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62화 (62/102)
  • 62화

    “여기까지 온 연유가 뭘까.”

    이락은 담뱃대를 물고 보료 위에 삐딱하게 앉았다. 무연 공주와는 바다에 갔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이리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공주는 쓰고 있던 너울을 벗어 완전히 얼굴을 드러내었다. 누구라도 뒤돌아보게 할 외모다. 왕구와 왕태가 그리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이해는 간다고 생각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하거라.”

    “아바마마께서는 앞으로 어찌 됩니까.”

    무연 공주는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고, 이락 역시 냉담함을 유지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용궁의 어의들이 있을 것 아닌가.”

    “염라께서는 알고 계실 것 같아 찾아온 것입니다.”

    하, 이락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상대를 유심히 봤다. 내가 이 여인을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수백 년 전… 아바마마께서 저승에 혼담을 넣은 적이 있습니다. 그 여식이 바로 접니다.”

    “기억이 나질 않는군.”

    “거절하셨지요. 그리고 얼마 뒤 지상으로 추방되셨다 들었습니다.”

    이락이 짜증 섞인 표정을 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용건은? 왜 거절했냐 따지기 위함인가? 아니면 추방된 이유가 알고 싶어? 그것도 아니면 네 아비를 살릴 방도를 알려 달라?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네 푸념을 들어 줄 생각도 없고, 네 아비를 살려 줄 능력은 더더욱 없다.”

    무연 공주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따지려고 온 것도 아니고, 애원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제안하러 온 것입니다.”

    “제안?”

    “바다와 교역을 트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네 아우가 그리 말하던가.”

    “아시겠지만, 궁에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요. 이미 양반을 중심으로 육지의 물건이 풀렸고, 궐 안팎으로는 기대하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용궁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으니 교역을 통하여 예전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 믿는 게지요.”

    “서론이 길다. 지루하니 너도 네 동생처럼 본론만 말해. 그럼 내가 수지타산을 따져 볼 테니.”

    무연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저와 혼인해 주십시오.”

    이락의 기가 차 하하, 웃어 버렸다.

    “내게 한 말 중 가장 흥미롭군. 사내에게 첫눈에 반할 만큼 아둔해 보이진 않는데, 이유가 뭘까. 난 지금 염라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토끼에 불과한데.”

    “지금은 그렇지요. 하지만 용왕의 반려가 된다면 더는 보잘것없는 토끼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것 봐라? 이락이 자세를 바로 세워 앉고는 무연 공주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 공주는 지금 자기 아비를 살리려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위에 앉을 수 있게 도와 달라 청하러 온 것이다. 여인이 용왕의 자리에 앉은 사례는 드물었다. 그러니 아무리 잘난 공주라 해도 밖에서 굴러온 반쪽짜리 아들에게 밀려날까 전전긍긍하는 거겠지.

    “내가? 너와? 혼인을?”

    “혹시 압니까? 제가 당신의 귀인이 될지. 옥황상제께서는 아버지를 저버린 지 오랩니다. 그러니 병환을 알고도 모른 척하시는 거겠지요. 저는 그것이 아버지의 욕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바꿔 놓겠습니다. 그 과정을 염라께서 함께하시면 상제께서도 마음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이락은 팔짱을 끼고는 옅게 미소를 흘리었다.

    “솔깃한 제안이네. 하지만 거절하지.”

    자신만만하던 무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요…?”

    “난 지금이 좋다. 혼인 따위 할 마음도 없고.”

    “혹시, 마음에 품고 계신 자가 있는 것입니까?”

    이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하지만 취향이란 건 있지. 뭐랄까. 난 좀… 순진해서 골려 먹기 쉽고, 눈물이 많지만, 가끔 욱하는….”

    말을 하다가 이락이 인상을 쓰고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아무튼, 이 이야긴 못 들은 거로 하지. 이렇게 나를 찾아와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에 자네 아비나 잘 챙겨. 혹시 알아. 공주의 지극정성으로 용왕이 깨어나면 아들이 아니어도 왕위를 물려줄지.

    “아바마마께선… 절대 저에게 물려주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무연은 침묵하였고 이락은 그만 가라며 손짓을 했다. 무연 공주는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또 올 게 분명하였기에 이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율은 빨랫줄에 걸어 둔 옷들을 하나씩 거둬들였다. 이락과의 대화를 마친 뒤 공주는 바로 돌아갔고, 어느덧 저녁을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용궁에서 누군가 왔다길래 가족 소식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움을 감춘 채 율은 빨래를 챙겨 마루에 앉았다.

    그때 왕구가 부엌에서 나오며 잔소리를 한다.

    “방울아. 몸도 성칠 않은데 뭘 하는 거야. 방에 들어가 누워 있으래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넌 그 버릇을 고쳐야 한다.”

    “예?”

    “무슨 말만 하면 괜찮다고 하잖냐. 어떻게 다 괜찮을 수가 있어. 힘들면 힘들다고 내색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고 아파도 괜찮다고 말하다 보니 그게 버릇처럼 입에 붙어 버린 걸 깨달았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빨래를 개는데 마침 이락이 방에서 나온다. 그는 공주가 돌아가고도 한참을 안에 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율은 궁금하였으나 거기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 주지 않을 테니까.

    “쥐방울.”

    빨래를 접던 율은 고개를 들어 이락을 쳐다봤다.

    “그거 놓고, 따라와.”

    꼼짝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얼른 오라고 눈으로 협박이다.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마루로 올라갔다. 이락이 마지막 방으로 향했고, 율도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가만히 서 있으니 이락이 전의 그 경대를 꺼낸다. 앉으라고 바닥을 탁탁 두드렸고, 율은 시키는 대로 했다. 이락이 경대를 맞은편에 앉은 율에게 밀었다.

    “봐라.”

    “예…?”

    “네 가족 소식이 궁금하잖아. 그러니 버선발로 달려 나갔겠지.”

    아, 어떻게 아셨지. 이락은 무딘 듯하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섬세한 구석이 많았다. 지금처럼….

    “감사합니다….”

    이락의 마음이 변할까 급히 경대의 뚜껑을 열었다. 멍투성이인 얼굴이 가장 먼저 보인다. 생각보다 심하게 맞았구나…. 율은 속상함을 감추고 거울에게 말하였다. 용궁에 있는 가족을 보여다오….

    잠시 후 거울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아버지가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여 준다. 전혀 변한 게 없으시구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이번엔 선이 나왔다. 학당에서 공부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걸 보며 율은 웃었다. 평소에도 공부가 하기 싫다고 그리 노래를 부르더니….

    다음은 어머니가 나타났는데 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뜬 채 떠먹여 주는 미음을 무리 없이 넘기고 있었다. 지켜보던 율은 벅찬 마음에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 님! 어머니 상태가 전보다 호전되었습니다. 아직 거동은 힘든 것 같지만, 낯빛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활짝 웃으니 이락도 함께 웃는다. 다행이네.

    율은 기진의 안부도 궁금하였나 이락에게 눈치가 보여 곧 마음을 접었다.

    “네 왕자마마의 안부도 확인하든가.”

    뜻밖의 말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게 뭐야.”

    “전에는 분명 세 명만 된다고… 그러셨어서….”

    “잔말 말고 보기나 해라. 대신 오래 보진 말고.”

    예…! 기진을 보여 달라 부탁하자 대신들과 이야기 중인 모습이 나온다. 늘 외롭게 도성을 홀로 돌아다니거나, 궁에 있어도 외톨이처럼 지냈는데…. 괜히 코끝이 찡해지고 뭉클해졌다. 다행이다…. 그러다 이락과 시선이 마주치고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였다.

    “다 봤습니다….”

    경대를 덮으려고 하니 이락이 맞은편에서 탁, 잡는다. 율은 의아하여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말했던가. 경대는 속마음도 보여 준다고 하였지.”

    “예…. 그랬었죠.”

    “네 속마음이 궁금하지 않아?”

    “제 속마음이요? 어떤…?”

    “가령, 네가 연모하는 이라든가.”

    율이 펄쩍 뛰었다. 제, 제가 연모하는 이가 어딨습니까! 희한한 소리를 다 하십니다. 하지만 귀와 목덜미는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락은 코웃음을 치고는 거울에게 말하였다.

    “쥐방울이 연모하는 이를 보여 주거라.”

    이락 님! 율이 말리다 말고 저도 궁금했는지 거울을 본다. 처음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있더니 눈이 점점 커지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입이 벌어진다. 어…어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에 이락이 궁금하여 물었다.

    “왜?”

    이락이 경대를 돌려 확인하려고 했고 율은 화들짝 놀라 급하게 뚜껑을 닫아 버렸다. 아닙니다! 보지 마십시오! 혹여나 볼까 우려가 됐는지 아예 배를 경대 위에 얹고는 몸으로 짓누른다. 어이없는 행동에 이락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뭐가 나왔길래 그리 호들갑이야?”

    율은 눈을 이리저리 빠르게 굴렸다.

    “만두! 만두가 나왔습니다!”

    이락이 눈을 치켜떴다. 만두? 그러자 율은 자신이 만두를 너무 좋아해 만두가 나온 것 같다고 말하더니 거울을 제자리에 밀어 넣고는 벌떡 일어선다. 그, 그만 가 보겠습니다. 빨래가 아직 많이 남아서요! 후다닥 방을 뛰쳐나가자 혼자 남은 이락은 경대를 도로 꺼내 열었다.

    “방율에게 보여 준 자가 누구야.”

    거울은 반응이 없다.

    이락은 이를 까득 물며 명령했다.

    “누구냐고 물었어.”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락은 홧김에 뚜껑을 탁 닫아 버렸다. 언젠가 넌 내가 땔감으로 쓴다. 두고 봐라. 그러고선 방율이 나간 문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율은 뭐 때문인지 마당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