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61화 (61/102)

61화

집 근처에 다다르자 왕태가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한 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그는 왕구의 귀를 잡아채고 대나무 숲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 새끼. 너!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해!”

“형님. 이거 놓으시오! 돈 찾아왔단 말이오!”

“돈이 문제야! 내가 뭐라 하던 노름은 절대 안 된다고 했지.”

“노름이 아니라, 박을 탔다고 몇 번을 얘기해! 아, 씨벌. 귀때기 찢어지겠네. 큰형님 좀 말려 주십시오!”

왕구가 이락에게 손을 뻗으며 도움을 청했으나 이락은 모른 척 집 쪽으로 가 버렸다. 율은 가서 말리고 싶었으나 왕구와는 달리 왕태는 무서워 그러질 못하였다. 미안한 얼굴로 웃는데 이락이 뒤를 돌아본다.

“뭐 하냐, 들어오지 않고.”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락을 따라갔다. 왕구의 비명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간 율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봇짐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투호와 부채로 만물상 주인의 말을 듣고서 구매한 것이었다. 정말 이것을 이락 님이 좋아하신단 말인가. 보기보다 취향이 건전하시구나. 선물을 받고 좋아할 이락의 모습을 생각하니 살짝 설레었다.

[옷을 다 갈아입었으면 나와라.]

이락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율은 선물을 챙겨 부리나케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락이 손에 연고를 들고 마루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을 또 발라야 한다니. 율이 인상을 쓰니 오라며 눈짓을 한다. 율은 뭉그적거리며 곁으로 갔다.

“어제 의원이 연고를 발라 주어 괜찮습니다….”

“면경을 갖다주랴? 꼴을 보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거다.”

“그건… 냄새가 너무 고약합니다.”

“잔말 말고 대. 아니면 온몸에 처발라 줄 테니까.”

율이 아랫입술을 삐죽하고는 얼굴을 가까이 디밀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이락이 연고를 바르는 대신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율은 자신이 뭘 또 잘못했나 싶어 눈치를 살피었다.

“안… 바르십니까?”

“너는 속눈썹이 참 길다.”

“…….”

“입술도 붉고.”

뜬금없는 입술 이야기에 율은 흠칫했다. 그러자 이락이 연고를 멍든 곳에 살살 발라 준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괜히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초조해졌다. 그러다 입술 근처에 연고가 묻으니 쓰라려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프냐?”

“예….”

“나도 아프다.”

율이 어이없이 쳐다봤다. 예? 대체 무슨 뜬금없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라고 묻고 나니 이락의 가랑이 사이에 무언가 불쑥 솟아오른 게 보인다. 아…! 율은 기겁하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이리 와. 약 바르게.”

“됐, 됐습니다. 다 바른 거 같습니다.”

“네가 어찌 알아?”

“안 봐도 압니다. 저, 저는 이만 방에 들어가,”

아, 그러고 보니 가지고 나온 투호가 눈에 띄었다. 율은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이락이 있는 방향을 향해 슬그머니 밀었다. 이락이 투호와 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한쪽 눈썹을 치켜든다.

“뭘까, 이건?”

율은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른 건 아니고… 이락 님이 좋아하신다고 하여… 시장에서 하나 구했습니다.”

“내가 이걸 좋아해?”

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물상 주인이 한 것처럼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 오른손 검지를 동그라미 안에 넣었다 뺐다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이락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진다.

“그건 누구한테 배웠어?”

“만물상 주인한테서요…. 전에 붓을 사 드리긴 했지만, 그걸로 부족한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값비싼 건 아니지만 제 마음이니 받아 주십시오.”

이락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고 율은 조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이걸 좋아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빤히 보기만 하던 이락이 뒤늦게 웃는다.

“아니다. 좋아한다.”

“다행입니다.”

율이 활짝 웃는 모습에 이락이 짓궂은 표정을 했다.

“그럼 나하고 둘이 할래?”

이거. 똑같이 손짓을 해 보이길래, 율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이런 건전한 놀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락이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

“지금?”

“지금은 좀 그렇고, 오늘 밤은 어떠냐?”

“밤에요?”

율은 조금 의아했다. 밤에 하면 이게 잘 보이려나. 하긴 달빛도 있고 등불도 있으니 어려울 건 없겠지.

“하는 김에 형님들도 같이할까요?”

그러자 이락이 정색한다. 아니. 그건 싫다.

율은 다소 실망하였다. 여럿이 하면 더 재미있을 텐데.

“하여튼 약속했으니 지켜라.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불알이 떨어질 테니.”

“이락 님은… 이미 하나 떨어지셨지 않습니까.”

뒤끝이 남아 슬쩍 빈정거렸는데도 이락은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걸어라.”

율이 당황하여 쳐다보니 어서 걸라고 눈빛으로 재촉을 한다. 이락 님…. 이렇게 아이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한 분이었다니. 율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남은 달포는 눈물로 지새우게 될 거다.”

“아유, 무슨 투호 하나에 그리도 목숨을 거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제가 밤새워 놀아 드리겠습니다. 헤헤.”

해맑게 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왕구가 뛰어오며 소리를 지른다. 형님. 손님들이 왔어요! 이락은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여튼 산통 깨는 덴 뭐가 있다니까. 율은 이락의 뒷모습을 보다가 투호를 정리하여 기둥 옆에 세워 뒀다.

쩌렁쩌렁한 왕구의 목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용궁에서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엄청, 엄청!”

“숨넘어가겠다. 천천히 말해라.”

용궁이란 말에 율도 놀라서 신을 신고 헐레벌떡 아래로 내려왔다. 열흘마다 산호와 육지의 것을 물물교환한다고 하더니 벌써 열흘이 되었나. 그런데 용궁에서 왔다고 하기엔 단둘뿐이다. 하나는 얼굴을 꼭꼭 숨기고 있었는데 율은 그가 혹시 기진이 아닐까 짐작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데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탁, 이락이 팔을 붙잡는다.

놀라서 돌아보니 이락이 서늘하게 일갈했다.

“기다리면 오겠지. 뭐가 그리 급해서.”

목소리마저 냉랭하다. 조금 전까지 투호 이야기를 하면서 다정하게 웃던 이가 맞나 싶을 만큼 얼굴이 바뀌었다. 율은 조금 민망하고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에 뒤로 한 발 물러나 그들이 오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데 가까이 올수록 용궁에서 온 이가 기진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하나는 키가 왕태만큼 컸고 다른 하나는 그것보다 한참 작았는데, 코앞까지 와 너울을 걷는 순간 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주마마!”

머리를 조아리니 무연 공주가 코앞까지 걸어온다.

“육지에서 보니 반갑네, 별주부.”

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진짜 무연 공주가 맞구나.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왜 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이윽고 무연 공주의 시선이 이락에게 옮겨 간다.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공주가 먼저 고개를 숙이었고 이락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우리 집이 동네 사랑방이 됐구나. 이놈 저놈 다 놀러 오고.”

그 말에 율은 기겁하여 이락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락 님. 공주마마한테 예를 갖추십시오. 어찌 그리 막말을 하십니까. 눈빛으로 애원하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홱 돌아서는 들어가 버린다. 율은 당황하여 이락을 한 번 무연 공주를 한 번 쳐다봤다.

“공주마마,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십시오. 원래 저런 분은 아닌데….”

이락의 편을 드는데 무연 공주의 눈이 커진다.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누구한테 매질이라도 당한 것이야?”

걱정하는 공주에게 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왕구가 껴들었다.

“저를 도와주다 그리됐습니다. 그놈들은 관아에 넘겨져 아마 죽기 직전까지 곤장을 맞고 있을 겁니다. 아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왕굽니다. 왕구. 여기, 방울이하고는 호형호제할 만큼 친하달까.”

“예, 그렇군요. 이런 벗이 있으니 별주부가 든든하겠습니다.”

하하, 왕구가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그러자 이번엔 왕태까지 끼어들며 자기소개를 하더니 공주의 외모를 칭찬한다. 용궁 사람들은 어찌 하나같이 이리 인물이 좋으냐고, 방울이도 그렇지만 공주께서는 정말 천하절색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율은 더는 공주를 세워 둘 수 없었기에 일단 들어오시라며 안쪽으로 안내하였다.

“차를 드릴까요? 아, 이락 님이 드시는 것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차는 됐고. 내 안에 계신 분과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느냐?”

율은 살짝 당황하였다. 둘이 나눌 이야기가 뭘까. 왕구와 왕태를 보니 그들 역시 전혀 모르는 눈치다. 율은 엉덩이를 떼며 일어섰다.

“예, 이락 님 방은 저쪽입니다. 제가 안내를,”

“아니다. 내가 직접 들어가마.”

공주가 이런 누추한 곳에 온 것도 놀랍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겠다는 말에 율은 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가 이락의 방으로 향한다. 들어가겠습니다. 그 한마디를 하더니 문이 열렸다 닫힌다.

그녀가 데리고 온 무사가 율을 응시했다. 그만 거리를 두란 소리다. 율은 그대로 왕구와 왕태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눈을 자꾸만 이락의 방을 향하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