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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0화 (50/102)
  • 50화

    율은 평상에 놓인 콩알만 한 금덩이 다섯 개를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옆에는 갈라진 박이 놓여 있고 왕구는 평소보다 들뜬 얼굴이었다.

    “정말 신기합니다. 박에서 이런 게 나오다니요.”

    “그렇지? 이것은 왕방울이 너한테 준 것이니 네가 가져가.”

    “아, 아닙니다. 됐습니다. 박을 딴 건 형님이 아닙니까.”

    “됐다. 원래 주인은 네가 아니냐?”

    서로 가져가라며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왕구가 뜬금없이 율에게 제안을 해 온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하는 게 어때?”

    “……?”

    “이것으로 다시 박씨를 사자. 박씨를 많이 사서 그것을 뿌린 다음에 수확하면 또 금덩이가 나오겠지? 그럼 그걸로 또 박씨를 사고, 금이 나오면 또 박씨를 사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우린 육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는 거다.”

    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것은 증명된 방법입니까? 그게 사실이면 너도나도 박씨를 사면 될 텐데 왜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왕구가 주변을 경계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왕방울한테 슬쩍 물어보니 제비들도 이것을 구한 지 얼마 안 됐다는구나. 아주 먼 곳에서 이것을 발견하여 들여온 건데, 아직은 너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박씨가 남아돈대.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먼저 박씨를 대량으로 사 두었다가 되파는 것은 어떨까?”

    “혹시 그것은 매점매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제법 똑똑하구나.”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같은데. 이락이 전에 말해 줬던 그 옥장판 이야기와 결이 비슷하지 않은가. 왕구는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말인데, 방울아, 가진 돈이 얼마나 되냐?”

    약간의 돈과 진주를 가지고 있긴 하나 그것은 꼭 필요한 곳에 쓸 예정이었다.

    “저는… 가난한 선빕니다. 빼 주십시오.”

    난처하게 웃으니 왕구가 턱을 괸 채 고민을 하다 결정을 내린다.

    “내가 모아 둔 걸 빌려줄 테니 이참에 동업하는 건 어때?”

    율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확천금을 벌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박마다 금이 들어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왕구를 말렸으나 왕구는 인생은 한 방이라며, 벌써 부자가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율은 이락에게 고자질을 해서라도 그를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 고민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정말 그것이 잘되어 왕구가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앞일이라는 것은 미리 내다보지 않는 이상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이곳에서 육지인들과 어울려 지내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그럼 형님의 돈 말고 이 금으로만 씨앗을 사십시오. 안전하게 한 번 더 확인한 뒤 도전을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섣불리 요행을 바라다가 크게 재산을 잃은 분을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 누군데?”

    “누군지는… 비밀이고요.”

    으음. 곰곰이 생각하던 왕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을 주었으니 내 너의 말을 따르마. 그러더니 그는 금덩이를 챙겨 일어났다. 얼른 왕방울에게 다녀오겠다며 들떠서는 집을 나선다. 혼자 남은 율은 평상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왕구에게 별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도 육지에 와 인연을 맺은 이중에서는 제일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않았나.

    그렇게 앉아 멍하니 있던 율은 이락이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그의 방문 앞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툇돌에 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외출을 한 모양이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던 율은 어제 일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무심코 입술을 매만졌다.

    이락의 입술이 닿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입 안에서 그의 혀가 활개를 치고 다니던 게 생생하게 떠오르자 율은 진저리를 치며 손을 휘저었다. 미쳤어. 왜 그것을 떠올린 거야. 그런데 이락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이후로 기운이 돌아오고 귀신 또한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도 몇 번이나 뒤뜰 근처로 가서 확인하였다.

    구미호도 할 수 있는 것을 어째서 이락도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양기가 넘쳐서일까. 아니면 그가 구미호만큼 별난 존재라서 그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율은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그만 떠올리자. 그만.

    찰싹 양 뺨을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잡념을 털어내는 데는 몸을 쓰는 게 제일이다. 그렇게 우물로 가 걸레를 빨고는 그것을 가지고 마루를 닦기 시작하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나타난다. 말을 탄 여인은 전모를 삐딱하게 쓰고 옷차림과 머리 장식이 화려했다. 그들이 허락도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하기에 율은 서둘러 신을 신고 뛰어나갔다.

    “누, 누구십니까?”

    가까이에서 본 여인의 얼굴에 율은 잠시 멍한 표정을 했다. 용궁에서는 용왕의 장녀인 무연 공주를 사람들이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하였는데 그런 공주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외모였다. 여인은 하인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렸고 집을 한번 휙 둘러봤다.

    “그쪽은 뉘신지? 행색은 양반이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은 또 고고한 선비의 낯을 하고 있으니 영 헷갈리네요.”

    율은 걸레를 뒤로 감추고는 꾸벅 인사를 하였다.

    “저는 방율입니다.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객이지요.”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객이요? 이락 오라버니께서 집에 외부인을 들이다니. 참으로 별일이네요.”

    여인이 꽃처럼 환하게 웃는다. 짐작하건대 그녀는 여염집 규수가 아니었다. 율은 이락이 기방에 자주 드나들며 음탕하게 논다는 주막집 주인의 말을 떠올렸다. 혹시 이 여인이 이락을 찾아온 연유가….

    “오라버니께서 도통 저를 찾지 않으시니 직접 와 봤습니다. 혹시 안에 계신가요?”

    “아… 외출하셨는데,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흠, 그녀가 새침한 표정을 하더니 이락의 방 쪽으로 간다. 처음엔 마루에 앉으려는 건가 했는데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기에 율은 부리나케 달려가 그녀를 막아섰다.

    “어, 어딜 가십니까?”

    여인이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오실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락의 방은 왕구나 왕태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율도 청소할 때 빼고는 마찬가지였다.

    “마, 마루에서 기다리십시오. 방에 들어가는 것은 이락 님께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턱을 치켜들며 눈을 새침하게 떴다.

    “설마요. 전에도 몇 번이나 들어갔는걸요.”

    순간 율은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거 같았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달라 이락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여인은 율을 지나쳐 나비처럼 사뿐사뿐 그곳으로 걸어갔다.

    오라버니! 하고 청량한 목소리로 부르더니 이락이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그의 팔을 붙잡아 매달리고는 활짝 웃는다. 그 미소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여인에게 관심 없는 율이 봐도 마음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이락의 시선이 여인에게 닿았다가 율에게로 옮겨 왔다. 율은 괜히 뻘쭘한 마음이 들어 부엌으로 얼른 들어갔다.

    “어찌하여 요즘은 통 기방에 오시질 않으십니까.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시죠?”

    “안다. 그러지 않아도 수일 내 들를 참이었어.”

    “어머, 그럼 저와 마음이 통했나 봅니다. 역시 오라버니와 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다니까요.”

    꺄르르 웃는 소리에 율은 입을 삐죽 내밀고 나뭇가지를 툭 분질러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참, 제가 선물을 가져왔는데, 이곳에선 보는 눈이 많아 곤란하니 방으로 들어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선물이라….”

    “아주 흡족하실 겁니다.”

    대화가 끊겼다. 궁금하여 쳐다보던 율은 마루에 올라서던 이락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율이 먼저 고개를 홱 돌려 이락을 외면하였다. 그렇게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고 밖이 조용해진다.

    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저도 모르게 이락의 방을 한번 쏘아보고는 우물 앞에 잔뜩 쌓아 놓은 빨래 바구니와 방망이를 챙겼다. 동시에 방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고,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락의 목소리가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괜히 서러움이 몰려오고 코끝이 찡 아려 온다. 바구니를 챙겨 빨래터로 나가는데 여인이 데리고 온 하인이 대문 밖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걸 본 율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계십니까. 들어가서 앉아 쉬시지요.”

    하인이 율을 향해 몸을 조아렸다.

    “선비님이야말로 어찌하여 저 같은 아랫것에게 존대하십니까. 말씀 낮추세요.”

    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다에선 왕족이 아닌 이상 신분과 관계없이 나이가 많으면 존대를 한다. 집에서 일하는 가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하대하여선 안 되었고, 육지처럼 그들을 재산 일부라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쉬십시오.”

    그러자 하인이 슬쩍 집 쪽을 보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두 분이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하여 비켜 드린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은밀하게…. 남녀가 은밀하게 할 이야기 뭘까. 율은 더는 묻지 않았고 그를 지나쳐 빨래터로 향하였다.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빨래를 내려놓는데 체한 것처럼 답답해진다. 율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빨래를 두드리는데 자꾸만 이락과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럴수록 방망이를 두드리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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