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율은 이락의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곳에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더니 온천에 몸을 담그고는 팔짱을 끼고 두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났구나. 정자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율은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락 님….”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율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이락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혹시 제게… 화가 나셨습니까?”
“…….”
율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말을 꺼냈다.
“실은 제가 이락 님의 옷을 잃어버린 건… 실수가 아니라 다른 것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낮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젖은 이락의 옷을 새가 물어간 일, 그걸 쫓다가 이상한 패거리들을 만난 일, 그들 중 하나가 율을 알고 있었으며 이락을 찾고 있던 일. 줄줄줄 이야기를 하던 율은 잠시 고민하다 무령을 찾아간 것까지 털어놓았다.
“그래서 무령 님께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아무래도 이락 님보다는 무령 님이 해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분은 신력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제가 옷을 잃어버린 건 제 잘못이니 내일이라도 마을에 내려가 비슷한 것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화를 푸십시오….”
“…….”
“그리고 제가 낮에 마주친 자들이… 왕구 형님이 말한 화적 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색이나 말투가 평범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락 님께서 당분간 몸조심을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
“근데, 그날 주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는 술에 취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 그자들과 싸우셨습니까? 귀를 다친 자가 있던데 이락 님이 그러신 겁니까?”
눈꺼풀이 올라가며 이락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율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무령이 그놈들도 해치워 주고, 네게 기도 나누어 주던가?”
무심하게 묻는 말이었으나 율은 입이 딱 붙어 버렸다. 저번에 무령이 기를 넣어 준다고 했을 때 이락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알기에 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엔 거짓말을 하였다.
“아, 아닙니다. 구해 주시기만… 했습니다….”
이락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구나.”
“뭐가… 말입니까?”
“토끼의 기와 여우의 기는 상극이다. 내가 네 몸 안에 나의 기운을 잔뜩 넣어 놨는데, 거기에 여우가 또 기운을 넣으면 어찌 되겠느냐?”
그게 무슨…. 율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율을 보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기가 충돌해서 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무령을 찾아가지 말라고 한 것이고.”
그 말을 듣자마자 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율은 입을 벌린 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락의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가 충돌한다니요? 농담이시지요? 저를 또 놀리려 그러시는 거지요?”
“놀리긴. 생사가 달린 문젠데 그걸로 내가 거짓을 말하겠어? 아무튼, 받지 않았으니 됐다. 아니면 넌 오늘 자시에 몸뚱어리가 찢겼을 테니까.”
율은 저도 모르게 이락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여태 뭘 들은 게야. 강한 기운이 부딪치면 폭발할 수밖에 없고, 그럼 몸뚱이도 찢어진다. 너처럼 연약한 것들은 갈가리 찢겨 오장육부가 바깥으로 흘러나올 테지. 물론, 너는 기를 받지 않았으니 멀쩡할 테지만.”
“아…….”
율은 절망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락은 다시 눈을 감았고 율은 안절부절못하며 온천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면서도 이락을 힐긋힐긋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정말일까. 아니면 나를 놀리려 거짓말을 하는 걸까.
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시가 되려면 얼마나 남았지.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배꼽 위쪽이 뒤틀리는 느낌을 들며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설마, 이게 신호인가. 결국 율은 겁에 질려 이락에게 후다닥 뛰어갔다. 그러고서는 그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이락 님! 이락 님!”
이락이 무심한 얼굴로 슥 쳐다보았고 율은 울상을 지으며 이실직고했다.
“제가 실은… 무령 님께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니라….”
“아니라?”
“기… 기도 나누어 받았습니다.”
이락이 안타깝고 속상한 표정을 하였다. 저런. 어쩌다 그런 것이냐. 걱정스러운 말투에 율은 그제야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저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근데 무령 님이 갑자기… 넣어 주셔서….”
“다른 것도 넣어 줬어?”
율이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다른 거… 뭐요? 라고 묻다가 뒤늦게 알고는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입만 잠깐 맞추었습니다.”
“얼굴이 또 빨개졌겠구나.”
“놀라서… 그런 걸 알아챌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대로 도망쳤으니까요.”
흠, 이락은 대답이 없었고, 율은 혹여라도 제 몸이 터져서 찢길까 봐 애가 탔다. 그래서 이락의 팔을 붙들고는 눈빛으로 애원을 하였다.
“지금 하신 말씀은… 농이시죠?”
이락은 그런 율의 손을 토닥였다.
“미안하다. 내 진작 말해 줬어야 하는 건데….”
율은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대신 네 시신은 잘 수습하여 용궁으로 돌려보내마. 아니다, 전에 그 새끼 범 곁에다 묻어 줄까? 같이 뛰어놀련?”
율은 두려운 마음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훌쩍거리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니 이락이 턱을 괴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말에 울고 있던 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락이 손을 뻗어 율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 주었다. 커다란 손이 살갗을 어루만지는데 율은 마음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낮에 무령이 제 뺨을 만져 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를 몸 밖으로 빼내려면 사출을 해야 한다.”
“사출…이요?”
이락의 시선이 율의 가랑이 사이로 내려갔고, 율은 얼굴이 희게 질려 버렸다. 그, 그 말씀은…. 그러니까 저의 양물에서… 씨물을 빼야 한다는… 것입니까? 라고 물으니 이락이 고개만 끄덕인다. 율은 몸이 터져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그것도 한 번으로는 안 된다. 족히 두 번은 빼야… 효과가 좀 있으려나?”
율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몸이 터져 죽는 건 싫으나 씨물을 빼는 건…. 게다가 율은 그것을 스스로 빼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밤에 자다 야한 꿈을 꾸어 저절로 나온 게 한두 번 있을까. 절망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락이 몸을 돌려 율의 얼굴을 지그시 올려다본다.
“언제까지 울 생각이냐. 조금 있으면 자시가 될 텐데.”
“저는… 저는 그것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이락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괜찮다. 나는 할 줄 안다.”
이락 님이요? 하고 놀라서 묻다가 며칠 전 일을 떠올리고는 율은 표정을 굳혔다. 그때 이락이 제게 아랫도리를 비벼 와서 자극하는 바람에 그대로 씨물이 흘러나왔지 않은가. 율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입을 벙긋거리면서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락이 미련 없이 다시 돌아앉아 정면을 본다.
“관둬라. 나도 싫다는데 억지로 하고 싶진 않다. 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안타깝지만, 내가 손대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 싫은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율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지난번처럼… 그리하실 겁니까?”
그러자 이락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니.”
“그, 그럼요?”
“궁금하면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라. 내 말로 가르쳐 줄 테니.”
율은 고민하였다. 그러면서 자꾸 하늘을 쳐다봤다. 자시까지는 얼마가 남은 걸까. 이락의 말은 사실일까. 전처럼 나를 놀리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진지한 이락의 표정을 보니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자꾸 들었다.
율이 고민하는 동안 이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신선처럼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사락, 사락, 옷이 벗겨지는 소리가 나고 이락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첨벙. 첨벙. 물소리가 들려왔고, 사위가 조용하다. 이락이 다시 눈을 뜨고 보니 율이 알몸으로 물속에 어깨까지 담근 채 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다.
그걸 보며 이락이 눈짓을 보냈다. 이리 가까이. 망설이던 율은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이락은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걸 참느라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자, 이제 네 양물을 손으로 쥐어라.”
물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으나 율의 표정으로 보아 잡긴 잡은 모양이다. 세상에 자기 양물을 손으로 만지면서 저런 끔찍한 표정을 짓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락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다음 요구를 했다.
“했어?”
“예….”
“그럼 앞뒤로 천천히 손을 움직여 문질러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