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58화 (58/102)

58화

“안 된다니?”

“말했잖습니까. 오늘은 약속된 손님만 받으라는 행수님 명이 있었습니다.”

왕구가 양손을 허리에 짚고 가슴을 들이밀었다.

“이봐, 내가 누군지 몰라? 이락 형님과 이곳에 온 게 몇 번인데 나를 이리 홀대는 하는 게냐. 만약 내가 큰형님한테 이 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너희가 무사할 것 같아?”

하지만 문지기의 태도는 강경했다. 윗선에서 떨어진 명령이니 절대 어길 수 없다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태도를 다시 한번 명확히 했다. 왕구는 화가 나서 문지기의 멱살을 잡으려 했고 율은 그를 달래어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화내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큰형님이 있을 땐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인데, 이렇게 모른 척을 하다니.”

대문에서 멀어진 둘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율이 담벼락 앞으로 가서는 그 높이를 손으로 쟀다. 지켜보던 왕구가 곁으로 와서 섰다. 안에는 오가는 기녀들도 있었고 양반들도 꽤 보였다. 거기다 무장을 하고 지키고 섰는 덩치 좋은 무사들도 눈에 띄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왕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체 오늘 누가 왔길래 이리 호들갑이야?”

“형님….”

“응?”

“안에 들어가서 그들이 있나 확인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그럼… 제가 담을 넘어 들어가겠습니다.”

왕구의 눈이 커다래진다. 뭐?

“대신 형님께서 앞에서 좀 이목을 끌어 주십시오…. 그 틈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 그건 너무 위험하다!”

“일단 들어가서 저들과 섞이면 쉽게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확인만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야 기다렸다가 잡을 수라도 있지요.”

왕구는 고민하였고 율은 등을 떠밀어 그를 대문 쪽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담을 돌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향하였다. 잠시 뒤 대문 쪽에서 고래고래 소리가 들린다. 왜 이래. 우리 형님을 찾으러 왔다니까. 들어오면 안 된다, 비켜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린다.

율이 목을 쭈욱 빼고 안을 확인하니 마당에 있던 자들 대부분이 그쪽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사들이 대문으로 황급히 가서 왕구를 제지하기에 율은 그 틈에 얼른 담을 기어 올라갔다. 낑낑, 높은 담을 겨우 올라타고 아래로 뛰어내려서는 얼른 몸을 숨기었고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후다닥 섞여 들어갔다.

여전히 대문 앞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누굴 찾으러 온 모양인데? 아휴, 귀한 손님들이 온 날 이게 무슨 난리람. 힐긋 돌아보니 대문 안까지 밀고 온 왕구가 율을 발견하고는 쌍욕을 하고 돌아간다.

“씨발. 더럽고 치사해서 간다, 가! 내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율은 잽싸게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갔다. 복도를 따라 걷는데 여러 개의 방이 나타난다. 방마다 떠들썩한 가락과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음식을 들이려 잠깐 문이 열릴 때마다 사내들과 여인들이 술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귓불에 큰 점이 있는 자. 큰 점…. 율은 그자를 찾기 위해 천천히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앞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많이 취했는지 옷차림은 흐트러졌고, 혼잣말을 중얼중얼.

가까이 온 그자를 보고 율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귓불에 커다란 점이 또렷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조심조심 그자를 쫓아가는데 얼마나 취했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다른 곳의 문을 연다. 그러더니 결국 자신의 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엔 일행 없이 기녀와 그자 둘뿐이었다. 문이 닫혔고 율은 그곳에 귀를 가져다 댔다.

[내일이면 떠난다니 너무 섭섭합니다.]

[한몫 거하게 챙겼으니 한동안 떠나있어야지.]

[그 많은 돈은 어찌 버신 겁니까? 소첩에게도 말을 해 주시어요.]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에 남자가 호탕하게 웃는다. 오늘 밤 천천히 알려 주마. 그러고선 말이 끊기고 끈적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그 제비들과 연관이 있긴 한 거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던 율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잔뜩 취한 양반 하나가 떡하니 코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비단옷과 장신구를 걸친 사내는 키도 체격도 제법 컸다. 비켜서려 하는데 양반이 앞을 다시 가로막는다. 많이 취하여 그런 줄 알았는데 큭, 하고 웃는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인가. 율은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돌아섰다. 그런데 양반이 뒤에서 율의 어깨를 잡아챈다. 놀라서 돌아보는 순간 남자가 율의 손을 우악스럽게 붙들고는 끌고 간다. 손을 뿌리치려고 노력했으나 상대의 악력은 생각보다 셌다.

“노, 놓으십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남자 기생도 있다더니, 넌가 보구나.”

“무슨 소립니까! 저는 기생이 아닙니다! 놓으십시오.”

혹여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이 나타날까, 율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반항하여 몸부림을 쳤다. 그런데 남자가 방문을 벌컥 열더니 그곳으로 율을 던진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율이 다시 일어나 나가려고 하니 그대로 문을 닫고 율을 이부자리로 끌고 간다.

“내 사내는 취향이 아닌데, 네 얼굴을 보니 설 것도 같다.”

“놔주십시오!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팔을 휘두르다 남자의 얼굴에 율의 주먹이 퍽 하고 꽂혔다. 그러자 남자가 혀로 입 안을 훑더니 퉤, 침을 뱉는다. 씨발. 좋게 봐주려고 했더니. 방어할 틈도 없이 남자가 손을 치켜들어 율의 뺨을 냅다 후려친다. 윽.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이번엔 발길질이 날아온다.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응! 내 얼굴에 손을 대!”

아악! 하지 마십시오! 저리 비키십시오! 저항하고 덤벼 봐도 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서 밖으로 나가려는 율을 남자는 갓을 벗기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어와서는 그대로 보료 위에 팽개쳤다.

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코에서 무언가 뜨끈한 것이 흘러나왔고 눈앞은 뿌옇게 변해 갔다. 숨을 헐떡이며 있는데 남자가 위로 올라오더니 율의 도포를 벗겨 내고 저고리와 바지 끈을 풀어 낸다. 손을 뻗어 막아도 소용이 없었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시선을 맞춘다. 얼마나 술을 퍼마셨는지 눈에 초점이 흐릿하다.

“이리 보니 더 곱네. 원하면 내가 첩을 내주마. 혹시 아냐? 내가 왕이 되면 너를 후궁으로 앉혀 줄지. 남자 후궁이라니, 세상이 기함하겠지? 크크크.”

웃는 남자의 눈빛에서 광기가 비치는 순간 바지 속으로 남자의 손이 들어온다. 율은 남자의 어깨를 떠밀며 죽을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만하십시오! 제발! 제발! 머릿속에선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락이 떠올랐다. 왜 이 순간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율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죽기 살기로 소리를 질렀다.

“이락 님! 이락 님! 이락, 컥!”

남자가 우악스럽게 율의 목을 틀어쥐더니 섬뜩하게 웃는다.

“나는 말 잘 듣는 예쁜이가 좋은데, 너는 그렇질 못하니, 죽여야 하나? 응?”

점점 숨통이 조여들고 시야가 흐릿하게 변했다. 손을 떼어 내려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는다. 율은 자신의 무기력함에 눈물만 쏟아 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하는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율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던 남자가 휙! 하고 떨어져 나간다. 콜록, 콜록, 겨우 숨통이 트인 율은 연신 기침을 토해 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다 고개를 들었다.

“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어디선가 나타난 이락이 방금 그 사내의 머리채를 붙들어 끌고 가서는 문 앞에 내팽개친다. 그러고 나서 다시 율에게 돌아오는데 조금 전 사내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고함을 친다.

“네 이놈!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행패를 부리느냐!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지!”

그러자 이락이 창 앞에 있던 장검을 집어 들고는 그것을 들고 남자에게로 간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기녀와 손님들이 밖에서 웅성댔고 남자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

“오늘이 네놈 제삿날인 줄 알아라. 내 아버지가 바로,”

순간 칼이 뽑혀 나와 허공을 갈랐고, 남자의 상투가 잘려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오만방자하던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율 역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남자의 턱이 분노로 떨리었고 이락은 서늘한 얼굴로 칼끝을 이제 남자의 턱 아래로 겨눴다.

“네 아비가 누군지는 저승에 가서 말해.”

칼을 다시 치켜드는데 나이 지긋한 양반 하나가 무사를 대동하여 나타난다. 다들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으로 보아 꽤 높은 신분의 사람인 듯했다.

“그만하시게.”

이락은 칼을 겨눈 채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며 웃었다.

“그 대단한 아비가 영감이었군.”

노인은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상투를 보고 잠시 분노가 휩싸였으나, 그것을 곧 능숙하게 감췄다. 못난 놈. 하고 아들을 질책하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락을 향해 정중하게 부탁한다.

“내 아들이 실수했다면 대신 사과하지.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시게.”

병조 판서의 언행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병조 판서가 저자에게 사과한 것이 맞나. 근데 저이는 수인이 아닌가. 저자는 이락이라고, 왜 아시잖습니까. 금산을 지키는…. 아, 이락이라면 그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한다는 수인이 아닌가. 어찌 이곳에 와 있는 거지. 주변이 떠들썩한 가운데 상투가 잘린 사내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고, 이락은 칼을 옆으로 내던졌다.

“네 아비 덕분에 살았으니, 평생 효도해라.”

이락은 칼을 던지고는 돌아서 율에게 다가갔다. 율은 고개를 떨구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앉아서 얼굴을 살피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다. 하, 이락의 눈빛이 살기에 휩싸였다. 그냥 죽이는 게 낫겠다. 다시 일어서려고 하자 율이 눈치채고 이락의 소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여, 여기서 나가고 싶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락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락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놓고는 벗겨진 율의 도포로 몸과 얼굴을 감싸고는 그대로 안고 일어섰다. 여전히 병조 판서는 그 자리에 서서 이락을 응시하였다.

“아무래도 날은 다시 잡아야겠군. 원하신다면 집까지 사람을 붙여 보내겠네.”

이락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이락이 안고 있는 이가 누구야? 누군지 봤어? 오라버니가 저리 화내는 건 처음이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율은 얼굴을 덮은 도포를 끌어 내렸다.

한쪽 눈이 부었기 때문인지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이락 님….”

하고 조심스럽게 부르니 이락이 냉랭하게 말을 자른다.

“한마디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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