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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3화 (53/102)

53화

기녀 소월이 돌아가고 난 뒤 이락은 집 주변을 살피었다. 소월이 올 때까지만 해도 있던 쥐방울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나무 숲에도 가 보고, 개울가에도 가 봤으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율이 하다 만 것으로 보이는 빨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락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율의 방문을 열었다.

[이락 님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혹시… 도망을 하였나. 방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 애지중지하던 등껍질이 한쪽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율의 방을 둘러보던 이락은 밖으로 나가려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궤짝 위 쌓아 둔 이불 사이에 책이 한 권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을 뺀 이락은 첫 장을 넘기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쥐방울의 하루하루를 기록해 놓은 것이었는데, 그날 있었던 일과 짧은 감상을 적어 두었고 최근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이락은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이락 님’ 세 글자 말고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다. 이락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적으려다 말았지? 이락 님은 멋지다? 이락 님은 잘생겼다? 이락 님을 사모한다? 이락 님과 입 맞출 때 행복했다?

도무지 모르겠군. 전부 다라고 해 두지. 뻔뻔하게 웃던 그는 방을 둘러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것은 진짜 어딜 간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왕구가 막 대문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지게에 무언가를 잔뜩 싣고 온 그는 이락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큰형님, 왜 집에 계십니까?”

“일이 일찍 마무리됐다. 근데, 그건 뭐야?”

이락이 다가가니 왕구가 지게를 한쪽에 세워 놓고는 잽싸게 온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봄이고 해서 제가 이것저것 심을 것을 사 왔습니다.”

“심어? 뭘?”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박,”

하다가 입을 손으로 막으니 이락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박?”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방울이 보셨습니까? 개울가에 빨래만 덩그러니 남아 있던데요.”

이락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없길래 너하고 나간 줄 알았다.”

“제가 찾아볼까요?”

“근방은 내가 다 돌아봤어.”

“혹시 온천에 갔나?”

왕구의 혼잣말에 이락은 무령을 떠올렸다.

[선비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찾으시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이 무령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된다오.]

설마…. 이락의 얼굴이 살벌하게 변하였다. 아니겠지. 기운도 되찾았고, 귀신도 보이지 않는데 굳이 무령을 찾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멀리 나갔다가 괴한에게 봉변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이락은 조금씩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초조하다는 것은 이락에게는 꽤 불편하고 낯선 감정이었다. 기분이 상한 이락은 생각을 접어 두고는 마지막 방으로 가서 들어갔다. 그곳에서 구석에 넣어 뒀던 면경을 꺼내 열자 거울에 이락의 얼굴이 비친다.

이락은 입 안에서 혀를 움직이며 할 말을 골랐다.

“쥐방울이 지금 어딨는지 보여다오.”

거울에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았고, 이락은 섬뜩하게 경고했다.

“아궁이에 들어갈래?”

그러자 거울이 일렁이며 이락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나타난다. 처음에 숲이 보였고 그다음엔 다소 당황한 듯한 율의 얼굴. 대체 어디를 갔길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순간 무령의 얼굴이 나타나며 율에게 입을 맞춘다. 이락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입맞춤을 짧았으나 율의 얼굴은 타들어 갈 듯 붉어졌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뒤돌아 후다닥 뛰어간다.

그러더니 다시 이락의 얼굴로 바뀐다.

이락은 하,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분노가 담긴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붉은 빛을 띠었다. 하지만 거기엔 분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락 본인도 그것을 깨닫고는 면경을 탁,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소리가 들린다.

[방율이 누굴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내가 알려 줄까?]

키득키득 웃는 소리는 분명 경대가 내는 것이었다. 이락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것을 노려보다 방을 막 나서려고 했다.

[너는 아니다.]

키득키득. 이락은 이를 까득 물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한낮 마물 주제에. 내 조만간 저것을 부숴 땔감으로 대신 쓸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마루 아래로 내려오는데 저 멀리서 왕구가 온다. 헐레벌떡 뛰어온 왕구는 방율이 왔다며, 빨래터로 갔다고 알려 줬다. 이락은 그곳으로 향하며 일갈했다.

“넌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라.”

그렇게 빨래터가 가까워지자 방율의 뒷모습이 보인다. 율은 바구니에 빨래를 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봤다.

“형님, 제가 빨래를,”

이락이란 걸 알고는 율은 지나치게 당황하여 빨래를 뒤로 감췄다.

“제, 제가 빨래를 하기 싫어 도망간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새가 갑자기 날아와서….”

이락은 서늘한 표정으로 율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옷고름의 형태가 바뀐 걸 확인하고 그의 가슴에서 순식간에 불이 확 지피어졌다. 그것은 호국에서도 임자가 있는, 즉 혼인을 한 사람들이 짓는 매듭이었다. 매듭이 잘 풀리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도 함부로 풀지 말란 뜻도 있다고, 그렇게 언젠가 들었었다.

이락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고 율은 되레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락은 율의 고름을 단숨에 확 잡아당겨 풀었고 놀란 율이 저를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매몰차게 돌아섰다.

“가자. 너 때문에 밥도 굶고 배고파 죽겠다.”

***

“세상에… 형님… 어쩌려고 이렇게….”

율은 왕구가 사 온 씨앗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박씨가 얼마나 많은지 자루로 한가득하였다. 율이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하니 왕구가 이락의 방을 힐긋 보더니 율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

“큰형님께는 절대 비밀이다. 재산을 다 털어 이걸 사 온 걸 알면 호통을 치실 거다.”

율은 입을 쩍 벌렸다. 재산을 모두 털어 사셨다고요? 이걸?

“제가 분명 박에서 나온 금만 쓰시라 말씀드렸는데…. 정말 큰일 나십니다. 내일이라도 가서 무르십시오. 아니다. 지금이라도 가는 게 낫겠습니다.”

걱정하는 율과는 달리 왕구는 태연했다. 오히려 당장 떼부자라도 된 듯 여유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방울아. 사내는 말이다, 나처럼 이렇게 간이 커야 한다. 그래야 부자가 될 수 있어. 잘 새겨들어라.”

“새겨듣기 싫습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 많은 박을 어디에 심으실 겁니까. 설마 여기 지붕에 다 던지실 건 아니지요? 그랬다간 지붕이 무너질 것입니다. 저는… 잠자다 깔려 죽긴 싫습니다.”

“너는 어찌 그리 걱정이 많으냐. 내가 바보도 아니고 설마 이걸 지붕에 다 던질까. 그랬다간 큰형님한테 들통나서 곤욕을 치를 텐데. 근처에 적당한 땅을 봐 두었다. 발길이 뜸한 곳이라 그곳에 박을 심을 테니 안심해.”

하, 율은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미 왕구는 부자가 될 생각에 들떠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자루 속 씨앗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왕구의 기분을 더는 망치기 싫어 입을 다물었으나 이것을 이락에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고민이 됐다.

그러다 율은 힐긋 이락의 방을 돌아봤다. 저녁을 먹는 내내 그의 표정이 어찌나 서늘한지 밥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다 먹은 후에도 말 한마디 눈빛 한번을 건네지 않아 율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시무룩한 표정을 하니 왕구가 그런 율의 팔을 툭 친다.

“내가 그리 걱정되느냐?”

“형님도 형님이지만…. 이락 님이 제게 잔뜩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큰형님이? 왜?”

율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냈다.

“제가… 이락 님 옷을 하나 잃어버렸지 뭡니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새가 날아와 물고 갔는데, 이락 님이 그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래? 형님이 그런 거로 화낼 분은 아닌데.”

“내일 시장에 가서 비슷한 옷이라도 구해 드리면 기분이 풀리실까요?”

“뭘 그렇게까지 하냐. 형님 옷은 말 그대로 다 똑같아서 하나 잃어버렸다고 해도 티가 나지 않는데.”

그렇게 둘이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락의 방문이 벌컥 열린다. 율은 흠칫하였고, 왕구도 씨앗을 들킬까 싶어 자루를 얼른 옆으로 치웠다. 이락이 신을 신고 내려오면서 둘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큰형님. 어디 가십니까?”

“온천에 다녀오마.”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쌩하니 나가기에 둘은 당황하여 서로만 쳐다봤다. 그런데 이락이 대문 앞을 나서기 전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둘 다 찔리는 게 있어 딴청을 피우는데 이락이 율을 부른다.

“뭐 해, 따라오지 않고?”

율이 당황하여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 저도 갑니까?”

그러자 왕구가 대신 나섰다.

“큰형님. 오늘 쥐방울이 피곤한 듯하니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물론 저는 뜨신 물이라면 질색이지만 형님이 원하시면,”

이락의 표정이 점점 살벌해졌기에 왕구는 입을 다물었고 율은 후다닥 뛰어가 등에 불을 붙여서는 들고나왔다. 이락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고 율은 그 뒤를 따라가며 왕구를 돌아봤다. 왕구가 잘 다녀오라며 손을 작게 흔들었으나 율은 마치 죽으러 끌려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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