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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7화 (47/102)
  • 47화

    [선비의 배 속에 넣은 구슬말이다. 내가 직접 기를 넣어 줘야 한다.]

    이락은 잠든 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새벽까지 뒤척이던 율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든 것 같았다. 가슴 앞에 양손을 꼭 모아쥐고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난다. 한편으로는 여우의 말이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 잠잠하다가 어젯밤 도깨비불에 홀린 것이 혹시 구슬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처럼 시도 때도 없이 혼들이 몸을 노리고 달려들어 자라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인데. 턱은 괸 채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정자 아래에서 산신령이 뒷짐을 지고서는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이락이 정자 아래로 내려가니 그가 반대편에서 슥, 하고 미끄러지듯이 다가온다.

    “여기다 신혼 방을 차린 줄 알았네.”

    걸쭉한 목소리에 이락이 쉿. 하고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저만치 가서 얘기하자고 손짓을 하니 산신령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걸어가며 그는 정자에서 세상모르고 자는 방율을 한번 쳐다봤다. 저밖에 모르던 놈이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이 처음이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숲으로 들어가자 산신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째서 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고 아직 붙들고 있는 것이야.”

    “당신도 그렇고, 무령도 그렇고 저 아이의 거취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 거지?”

    “처음엔 열흘이라 그러더니 이젠 달포가 됐구나. 그렇게 시간이 늘어나다 나중엔 영영 보내기 싫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 말에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산신령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봐, 영감.”

    산신령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이로 따지자면 구미호가 더 오래 살았는데 이락은 구미호에겐 벗처럼 대하면서 저한테는 꼬박꼬박 영감 취급을 했다. 물론 외모 때문에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산신령이 스르르, 하고 미남자의 모습을 바꾸었고 이락은 대놓고 인상을 썼다.

    “껍질이 바뀐다고 사람이 달라져?”

    그러자 산신령이 비웃었다.

    “그래. 껍질을 바꾸어도 나는 나지. 너도 그렇고.”

    “무슨 뜻이지?”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말란 소리다. 무령의 장난에 속아 귀인이라고 믿고 그 아이를 가까이 두는 것까지야 이해하겠다만 더 깊은 감정을 갖지는 마라.”

    그 말에 이락은 코웃음을 쳤다. 언제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농락하는 몹쓸 놈 취급하며 된통 당하라고 악담을 하더니, 이제야 걱정을 하는 것인가.

    “설마 내가 저 아이를 마음에 품기라도 했을까 봐.”

    “아닌가.”

    “그렇게 오랜 시간 나를 봐 놓고도 몰라? 말했잖아. 애초에 나한테 내줄 마음 같은 건 없어. 내가 저 아이를 욕심낸다면 그건….”

    이락을 말을 멈추고 산신령에게 가까이 가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엉큼하게 웃었다.

    “몸뚱이 때문이겠지.”

    산신령이 이락을 응시하며 혀를 차는데 뒤쪽에서 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락 님. 이락 님. 어디 가신 겁니까. 이락 님! 그 소리에 이락이 인상을 쓰며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산신령은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고 이어서 율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누가 있었습니까?”

    율이 고개를 쭉 빼고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그러다 이락과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한다. 이락이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은 자신이 뭘 또 잘못하였나 싶어 뜨끔해졌다.

    “이, 이락 님?”

    “…….”

    대답이 없자 율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락 님… 맞으시지요?”

    이락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려갔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연정이라니. 나는 단지….

    “한번 질펀하게 놀고 나면 이 갈증이 좀 해소가 되려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락은 성큼성큼 걸어가 율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가자. 슬슬 허기가 지는구나.”

    ***

    “세상에. 저것이 무엇입니까?”

    온천에서 돌아온 율은 지붕 위에 매달린 3개의 박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며칠 전 왕방울이 고맙다며 주고 간 씨앗은 눈에 띄게 커지더니 어제는 주먹만 했던 것이 하룻밤 새 사람 머리보다 더 큰 크기로 자라 있었다. 왕구가 곁으로 다가오며 웃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그 작은 게 벌써 저리 자라다니, 신기하지?”

    “예. 신기합니다!”

    “마침 우물에 있던 바가지에 금이 가서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잘됐어. 저것을 따서 말려 쓰면 되겠다.”

    율이 신기하여 지붕에 자리 잡은 박을 올려다보는 사이 이락은 왕구와 왕태가 어젯밤 궤짝에 담아 둔 물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락이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왕태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다. 율은 둘을 지켜보다가 아침을 준비하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의 뚜껑을 여는데 왕구가 나타났다.

    “형님과 내 것은 하지 말아라.”

    “어디 가십니까?”

    “물건들을 가지고 상단에 다녀올 예정이다. 근데, 방울아?”

    왕구가 말을 하다 멈추고 율을 가만히 응시한다.

    “안색이 왜 그리 창백하냐. 어제 온천에서 푹 쉬다 온 것이 아니었어?”

    율은 씁쓸하게 웃었다. 새벽에 도깨비불에 홀려 벼랑 끝에서 떨어질 뻔하였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거기다 이락이 끌어안고 잠드는 바람에 꽤 오랫동안 잠을 설쳤다.

    “참. 이 근방에 화적 떼가 종종 출몰한다고 하니 멀리까지 가진 말아라. 되도록 큰형님 곁에 바싹 붙어 있어.”

    그 말에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구를 쫓아 나갔다. 그는 커다란 궤짝을 지게에 지고는 가뿐하게 들더니 손을 흔들었다. 대문 밖까지 나가 배웅을 하던 율은 잠시 시선이 뒤뜰로 향했다. 심어 놓은 부추를 뜯으러 그곳으로 가는데 복숭아꽃은 어느덧 시들어 그 자리에는 연녹색의 잎이 돋아나는 중이었다.

    신기하여 그것을 구경하다 무심코 대나무 숲을 바라봤다. 전과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구미호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왕구까지 얼굴이 창백하다 하니 혹여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됐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심하고 돌아서려던 그때 대숲에서 검은 형체가 일렁인다. 율은 멈칫하고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하여 눈을 가늘게 늘였다. 이윽고 형체가 점점 움직이며 모양을 갖추어 간다. 기이하게 바깥으로 꺾인 다리를 질질 끌며 앞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마당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탁, 누군가와 부딪쳐서 보니 이락이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율이 하얗게 질려 숨을 몰아쉬었다.

    “이, 이락 님! 저, 귀신이! 귀신이! 또 보입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얼굴이 변하니 이락의 얼굴이 구겨진다. 이락은 뒷마당으로 가서 확인한 뒤 돌아왔고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율을 내려다보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곧 율을 데려와 평상에 앉히고는 방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둘둘 말린 면포를 벗겨 내자 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이것은!”

    “아, 하거라.”

    놀라 입을 벌리고 입으니 그 안으로 이락이 산삼의 뿌리 하나를 툭, 뜯어 집어넣는다.

    “씹어.”

    물고 있던 것을 뱉으려고 하니 손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다시 한번 재촉한다.

    “꼭꼭 씹어서 삼켜. 수백 년 된 건 아니지만, 약효는 있겠지.”

    “이 귀한 것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혹시 아냐. 네가 자꾸 귀신을 보는 것이 몸이 약해서일지.”

    율은 조금 감동하였다. 그러나 이걸 먹는다고 하여 귀신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잔말 말고 씹기나 해.”

    “이러면 제가 이락 님께 자꾸 신세만 지는,”

    슷 이락이 매섭게 노려봤기에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는 수없이 꼭꼭 씹는데 쓰기도 지독하게 쓰다. 으으, 율은 신 것, 단 것, 짠 것, 매운 것은 다 괜찮아도 쓴 것은 정말 싫었다. 그래서 이곳에 와 탕약을 먹을 때에도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인상을 쓰며 꿀꺽 삼키고 나니 이락이 턱을 쥔다.

    “아 벌려 봐.”

    아, 하고 벌렸더니 삼켰나 확인을 하고 이번엔 조금 더 큰 뿌리를 넣으려 한다. 율이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제 됐습니다. 애원하는데 이락이 눈에 힘을 준다.

    “아니면 다른 걸 넣어 줄까?”

    율은 눈동자를 아래로 움직여 저도 모르게 이락의 양물을 힐긋 훔쳐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여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이락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딜 봐?”

    율은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닙니다.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가서…. 말을 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이락이 남은 산삼을 쑥 집어넣는다. 율은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입에 넣고 꾸역꾸역 씹었다.

    “내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거다. 원래는 나만 먹는 건데 특별히 주는 거야. 왕구나 왕태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암, 뼈에 새겨라. 잊으면 넌 사람만도 못한 짐승이다.”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겨우 다 먹고 나니 이락이 율을 일으켜 세우더니 뒤뜰로 끌고 간다. 율은 그것이 또 있을까 봐 자꾸만 걸음을 멈추었다. 억지로 끌려가 담벼락 앞에 서니 이락이 묻는다.

    “아직도 보이느냐?”

    아!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는 율은 용기를 내어 앞을 바라봤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보이던 것이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닌가. 율은 신기하고 기쁜 마음에 이락의 팔을 붙들고 활짝 웃었다.

    “이락 님! 안 보입니다!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락 님이 주신 산삼이 효력이 있나 봅니다.”

    좋아서 팔짝팔짝 뛰는데 이락이 다소 한심한 눈으로 율을 내려다본다.

    “당연하지. 지금은 없으니까.”

    그 말에 율은 벙찐 표정을 했고 이락은 혼잣말로 욕을 뱉었다. 쯧. 어딜 간 거야. 뻔질나게 나타나더니. 그러더니 율을 마당으로 데려간다. 율은 입을 삐죽 내밀고 혼잣말을 중얼댔다. 진작 말씀해 주시지. 하여튼 사람 놀려 먹는 덴 일등이라니까. 그런데 이락이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고 홱 돌아선다. 율은 흠칫하여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들으셨습니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무슨…?”

    “그 기라는 것 말이다. 꼭 구미호의 것일 필요는 없지 않아?”

    “예…?”

    “내가 넣어 주면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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