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깔깔깔 웃는 무령을 산신령은 지루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는 한 시진 가까이 이락이 다녀간 일에 대해 떠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체면상 수하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건 이해가 되나,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오침을 방해할 줄은 몰랐다.
“자네가 이락이 그놈 표정을 봤어야 해. 눈에서 막 불꽃이 튀는데, 얼마나 꼬숩던지.”
“그게 그렇게 신나나?”
“당연히 신나지. 한번 맛을 봤으니 그놈은 애가 닳을 것이야.”
“어찌 그리 확신해? 여태 사내를 안은 적은 없었는데.”
“그 자라가 영안이 맑다고 하였지? 하지만 직접 본 내 생각은 다르네. 얼굴은 하얘서 샌님처럼 생긴 녀석이 은근히 색기가 흐르더라니까. 이락이 놈이 욕심을 내는 게 살짝 이해는 되더라고.”
그 말에 산신령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라의 이야기를 하는 구미호의 표정이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산신령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였다.
“잘됐네. 이번엔 자네가 그 앨 꼬시면 되겠구먼. 그럼 백 년 전 복수를 하는 것이니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매듭이 지어지겠지.”
듣고 있던 무령의 눈동자가 묘하게 색이 바뀐다. 산신령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농일세, 농. 자네는 어찌 진담은 귀담아듣지 않고, 농 칠 때만 그리 진지하게 새겨듣는가.”
무령이 싱긋 웃더니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긴 내가 이락이 그놈보다 못할 게 뭐야.”
산신령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렸다.
“농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도 수컷을 안은 적은 없지만, 고놈이라면 꽤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나쁘지도 않고.”
산신령은 이마를 짚었다. 아, 피곤해. 이것들은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둘이 어쩜 이렇게 닮은 구석이 많을까. 아마 서로 싫어하는 건 동족 혐오 같은 걸 거다. 차라리 도끼 던지고 도망가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낫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연못에 얼굴을 비추던 무령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다.
“이락의 집이 이곳과 멀지 않지?”
산신령은 시치미를 뗐다.
“머네. 아주 멀어.”
“내게 하룻밤 신세를 졌으니, 이번엔 그쪽에서 갚아야지. 아니 그런가?”
깔깔 웃는 무령을 보며 산신령은 불길해졌다. 제발 내 숲에서는 조용히 지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였으나 무령은 들은 척도 않고 모습을 감춘다. 혼자 남은 산신령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물속으로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
왕구는 마당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
늦잠을 자고 방에서 나오던 이락은 그런 왕구를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거기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고 서 있느냐?”
왕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형님. 지금 사달 났습니다. 쥐방울이 글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저 멀리 왕태가 누군가를 엎고 뛰어온다. 얼마나 빨리 뛰어왔는지 마당에 내려놓자마자 노인은 구역질까지 하였다. 잠깐만, 숨 좀 돌리겠네. 아휴, 등에 업혀 너무 달렸더니 속이 좋지를 않네. 그는 먹은 것을 게워 낸 뒤 입을 헹구고는 다가왔다. 그는 이락을 보며 인사를 하고는 피곤함에 절은 얼굴로 왕태를 쳐다봤다.
“환자가 어딨다고?”
왕태가 율의 방을 가리켰다.
“이쪽이오.”
대화를 듣던 이락의 얼굴이 굳어졌다.
“쥐방울이 아파?”
왕구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째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시키지도 않은 일을 찾아 가며 꾸역꾸역하더니, 기어코 탈이 났는지 아침부터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이락이 의원보다 먼저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 뒤를 의원과 왕구 왕태가 따라 들어갔다. 율은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채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걸 보는 이락의 표정이 어둡게 변한다. 의원은 자리에 앉아 율의 진맥을 살피고는 눈을 까뒤집어 확인했다. 참을성이 부족한 왕구가 나서서 먼저 물었다.
“전처럼 물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요?”
“아니, 오히려 몸에 진액은 채워진 거 같은데…. 허어, 이상하다.”
“맞소. 애가 요즘 이상하긴 했소. 계속 넋이 나가서는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질 않나, 혼자서 중얼중얼하질 않나.”
“흠….”
“말을 하시오. 몸살이오? 아니면 다른 문제요?”
“몸살이 난 것은 분명한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더 큰 문제란 말에 이락이 나섰다.
“더 큰 문제가 뭔데.”
의원이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무래도 심인성 질환인 듯합니다.”
“심인성?”
“마음의 병 말입니다.”
그러자 왕구가 껴들었다.
“아… 혹시 상사병?”
상사병이란 말에 이락이 눈을 찌푸렸고,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이 경우엔 울화병입니다.”
울화병이 왜 생긴 거지. 라고 의아해하던 왕구는 저도 모르게 이락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피하긴 하였으나 어쩐지 그 울화병이란 게 이락에게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다.
“일단 지금은 침을 놓고 약을 한 제 처방하여 보내겠습니다. 무엇보다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최고니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우울감을 느껴 자주 눈물을 보여도 이해해 주시고, 홧김에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거나 해도 잘 다독여 주십시오.”
그러더니 의원이 침을 꺼내 율의 몸 곳곳에 놓는다. 이락은 그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고 이락은 답답한 마음에 장죽을 꺼내어 불을 붙인 뒤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하고 연기를 내뿜는데 의원이 나와서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왕구와 왕태도 뒤따라 나왔다.
“아니, 어린 것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저 나이에 화병이 생겨?”
“낸들 아냐. 혹시 너 때문 아니냐. 네가 하도 일을 시켜 대니.”
“제가 언제 일을 시켰다고 그럽니까. 모두 방울이가 좋아서 한 것인데요.”
“그럼 왜 화병이 나?”
“제가 볼 때는,”
왕구가 말을 멈추고 이락을 슥 쳐다봤다. 이락이 장죽을 물고 노려보자 황급히 돌아서더니 왕태를 잡고서는 어서 약이나 받으러 가자며 서둘러 나선다. 혼자 남은 이락은 한참 동안 율의 방문 앞에서 장죽만 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락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끝 방으로 갔다. 거기서 구석에 넣어두었던 상자 하나를 꺼내서는 다시 율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율은 천장을 보고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굴이 더 하얘지고 입술도 거칠어진 것이 신경이 쓰인다.
열이 나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손을 뻗어 동그란 이마를 짚는데 갑자기 율이 얼굴을 찡그린다. 손을 거두자 이번엔 눈을 뜨고 이락을 쳐다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벽을 향해 돌아누워 이락을 외면한다.
“몸은 좀 괜찮으냐.”
“…….”
“달포가 될 때까지 나하고는 말도 섞지 않겠다?”
“…….”
“일어나 봐라.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으니.”
꿈쩍도 하지 않는 율을 보며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하고는. 물러터지게 생겨서는 은근히 성깔도 있고 고집도 세다니까. 이락은 가지고 온 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네 어미와 누이 소식이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율이 반응한다.
“원하면 내 지금 보여 줄 수도 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율이 벌떡 일어나더니 돌아앉는다. 며칠 만에 제대로 본 방율의 얼굴이 조금 야위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락은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 기분을 감추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윗면에 경대가 나타난다. 율은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경대와 이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율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를 또 놀리시려는 겁니까?”
“놀리긴. 싫으면 말아.”
뚜껑을 다시 덮어 버렸기에 율은 조금 고심 끝에 이락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이락이 웃으며 다시 상자를 연다. 역시나 그것은 특이할 것 없는 경대였다.
“이것에게 부탁해라. 그럼 네 어미가 나올 테니.”
율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이락을 쳐다봤다.
“저더러… 경대에 말을 걸란 말씀입니까.”
“그래.”
율은 당혹스러워졌다. 진짜 놀리나 싶다가도, 가족이 보고 싶은 마음에 경대를 바라봤다. 조금 야윈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율은 머뭇거린 끝에 시키는 대로 그곳에 대고 말을 걸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사라진다. 놀랄 새도 없이 누워 있는 모친의 얼굴이 나타났다. 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락을 쳐다봤다. 그 표정이 귀여워 이락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율은 당황해하면서도 며칠 만에 본 어머니의 모습에 경대를 손으로 만졌다.
“어머니, 어머니! 소자 율입니다. 제 말이 들리십니까.”
“들릴 리가 있나. 그저 보여 줄 뿐이다.”
“아….”
율은 어머니의 얼굴을 아련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잠시 후 선이 나타나 어머니에게 탕약을 수저로 떠서 입에 넣어준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뜬다. 며칠 만에 본 어머니는 여전히 야위었으나 눈빛은 전과 달리 생기가 돌아온 듯했다. 그걸 발견한 율은 기쁜 나머지 울컥하여 눈가가 빨개졌다.
“이락 님이 주신 산삼이 효과가 있나 봅니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락은 말없이 그런 율을 응시하였다. 율은 경대에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대고서는 좋아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자, 이번엔 얼굴이 어두워진다.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를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율은 이락을 불렀다.
“혹시… 다른 이도 볼 수 있습니까?”
“그럼.”
“궁… 궁에 계신 기진 마마의 안부가,”
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락이 경대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당혹스러워하는 율을 보며 이락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깜빡했다. 하루에 세 명만 볼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