님께도 보여 드렸냐? 뭐라 하시든?”

뻔뻔하게 웃으며 손가락까지 걸던 이락을 떠올리고 율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걸 핑계로 나한테 또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이었나. 대체, 이락 님은 왜 그런 걸까. 아아, 또 당했다고 생각하니 명치에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해진다.

율이 가슴을 퍽퍽 치니 왕구가 웃음을 그치고 표정이 심각해졌다.

“속이 좋지를 않아?”

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대숲에 소리라도 지르러 다녀오겠습니다.”

율은 성큼성큼 집을 나섰다. 여전히 해는 뜨지 않은 새벽이었고, 낮에도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대나무 숲은 그 기운이 더해졌다. 코앞까지 걸어간 율은 몇 번의 갈등 끝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숲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불고 나무들이 스스스, 소리를 내자 목덜미가 살짝 서늘해진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그러기엔 이미 멀리 왔지 않은가. 숲 가운데 선 율은 고개를 젖혀 대나무를 올려다봤다.

참 높이도 자라는구나. 이렇게 자라려면 얼마나 걸려야 하는 거지. 길게 하늘로 뻗은 나무를 보고 있으니 숨통이 좀 트인다. 율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래, 내가 자꾸 속병이 나는 건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인 거다. 그러니 숲에서라도 시원히 이야기하자.

율은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 내가 이락 님을 연모할 리가 없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끌려왔으나 내 마음은 오로지… 오로지… 그분한테 있으니까…. 거울에 보인 건 다 거짓말이야…. 아니면 이락 님이 무슨 술수를 쓴 것일지도 모르지. 그분은 원래 나를 가지고 노는 걸 즐기시잖아. 그러니 아직도 내 이름을 쥐방울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율은 이락과 영월관에서 마주친 일이 떠올랐고 난데없이 울컥 화가 치밀었다.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 만큼 여인들을 좋아하면서 왜 자꾸 내게 성적인 장난을 치는 걸까. 내가 그리 만만한가.

말씀해 보십시오. 이락 님. 제가 그리 우습습니까?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차츰 격앙되어 갔다.

“저는 암컷이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저는 이락 님 같은 난, 난봉꾼은 싫습니다! 거기다 제멋대로에 성질머리도 고약하고, 그런 분을 내가 연모하다니, 말도 안 돼! 솔직히 얼굴이 잘났으면 뭐 해! 키 크고 몸이 좋으면 뭐 하냐고! 성격이 최악인걸! 그러니 여태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살지! 앞으로 누가 부인이 될지 몰라도 그 처자가 딱하고 안쓰럽다! 나라면 절대! 절대! 이락 님과 혼인하지 않을 거야!”

고래고래 악을 쓰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다. 하, 하하하. 율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는 활짝 웃었다. 이게… 효과가 있긴 하네.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걸. 아, 살 것 같다. 개운한 얼굴로 돌아서던 율은 그만 돌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락이 대나무에 기대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손에는 율이 만물상에서 산 매화가 그려진 부채가 들려 있었다. 율은 사색이 되어 입을 벙긋댔다.

“이, 이락 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표정이 태연한 걸 보니 듣지 못하였나.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을 하는 건가.

이락이 걸어왔고 율은 두려움에 뒤로 한 발씩 물러섰다.

“너야말로 여긴 웬일이냐. 새벽부터.”

“일찍 깨서… 산보를 나왔습니다.”

“그렇군.”

“이락 님도… 산보를 나오신 겁니까?”

침착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달달 떨린다. 이락은 대수롭지 않게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걷다가 누가 내 욕을 하길래 와 봤다.”

아뿔사. 들었구나.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으니 이락이 율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 쪽으로 향한다. 율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였다. 죄인처럼 입술만 꾹 깨물고 있는데 이락이 다정한 목소리로 묻는다.

“속은 시원해졌고?”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뜨고 이락을 돌아봤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그림 같은 미소에 또 심장이 미친 듯 발작을 일으키는 걸까. 율은 절망하여 이락의 팔을 거두고 떨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제가… 너무 답답하고… 그래서… 절대 이락 님이 미워서 그런 건 아닙니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고… 한 번만 모른 척 넘어가 주시면….”

“거울에 내가 나왔어?”

율은 입이 딱 붙어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락은 아마 진즉부터 알아챘을 것이다.

“저는… 이락 님을….”

“안다. 너하고 내가 만난 시간이 짧은데 연모의 정이 그리 쉽게 생길 리가 없지. 거울이 장난을 쳤을 수도 있으니 괘념치 마.”

뜻밖의 말에 율은 안심이 되면서도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마음이 넓은 분을….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 이락은 다소 짓궂긴 하지만 마음이 넓고 아량을 베풀 줄 아는 대인이었다. 이락이 어깨를 감쌌고 율은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그래 이런 분한테 어깨 정도 내주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러자 이락이 입술을 율의 귓가에 가져가 속삭인다.

“그럼 이제, 어제 못한 투호를 하러 가 볼까?”

예? 율이 뒤늦게 알아듣고 주춤거렸다. 입술이 더 가까이 닿고 숨결이 느껴지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고 머릿속에선 빨간 등이 켜졌다. 도망쳐. 아니나 달라 이락은 곧장 다음 말을 살벌하게 뱉어 냈다.

“날 욕한 건 참지만 약속 어기는 건 못 참는다. 경고했지. 어길 시엔 남은 달포를 눈물로 지새우게 될 거라고.”

율은 사색이 되어 그대로 얼었고 이락은 신이 난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가자, 내 얼마나 잘 넣는지 너한테 보여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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