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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5화 (45/102)
  • 45화

    “저를 또 속이셨습니다.”

    “아니다. 속이지 않았다.”

    이락이 슥 율을 내려다봤다. 달에 비친 얼굴은 오늘따라 유독 더 희게 느껴졌다. 조그만 것이 커다란 등을 들고 옆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것이 제법 귀여워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직접 확인하였고, 대신들 앞에서 고환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러니 고환이 맞지.”

    율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졸지에 이락과 공범이 된 셈이다. 율은 손에 든 등불을 이락에게 넘겨주려 했다.

    “들고 가십시오….”

    “돌아가게?”

    “생각해 보니 이락 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확인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저의 탓도 있는 것이지요.”

    전의를 상실한 율을 보고 이락이 팔을 잡아당겼다.

    “그럼 온 김에 나하고 온천욕이나 하고 가자.”

    “싫습니다…. 밤에 무슨 온천을, 아!”

    반항하던 율은 결국 질질 숲으로 끌려갔다. 다시 돌아가려는데 어둠 속에서 푸드득 하고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율은 화들짝 놀라 이락의 등 뒤로 바싹 붙었다. 그렇게 숲을 헤치고 한참을 가다 보니 온천이 나타난다.

    율이 가지고 온 등을 정자에 거는 사이 이락이 옷을 벗고는 탕 안으로 들어갔다. 뿌연 김이 나오는 곳에서 양팔을 바위에 걸친 그는 눈을 감고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율은 정자에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낮에 방문한 구미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일 때문인지 이락은 유독 더 피곤해 보였다.

    “쥐방울. 거기 있어?”

    “예….”

    “와서 어깨를 주물러라. 오늘따라 유독 뻐근하여 머리까지 아픈 것 같다.”

    율은 하는 수 없이 정자에서 내려와 이락의 등 뒤로 다가갔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조물조물하니까 이락이 눈을 뜨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가까이서 시선이 마주치자 율은 먼저 피하였다.

    “만두 빚어?”

    “예?”

    “그렇게 힘없이 주무르면 피로가 풀리겠느냐?”

    율은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어깨가 단단하고 온통 근육이라 아무리 힘을 주어 눌러도 자꾸만 미끄러진다. 안 되겠어서 이번엔 주먹을 쥐고 통통통 두드렸다. 그때 뒤에서 부으, 부으,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긴장한 율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기에 진정하고 다시 앞을 보는데 흠칫. 자신이 이락의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율은 냉큼 위치를 바꿔 다시 어깨를 두드렸다. 쪼그려 앉아 계속 팔을 움직이려니 힘이 든다. 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이락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힘이 드냐?”

    “아닙니다….”

    “너도 들어올래?”

    뜨끈한 온천물에 들어가면 좋긴 하겠지만…. 율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벗고서 마주 앉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또 그날 일이 떠올라 저 혼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를 감싸 안던 이락의 단단한 팔과 삽입하여 느껴지던 통증. 그리고 욕망에 번들거리던 이락의 눈빛….

    율은 괜히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이락 님….”

    “응.”

    “혹시… 기진 마마도 알고 계십니까?”

    “무얼.”

    “그것이 진짜 고환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글쎄다.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으냐.”

    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기진이 얼마나 착하고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데. 그러나 이락과 만난 후 묘하게 달라진 행동을 보고 있자니 자꾸 걱정이 든다. 하긴, 여태 미천한 출신이라고 얼마나 무시당하고 외면받아 왔던가. 그러니 그가 왕위를 욕심내도 율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그 방법이….

    기진 스스로 증명해 내어 인정을 받는 것과 모략으로 후계에 오르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구나.”

    이락이 율을 빤히 쳐다봤고,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다.”

    “압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뜻이지요.”

    “그래. 많은 이들이 그걸 명약이라 믿으면 왕에게도 효험이 있을 줄 누가 알아. 그러니 너도 왕이 깨어나길 바란다면 그리 믿어라.”

    율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왕이 깨어나길 바라는가. 솔직히 신하 된 자로서는 그래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용왕이 정말 좋은 주군이라 할 수 있을까. 용왕의 침실에 보물이 넘쳐흐를수록 도성에는 배고픔에 굶주리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이 모두를 배부르게 할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니까.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느려지니 이락이 율을 부른다.

    “힘들면 들어올래?”

    “싫습니다….”

    “누가 잡아먹을까 봐 그러냐.”

    율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런데 계속하여 따끈따끈한 물을 보니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율은 이락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신과 버선을 벗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올렸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아 발만 담갔다.

    “그럴 바엔 들어오겠다.”

    “싫습니다….”

    “고집은.”

    발이 뜨끈뜨끈한 것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아무 생각 없이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락이 곁으로 와 앉는다. 흠칫하여 도망가려고 하자 이락이 발목을 붙든다. 어어? 갸우뚱 뒤로 넘어가는 몸을 이락이 팔로 받쳐 안았다.

    “어, 어찌 그러십니까.”

    “발목이 가늘어서 한 손에 잡히는구나.”

    “이락 님 손이 큰 것이겠지요.”

    “하긴 난 다 크니까.”

    뿌듯하게 웃길래 율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이번엔 손을 위로 움직여 종아리를 만진다. 너는 왜 뼈가 이리 가는 것이냐? 이러니 처음에 내가 너를 암컷이라고 착각하지 않았겠어. 질책하는 말을 하길래 율은 다리를 옆으로 치워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만… 만지십시오….”

    이락이 서운한 표정을 한다.

    “무령이 입 맞추려고 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내가 만지니 질색하는구나.”

    율이 억울하여 따졌다.

    “제, 제가 언제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땐 당황하여 그런 것이지요.”

    “얼굴이 빨개진 걸 내 똑똑히 봤다.”

    “당황하면 원래 빨개집니다.”

    “그럼 나하고 입 맞출 때 빨개진 것도 당황해서 그런 것이냐?”

    율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그렇지요. 그때도 당황하여 빨개진 것이지요. 으흠. 이락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 슬쩍 율을 떠본다.

    “만일에, 무령이 네게 관심이 있다 고백한다면 어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율은 고민할 것도 없이 답하였다.

    “저는… 싫습니다.”

    이번엔 이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지? 너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

    율은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는….

    “그분은 불멸의 삶을 사시는 분이 아닙니까. 저와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저처럼 평범한 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같이 웃고, 슬퍼하고, 늙어 가고…. 그럴 수 있는 분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이락의 표정이 묘하게 바뀐다. 율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그분 정인을 빼앗으셨습니까?”

    무엇 때문인지 이락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 것 없다.”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 갑자기 또 왜. 율은 더 캐묻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조언해도 이락은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관두었다. 똑같이 당하면 그 마음을 알려나. 작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정자에 걸어 둔 등에서 점점 불빛이 스러져 갔다.

    율은 온천 밖으로 발을 꺼내었다.

    “기름을 더 붓고 와야겠습니다.”

    맨발로 뛰어가 등을 내리고 기름병을 꺼내 심지에 기름을 더 부었다. 그러고 나서는 등을 다시 매달고 그대로 정자에 걸터앉았다.

    “왜 거기 앉아?”

    “몸이 달구어져 잠시 식히고 있습니다.”

    “심심해?”

    “…….”

    “정자 서까래에 내가 읽다 올려 둔 서책이 있다. 그거라도 읽든가.”

    서책이란 소리에 율이 솔깃하여 서까래 위를 바라봤다. 정말 무언가가 놓여 있는 게 보인다. 발을 들고 손을 뻗었으나 그것에 닿지 않았다. 펄쩍 뛰어도 마찬가지였는데 물소리가 나더니 이락이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나, 나오지 마십시오! 절대!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율은 기겁하여 그를 말리고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가지고 책을 건드려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책을 펼치고 정자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이락은 아예 자세를 바꿔 바위에 팔을 엇갈아 얹고 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노골적인지 율은 도통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책이 재미있느냐?”

    “예….”

    “읽다가 말았는데 네 이야기를 들으니 뒤가 궁금해지는군.”

    힐긋 보니 여전히 뚫어지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읽고 나면 내게 말해 다오, 율아.”

    어째서 꼭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지. 싫다던 말이 무색하게 가슴은 왜 자꾸 간질거리고 얼굴은 화끈거리는지 모르겠다. 율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얼굴을 책 사이에 파묻었다. 그러자 이락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또 당황했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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