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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9화 (49/102)

49화

왕구는 빨랫줄에 걸린 빨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형님의 바지와 속곳, 그리고 방율의 바지와 속곳이 저기 나란히 걸려 있는 걸까.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락이 방에서 나온다. 왕구는 냉큼 그에게로 가 품 안에 든 것을 꺼냈다.

“큰형님. 말씀하신 것 받아왔습니다.”

이락은 왕구가 내민 것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부적으로 여희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여희 님께서 이것을 태워 방울이에게 먹이라 하셨습니다. 당분간은 효력이 있겠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고?”

왕구가 기억을 더듬는지 고개를 한번 갸웃한다.

“그 뭐라더라.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고, 그리 말하면 아실 거라 하던데….”

이락은 부적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방율을 돌려보내겠다는 여희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였다. 곁에 있었다면 꽤 많은 잔소리를 들었을 텐데. 그 사이 왕구는 마당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방울이는 어디 갔습니까?”

“방에서 잔다.”

또 어디 아픈 건 아닙니까? 왕구가 걱정되어 들어가려 하기에 이락이 탁 손으로 가로막았다.

“둬라. 피곤해서 그런 것이니.”

“아.”

“깨어나면 이것을 태워 갈아 탕제에 섞어라. 절대 알게 해선 안 된다.”

대충 이야기를 들은 터라 왕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율이 귀신을 보기 시작하였고 그것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여우가 찾아와 구슬 이야기를 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궁금하여 물었으나 이락은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왕구도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할 일을 하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탕약을 달이는 동안 왕태가 상단에서 받아 온 은자를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며칠 뒤 용궁에서 가져올 산호의 값을 치를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은자의 수량을 확인한 이락은 잠시 볼일이 있다며 왕태와 외출을 하였고 혼자 남은 왕구는 율의 탕약이 다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지붕 위에 올려진 박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박이 저렇게 빨리 자랄 수가 있나. 왕방울이 귀한 박씨라며 호들갑을 떨던데. 혹시 다른 게 들어 있는 건 아닐까.

궁금해진 왕구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박 하나를 따서 내려왔다.

“탐스럽게 잘도 익었구나.”

그는 창고에서 작은 톱 하나를 들고 와서 박을 가르기 시작했다. 슥삭슥삭슥삭 동그랗던 박이 점점 옆으로 벌어지며 콩알만 한 것이 안에서 반짝한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인가 하였는데 박이 쩍 벌어지고 나서야 그것의 정체가 확실히 드러났다.

왕구는 그것을 주워 들고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금이 아닌가. 거기다 하나가 아니라 5개가 들어 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짱을 끼고 박을 내려다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왕방울 말대로 귀한 박씨라서 이런 게 나온 걸까. 그럼 저 위의 박에도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단 말인가.

왕구는 들뜬 마음에 사다리를 놓고 후다닥 지붕 위로 올라가 남은 박 두 개를 모두 땄다. 슥삭슥삭슥삭 톱질을 하는 그의 팔에는 힘이 실리고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번에도 박이 쩍 갈라졌고 왕구는 재빨리 손부터 넣었다.

“이번에도 또 금이… 어?”

이번엔 금이 아니라 종이가 접혀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혹시 보물이 묻힌 곳을 알려 주는 지도가 아닐까. 왕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곱게 접혀 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진다. 뭐야, 이게?

“다… 다음…에?”

왕구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모르는 글자가 두 개나 있어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박을 탔는데도 이번에도 역시 쪽지다. 그것에는 똑같은 글자가 적혀 있다. 이게 대체 뭐라고 쓴 거야.

왕구는 짜증이나 톱을 홱 집어 던지고는 평상에 놓인 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래도 저게 어디야. 신기하여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 이빨로 깨물어 금이란 것을 다시 확인하며 하하, 웃었다.

“이게 무슨 횡재람.”

그러다 생각했다. 혹시 박을 더 크게 키우면 보물의 양도 늘어나는 건 아닐까. 가만, 왕방울이 이걸 제비한테서 얻었다고 했었지. 얼마에 구했는지 물어봐서 박씨를 사다 심어야겠다. 박씨의 값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이렇게 금만 나와도 영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은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문이 열리면서 방율이 나온다. 그는 아침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고, 울었는지 눈가도 빨갰다. 왕구는 그걸 보고는 부리나케 달려가 확인하였다.

“방울아. 안색이 왜 더 나빠졌어?”

“잤… 잤습니다.”

“혹시 화병이 도진 거냐? 형님 때문에?”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걸 화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이락과 그러고 나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사실 율은 이락이 싫은 것보다 자신이 그런 행위에 느껴 사출하였다는 것이 더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옷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춘화집에서 보던 음란한 행위를 벌건 대낮에 마루에서 하지 않았나. 선비가 돼서 어찌….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어땠을지 아찔하다. 율은 아까의 그 감각이 다시 생각이 나서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가냐?”

“예. 좀 쉬다 나와서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저녁은 무슨. 됐다. 내가 할 테니 걱정 말고 푹 쉬어.”

“감사합니다. 형님.”

율이 꾸벅 인사를 하였고 왕구는 부엌으로 향하였다. 아! 그런데 박에서 금이 나온 걸 방울이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처음 박씨를 받은 건 방울이가 아니었나. 하지만 말하려고 돌아서니 율은 벌써 들어가고 없었다. 그래, 피곤한 것 같으니 정신이 들면 그때 알려 줘야겠다.

왕구는 신이 나 웃으면서 부엌으로 들어가 달여진 약제를 면포에 짜서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여희에게 받은 부적을 태워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낸 다음 탕약에 섞었다. 그것을 들고 율의 방으로 들어가니 율이 무릎을 모은 채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 한다.

“그대로 있어.”

자, 이거 마셔. 왕구가 준 탕약을 받아 든 율은 입으로 가져가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탕약을 먹는 대신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을 넣어 무언가를 건져 낸다. 검고 작은 건더기 같았는데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자 왕구가 황급히 그것을 가져갔다.

“내, 내가 걸러내는 과정에서 찌꺼기가 좀 들어갔다. 이해해라.”

율은 맥없이 웃었다. 아닙니다.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걸요. 왕구의 정성에 율은 보란 듯 탕약을 비워 냈다. 윽, 하고 인상을 쓰는데 코끝으로 탄내가 올라온다. 혹시 약재도 태운 걸까. 정성스럽게 준비한 성의가 있어 율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님이 달여 주신 거라 정말 맛있습니다.”

“거짓말 마라. 약이 쓰지 어찌 달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왕구는 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갔고 혼자 남은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육지에 머문 뒤로 자꾸만 짐이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웅크리고 앉아 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기진을 생각하고 그러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이락을 떠올렸다.

싫다는 데도 막무가내로… 근데 정말 싫었나. 나는 왜 더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않았을까. 정말 싫었다면 이락의 뺨이라도 후려쳤었어야지. 잠시 그 쾌락에 홀렸던 건 아닐까. 아아, 이렇게 마음이 복잡할 땐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구나.

율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을 나가려고 걸음을 떼는데 뭔가 이상하다. 몸이 조금 가뿐해졌다고 해야 하나.

[기를 나눠 주는 데는 교접만 한 게 없지.]

율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내게 또 장난을 친 것이야. 밖에 왕구는 보이지 않았고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마루 아래로 내려오던 율은 불현듯 뒷마당의 귀신이 생각났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신을 신고 집을 빙 돌아 뒤뜰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귀신을 막아 준다는 도화 나무 옆에 바싹 붙어 대숲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나타나지 않는 건가. 조금 더 앞으로 가 이번엔 담벼락에 붙어서 고개를 쭉 뺐다.

대체 어딜 간 거야. 궁금하여 쳐다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돌아보던 율은 그가 이락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홱 돌려 외면했다.

“뭐 하는 것이냐?”

이락의 음성이 어딘가 날카롭다.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저놈하고 같이?”

이락이 율의 바로 코앞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영문을 모르던 율은 앞을 보다가 뒤늦게야 그가 한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으아악 하고 뛰어가 이락의 품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율은 덜덜 떨며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거기 있었습니까? 제 앞에 그러니까, 바로 앞에 있었습니까?”

“진정해라. 큰소리는 악귀를 자극한다.”

율은 입을 읍 다물었다. 처음엔 이락의 농담인가 하였는데 그의 표정이나 말투를 보니 장난은 아닌 듯하다. 율은 고개를 돌려 힐긋 뒤를 봤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세상에 그럼 그 귀신이 코앞까지 온 것도 몰랐단 말인가. 뒤늦게 자신이 이락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뻘쭘하여 얼른 떨어졌다.

“당황하여서 그만….”

그러자 이락이 율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웃는다.

“거봐라, 효과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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