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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6화 (46/102)
  • 46화

    비몽사몽 하며 뒤척이던 율은 화들짝 놀랐다. 책을 읽다 깜빡 잠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이락이 제 옆에 바싹 붙어 마주 보고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저고리 하나가 아래로 툭 떨어진다. 다시 보니 이락이 바지만 입고 윗옷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내가 자는 동안 덮어 주셨던 건가…. 뭉클한 마음에 그것을 다시 이락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렇게 앉아서 이락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는데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락 님은 인물이 어쩜 저리 좋을까. 용궁에서도 보기 드문 미남인 것은 사실이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이락의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맞춤하던 것이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다.

    율은 흠칫하여 몸을 뒤로 물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왜 또 이러는 것이냐. 떠오르지 마라. 손을 허공에 내젓는데 저 멀리 푸른 불빛이 허공에 둥둥 떠서 일렁인다. 어어? 저게 뭐지?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그것을 살펴봤다.

    파란 불빛은 용궁의 빛과 비슷한 색을 띠었으나 더 오묘한 빛이었다. 홀린 듯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것이 춤을 추듯 유영하며 조금씩 멀어진다. 율은 궁금한 마음에 정자 아래로 조용히 내려가 그것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불은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율이 가까이 가면 멀어지고, 또 가면, 멀어지고 그러길 반복하는 사이 걸음을 점점 빨라지고. 머릿속에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저것을 쫓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기다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여러 개로 나뉜다. 율이 놀라 멈춰서자 불들이 휙 하고 날아와서는 주위를 에워싸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율은 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 중 하나가 손바닥 위에 해파리처럼 살포시 내려앉는다.

    너는 무엇이니 살아 있는 생명이니. 조심스레 손을 웅크려 잡으려고 하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앞으로 휙 날아간다. 율은 정신없이 그것을 쫓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신기하였고, 나중에는 영문도 모르고 걸음이 그것을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쫓고 있는데 불빛이 바로 코앞에서 멈추어 선다. 율은 발과 손을 동시에 뻗으며 웃었다. 잡았다! 그런데 순간 몸이 휘청 앞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들더니 동시에 눈앞에 까마득하게 깊은 낭떠러지가 들어왔다.

    뒤늦게 율은 자신의 발이 반은 땅을 딛고, 반은 낭떠러지 밖으로 나간 것을 알아챘다. 몸이 떨어지려는 그 순간 누군가 율의 목덜미를 잡아채서는 그대로 당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틈도 없이 품에 파고들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이락이 굳은 표정으로 율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눈을 팔면 꼭 사고를 치는구나.”

    율은 덜덜 떨면서도 이락을 놓지 않았다.

    “저, 저 방금 죽을 뻔하였습니다.”

    “안다. 이번에도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줬지.”

    제대로 서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풀렸는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계속 이락에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걸을 수 있겠어?”

    “저, 저기까지만 데려다주십시오….”

    이락이 율을 번쩍 안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벼랑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멀어지는 벼랑을 보며 율은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그래, 불. 불을 봤지. 그러고 예뻐서 따라간 것뿐인데…. 그곳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니 정신이 차츰 돌아온다. 그러다 자신이 이락에게 민망한 자세로 안겨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이제 내려 주십시오.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자까지 참아. 아직도 덜덜 떨고 있지 않느냐.”

    율은 내려가려고 몸을 버둥거렸다.

    “아닙니다. 내려 주십시오…. 이락 님께 더 신세를 지는 것은,”

    찰싹, 율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락이 율의 볼기를 세게 때린다. 시끄럽다.

    율은 얼굴이 붉어져 이락을 쳐다봤다.

    “왜, 엉덩이를 때리십니까?”

    “그럼 고운 네 얼굴을 때릴까.”

    다른 말은 안 들리고 어째서 고운, 이라는 단어만 정확하게 귓속에 꽂힌 건지. 율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가만히 숨죽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정자가 나타났고, 이락은 정자 위에 율을 앉혔다. 긴장이 풀린 율은 정자 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락 님.”

    “응.”

    “아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도깨비불이다. 보아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 못된 장난을 치는 것들이니.”

    “그럼, 제가 그것에 홀린 것입니까?”

    “그래. 홀린 것이다. 하긴 넌 아무것에나 잘 홀리지.”

    율은 멋쩍게 웃었다.

    “예.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다 율은 궁금해졌다.

    “이락 님은 무엇에 홀린 적이 없으십니까?”

    이락은 율은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 전 벌어진 일 때문에 놀라서인지 얼굴이 더 창백하다. 말간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묘하게 동하는 느낌이다.

    “글쎄.”

    “하긴. 이락 님은 마음이 단단하신 분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유약해서 그런지 귀신에도 잘 홀리고, 도깨비불에도 잘 홀립니다.”

    “큰일이구나.”

    “왜요?”

    “그럼 나를 보고 홀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야.”

    “…….”

    “웃어라. 농이다.”

    “하하… 이락 님은 잘나셨으니 그리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실제로 이락 님에게 홀린 분들이 아주 많다고, 그래서 어느 기생 하나는 재산을 다 털어먹고 마음 앓이를 하다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율은 점점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이락이 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어?”

    “전에….”

    주막집 주인장이 말해 줬다고 하면 왠지 그에게 해코지할 것 같아 율은 어디선가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얼버무렸다. 그러고 나서 보니 읽다 만 책이 정자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율은 나뭇잎을 하나 따서 책 사이에 끼워 넣고는 한쪽에 올려 두는데 이락이 곁으로 온다.

    “가져가서 읽어라.”

    “아닙니다….”

    “재미가 없어?”

    “이곳에서 올 때마다 읽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곳에 올 때 더 신이 나겠지요.”

    “지금까진 억지로 끌려왔어?”

    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제 말은, 음… 더 신이 난단 얘기였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가고 나서는 짐을 챙기려고 하는데 이락이 정자에 그대로 다시 드러눕는 게 아닌가. 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안, 안 가십니까?”

    “해가 뜨면 갈 생각이다.”

    율은 방금 일도 있고 찜찜하여 서둘러 돌아가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든지.”

    선뜻 허락을 해 주었기에 율은 신이 나서 짐을 챙겨서는 정자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숲길로 가려고 하는데 부으, 부으, 또 이상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스스스, 바람이 불고 부딪치는 소리가 스산하다. 또다시 도깨비불이 나타날까, 율은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다시 정자로 올라갔다. 이락은 눈을 감은 채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어째서 다시 왔어?”

    “그, 그냥 저도 같이 아침에 가겠습니다.”

    정자 기둥에 앉아 있으니 이락이 눈을 뜨고서는 이쪽을 향해 돌아눕는다. 정면에서 그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율은 괜히 두 다리를 모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해가 뜨려면 두 시진은 지나야 한다. 그러고 있다간 다리가 저려 걷지도 못할 거야.”

    율이 고개를 들어 다시 이락을 쳐다봤다. 그가 손을 뻗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와서 누워라.”

    “아,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안 잡아먹을 테니 누워.”

    율은 애써 웃었다.

    “아닙니다….”

    “한 번만 더 거절하면 정자 밖으로 던져 버린다.”

    율은 움찔하였고 조금 망설이다 그대로 돌아누웠다. 그런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뭘 하려는 건가 확인할 틈도 없이 허리로 팔이 휘감고 들어왔고 등으로 단단한 가슴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고 하니 이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든다.

    “너에게 옷을 벗어 주었더니 몸에 한기가 드는구나.”

    목덜미로 이락의 숨결이 와 닿는다. 율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 이것은 단지 체온을 나누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뇌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엉덩이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닿는 게 느껴진다. 율은 흠칫하여 눈을 떴고 조용히 이락을 불렀다. 이락 님? 이락 님?

    하지만 이락은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더 깨웠다간 그가 정말 벼랑에 던져 버릴 것 같아 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뒤가 조용하길래 이락이 잠들었나 싶어 몸을 앞으로 조금 움직이자 귀신같이 알아채고 다시 끌어당긴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안아 품에 가두고는 얼굴을 목덜미에 문지른다. 입술이 살갗에 스치는 감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혹여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율은 숨을 멈추고는 몸을 더더욱 잔뜩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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