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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1화 (41/102)
  • 41화

    “이것들을 다 빨면 됩니까?”

    율이 빨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자 왕구가 나서서 말렸다.

    “둬. 내 아무리 뻔뻔하다지만, 너에게 계속 일을 시키자니 마음에 걸린다.”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더 편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율은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는 개울가를 향해 돌아섰다. 자기 몸뚱이만 한 것을 들고 가는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데 때마침 볼일을 보러 나갔던 왕태가 돌아왔다.

    “뭘 그리 보고 있어?”

    “형님. 아무래도 쥐방울이 좀 이상하우.”

    “어디가?”

    “전보다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계속 일만 하잖수.”

    “잘됐네. 너 일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냐. 이참에 잘 키워서 네 부하로 부려 먹어라.”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영 신경이 쓰여 그러우. 아직도 큰형님한테 화가 덜 풀렸나….”

    왕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화가 덜 풀려? 왜? 쥐방울이 큰형님한테 뭐 서운하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왕구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실은 며칠 전 형님하고 방울이가 같이 돌아왔지 않소? 그런데 그날 두 사람 분위기가 묘했단 말이지.”

    “묘하게? 어떻게?”

    “그거 있잖수. 그거.”

    “아, 답답한 새끼. 알아듣게 말해라.”

    “그 왜, 남녀가 정분나다 다투고 그러는 거, 그거…. 딱 그런 분위기였다니까.”

    왕태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래. 이 미친놈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락이 나온다. 혹시 들었나 싶어 왕구가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이락이 신을 신더니 왕구를 지나쳐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쥐방울은.”

    “빨래하러…. 어디 가십니까?”

    “몸이 찌뿌둥하여 온천에 다녀오게. 저녁에 이화 상단에서 들른다 하니 그때까진 돌아오마.”

    왕구는 집을 나서는 이락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는 한참 걸어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홱 방향을 틀어 온천이 있는 숲길로 가 버린다.

    “방금… 뭘 보신 거지?”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연장이나 챙겨. 근래에 화적 떼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데 아무래도 가서 살펴봐야겠다.”

    그 말에 왕구는 코웃음을 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곳까지 올 리가 있소. 이락 형님이 계시는데.”

    그러면서도 몽둥이를 챙겨 왕태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다. 한참 걸어가던 왕구는 우연히 이락이 멈춰 섰던 곳에 서서 그가 바라본 곳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개울가 빨래터에 앉은 율의 뒷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방울이를 보고 계셨나….”

    그런데 쥐방울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멍하니 허공만 보다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치더니 난데없이 방망이를 들고 빨래를 힘차게 내리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나중엔 방망이를 집어 던지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젓는다.

    지켜보던 왕구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앞서가는 왕태를 불렀다.

    “형, 형님. 저것 보시오. 방울이가… 아무래도 미쳐 가나 보오.”

    [네가 내 귀를 만지면서 품에 파고드는데 어찌 막아?]

    [혀를, 이렇게, 내밀어야지.]

    [이락 님, 어서 넣어 주십시오. 어서요.]

    [너무 좋습니다, 이락 님. 이락 니임.]

    멍하니 앉아 있던 율은 밀려드는 기억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흔들었다. 그만 생각해라. 그만. 아아악! 악을 쓰며 방망이로 젖은 빨래를 두드렸으나 그럴 때마다 기억이 팟팟팟, 떠오른다. 율은 방망이를 내던지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저리 가! 제발! 그만! 그만!”

    율은 구미호의 궁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락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이락 역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건 그것대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러다가는 제 명에 못 살고 육지에서 뼈를 묻는 건 아닐까.

    하지만 더 괴로운 건 따로 있었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생생한 그날의 기억. 제게 양물을 집어넣고 내려다보던 이락의 눈빛, 입을 맞추며 문질러 대던 혀. 심지어 어젯밤엔 꿈에도 나와 율을 괴롭혔다.

    율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잊기 위해 방망이질을 해 댔다. 그래 몸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잊힐 것이다. 피곤하여 곯아떨어지면 꿈에도 나타나질 않겠지. 그런데 온 힘을 다해 두드리다가 그만 손가락을 퍽, 하고 같이 때려 버렸지 뭔가.

    악! 고통에 눈물이 핑 돈다. 왼쪽 가운뎃손가락을 보니 빨갛게 변했다. 율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한참 눈물을 쏟았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빨래를 가지고 돌아와 줄에다 너는데 가만 보니 이락의 저고리에 구멍이 뚫렸다.

    “너, 너무 세게 두드렸나?”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길래 그것을 슬그머니 빼서 다른 곳에 감춰 두었다. 비슷한 옷이 많으니 한 개 없어졌다고 난리 치진 않겠지. 그러고 나서 율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뚜껑과 솥단지를 분리하고 집 안의 그릇들도 다 꺼내어 닦고 부엌도 윤이 날 정도로 계속 쓸고 닦아 댔다.

    그리고 창고에 들어가 오래 묵은 짐들을 꺼내어 한 번씩 먼지를 털어 주고 버렸다. 그러다 짐에서 족자를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을 펼치자 한 여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굉장한 미인이었고,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율은 그것을 고이 접어 다시 안쪽에 넣고 남은 것들을 정리하였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눈에 띄는 걸 닥치는 대로 치우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돌아오는 이는 없어 율은 평상에 앉아 떨어지는 해를 보며 상념에 잠기었다.

    “하늘의 색이 참으로 곱구나….”

    붉게 물든 하늘을 보니 집이 그리워졌다. 당분간 궁의 도움을 받아 크게 어려움은 없겠지만, 어머니의 상태가 어떤지, 선이는 학당에 잘 갔는지 그런 소소한 것들이 내내 궁금했다. 율은 지친 몸을 그대로 평상에 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 주던 노랫가락을 흥얼흥얼 읊조리다 보니 괜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율은 팔등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또 갑자기 이락의 얼굴이 팍하고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야! 그만! 그만! 이건 분명 몸이 덜 피곤해서다. 주변을 둘러보던 율은 근처에 왕구가 세워 놓은 지게를 발견하였다.

    차라리 나무라도 주워 오는 게 낫겠구나 싶어 지게를 어깨에 지고는 근처 숲으로 가서 나무를 잔뜩 주웠다. 하지만 주위가 어둑해지자 덜컥 겁이 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적하던 집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온다.

    봤더니 왕구와 왕태는 물론, 일전에 자신이 다친 다리를 봐주었던 왕방울이 와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마당에 처음 보는 가마가 하나 있었고, 무사도 여럿 함께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왕구가 율의 지게를 거두어 갔다.

    “대체 어디까지 다녀온 거냐.”

    “답답하여 나무를 하러 갔었습니다….”

    왕구가 한숨을 내쉰다.

    “뒤뜰에 나무가 저리 많은데 뭣 하러. 적당히 해라. 너 그러다 병난다.”

    걱정하여 잔소리하는 것을 알기에 율은 웃음으로 무마하였다. 그때 마루에 앉아 있던 왕방울이 율을 향해 손짓한다. 쥐방울. 이리 와 봐. 그는 다친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아 붕대를 감고 있었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중이었다.

    율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안주머니를 더듬는다.

    “손 내밀어.”

    “왜… 그러십니까?”

    “덕분에 다리 병신은 면했으니 내 너에게 선물을 주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자 그가 손바닥에 작은 씨앗 하나를 놓아 준다.

    “박씨다. 귀한 거니까, 잘 키워 봐라.”

    박씨? 손바닥 위에 씨앗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왕구가 오더니 그것을 빼앗아 지붕 위로 홱 집어 던진다. 쪼잔한 놈. 이런 쓸모없는 걸 주지 말고, 정말 고마우면 제대로 된 선물을 가져와. 어디서 그냥 넘어가려고.

    그러자 왕방울이 팔짝 뛰었다.

    “너, 너 그 씨앗이 얼마나 귀한 건 줄 아냐. 제비한테 부탁해 어렵게 구한 거다.”

    “귀하긴. 씨앗이 씨앗이지!”

    아옹다옹하는 둘을 바라보던 율은 이락의 방에 불이 켜진 걸 보고 잠시 멈칫했다. 돌아온 건가. 그런데 툇돌에 이락의 신만 있는 게 아니다. 수가 놓인 꽃신이 한 켤레 가지런히 옆에 놓여 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낮에 이락의 창고에서 낯선 여인의 초상화를 봤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내가 미쳐 가나 보다. 외면하고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리고 검은색 한복에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온다.

    “그믐에 다시 뵙겠습니다.”

    여인은 공손하게 예를 갖춰 이락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마를 타고 무사들과 사라졌다. 돌아서던 이락은 율과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못 본 척 그대로 들어가 버린다. 혼자 남은 율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힘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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