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마을에 내려왔을 무렵엔 해가 지고 있었는데, 장이 서는 날이라 그런지 난전에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하는 이들이 꽤 많이 나와 있었다. 왕구는 제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근처 이곳저곳을 돌아봤고 율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 율의 팔을 덥석 붙든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능글능글 웃는 자를 율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곳에 처음 와서 만난 상점 주인이다.
“선비님 혼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락 님은? 어디 가셨소?”
율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다른 분하고 같이 왔다고 알려 주니 팔을 잡아끌며 상점으로 데려간다.
“저번에 사 간 것들은 어찌 마음에 드셨나? 이번에 진짜 좋은 것을 들여왔는데 한번 보여드릴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다 율은 이락의 저고리를 잃어버린 것이 떠올랐다. 어머니께 산삼을 준 것도 그렇고, 이락에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하나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구는 여전히 누군가와 이야기 중이었다. 손짓으로 상점 안에 들어가 있을 거라는 알려 주고는 그대로 주인을 따랐다. 여전히 실내는 온갖 신기한 것들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락의 선물을 고르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갓을 쓰지도 않았고, 장신구를 하지도 않으며, 사치품이나 그런 걸 모으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율은 이락이 좋아하는 걸 알지 못했다. 가만히 서서 고민을 하고 있으니 주인이 와서 싱글거리고 웃는다.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까?”
“그게 아니라… 선물을 드릴 분의 취향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인데?”
율은 이락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쑥스러워 둘러댔다.
“외향은 차가워 보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입니다.”
“아, 그럼 이락 님은 아닐 테고.”
율은 흠칫했다. 주인의 얼굴을 보니 이락이 아니라고 굳건하게 믿는 것 같았다. 차라리 처음에 솔직하게 털어놓을걸. 후회하며 댕기 하나를 집어 살피는 척하며 주인에게 질문했다.
“근데 주인장께서는 이락 님과 꽤 친분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큼. 친분이랄 것까진 없고. 오래 알아 온 사이이긴 하지요.”
“아….”
“그분이 뭘 좋아하는지 정도는 꿰뚫고 있달까?”
“뭡니까, 그게…?”
율이 궁금하여 쳐다보니 주인이 앙큼하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고는 거기에 반대편 손가락을 쑥 집어넣는다.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하는 걸 보고 율은 아하, 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투호 놀이 말씀하시는 거군요? 제가 사는 곳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습니다.”
그러자 주인장이 풉, 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 맞습니다. 이락 님이 좋아하는 게 그겁니다.”
율은 맞췄다는 뿌듯함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단 투호를 하나 달라고 한 뒤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이번엔 부채가 눈에 띈다. 무령은 만날 때마다 근사한 부채를 들고 있었다. 이락도 그런 것이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텐데….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에도 좋고….
부채를 눈여겨보고 있으니 주인이 하나씩 펼쳐 설명을 해 준다.
“이것은 작년까지 육지에서 가장 잘나가던 화공이 그린 것이죠. 원래는 도화원에 있었는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자결하였지 뭡니까.”
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결했다고요…?”
“덕분에 그림값이 어마어마하게 뛰었습죠. 원래 사연 있는 환쟁이들 그림값이 비싼 법입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고 믿게 한 달까?”
율은 도무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죽은 뒤에 유명해지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주인이 너무 열심히 설명하여 토를 달지는 못하였다. 율이 내켜 하지 않자 그는 다른 부채를 보여 줬다. 붉은 매화꽃이 은은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이락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 이건 얼마입니까?”
“돈은 됐고, 혹시 그때 그거 아직도 가지고 계십니까?”
그거요? 의아하게 쳐다보니 주인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든다. 그 진주요. 라고 말하였고 율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주인이 싱긋 웃는다.
“돈 대신 진주로 주십시오. 원래는 그것보다 더 비싼 건데, 제가 특별히 진주만 받고 내어 드리지요.”
율은 잠시 고민했다. 육지에서는 진주가 꽤 귀하다 들었다. 그러니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이락도 경고하지 않았던가. 율은 생각을 정리한 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냥 전으로 치르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당황하여 말린다.
“아니 왜 이러실까. 아니면 제가 다른 걸 하나 덤으로 얹어 드립죠. 아니다. 기분이다. 두 개를 드리지요. 골라 보십시오.”
율은 상냥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진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아, 주인이 아쉬운 얼굴을 하였고, 율은 주머니에서 엽전을 꺼내 계산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인사를 하고 나와 보니 왕구가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모습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형님. 찾았습니까?”
그는 땅이 꺼질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엔 본 사람이 없단다.”
“왕방울 형님은요? 그분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놈도 나처럼 당해서 앓아누웠다. 부인이 남은 다리마저 부러트린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모양이야. 갔더니 초주검이 되어 빌고 있더라.”
아아, 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봤다. 해가 지어 하늘에는 별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고민하던 율은 조금 전 들렀던 가게를 돌아다봤다. 상점 주인은 취급하는 물건이 많으니 보고 듣는 것도 많지 않을까. 율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주인이 율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선비님. 아직 더 살게 남으셨소?”
“여쭐 것이 있어서 다시 왔습니다….”
율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박씨를 담았던 자루였는데 거의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펼쳐 놓고 박에 들어 있던 종이를 꺼내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주인이 손님을 상대하는 것도 잊고는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본다.
“이게… 뭡니까?”
“혹시 근처에서 이것과 같은 걸 사용하는 자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주인이 턱을 쓸었다. 그러고 나서 박씨와 종이를 놔두고는 자루를 들어서 이리저리 살핀다. 이건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일부러 여운을 남기길래 율은 품에서 진주를 하나 꺼내었다. 그걸 본 주인이 밉살맞게 웃는다.
“에이, 없으시다더니.”
“마침 딱 하나 남은 게 있었습니다. 혹시 이걸 보셨습니까?”
“물론, 알다마다요.”
“거기가… 어딥니까?”
“이 자루 끝에 찍힌 문양 보이시죠? 이걸 만든 이가 서가라는 놈인데, 어제 내 동기가 기방에서 봤답니다. 한동안 거기다 살림을 차리고 지내더니 무슨 이유인지 낼이면 이곳을 뜬다고 했다나.”
“기방이면….”
“당연히 영월관이죠. 근방에서 제일 큰 기생집이니까.”
“혹시 그자의 생김도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귓불에 큰 점이 있어서 한눈에 보면 알 겁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놈이 요즘 물 건너온 제비인가 뭔가 하는 놈들하고 어울린다고 하던데,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
궁금해하는 주인에게 율은 대답 대신 진주를 조심스럽게 넘기었다. 그걸 받아 든 주인의 얼굴이 환해졌고 율은 조곤조곤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만약… 저한테 거짓말하신 거면… 진주를 다시 받으러 오겠습니다.”
주인장은 넉살 좋게 웃었다.
“암요. 마음대로 하십쇼.”
“그땐 이락 님과… 함께 올 것입니다.”
주인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찜찜한 얼굴로 진주를 챙기었고 율은 웃으며 깍듯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는 왕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왕구가 미안한 표정을 한다.
“나 때문에 네 진주까지 잃었구나….”
“아닙니다. 지금은 형님 돈을 찾는 것이 먼저지요. 근데 영월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알다 말다. 큰형님이 제집 드나들 듯 하는 기생집 아니냐.”
아… 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오늘 계시진 않겠지요…?”
“발길을 끊은 지 꽤 됐다.”
율은 조금 안도하여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둘은 영월관으로 향해 가다가 여기저기 보이는 먹거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꼬르르, 밥도 먹지 못하고 왔더니 배 속이 아우성이다. 왕구도 마찬가지였는지 걸음이 점점 만두를 팔고 있는 가게 앞으로 옮겨 간다.
“방울아. 우리 만두 하나씩만 먹고 갈까?”
“배고프십니까…?”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은 것 같다.”
그 말에 율은 소리 없이 웃었다. 새로 나온 왕만두가 있다길래 호기심에 그것을 샀더니 사람 얼굴만 한 만두를 내어 준다. 율은 기함했고 왕구는 제겐 안성맞춤이라며 좋아했다. 결국 율은 작은 걸, 왕구는 큰 걸 사서 나란히 들고 영월관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왕구는 율이 양손으로 만두를 움켜쥐고 오물오물 베어 먹는 모습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간다.
“왜… 왜 그렇게 절 보십니까?”
왕구는 감탄하였다.
“방울아. 역시 귀여운 게 최고다.”
“예?”
“세상에 어떤 귀여운 걸 가져와도 너를 당해 낼 순 없을 거다.”
예상 못 한 칭찬에 율은 볼이 붉어졌다. 그, 그런 말씀을 어찌 대놓고 하십니까. 그리고 제 나이 이제 스물입니다. 귀엽다는 표현은 좀…. 하지만 못생겼다는 말보단 나쁘지 않았다. 걷다 보니 저 멀리 대궐 같은 기와집에서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담을 타고 넘어온다. 율은 그것이 영월관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