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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40화 (40/102)

40화

무령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느라 참기가 힘들었다. 아침을 먹으라 사람을 보내려다 직접 와 봤는데 이락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고 방율은 눈이 퉁퉁 부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귀한 손님에게 제일 좋은 방을 내줬는데, 둘 다 몰골이 왜 그 모양일까?”

이락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무령은 끝내 참지 못하고 부채를 펴 입과 코를 가리고 웃었다.

“율은 괜찮은가. 어제 술이 과한 것 같던데?”

“저는… 괜찮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런. 이락이 저놈이 다짜고짜 그 큰 걸 집어넣었구나. 안 봐도 뻔하지.

“아침을 먹고 가라. 이락은 몰라도, 너를 위해 아침을 준비했다.”

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어젯밤 신세로도 충분합니다…. 구슬은 나중에 꼭 돌려드리러 오겠습니다.”

꾸벅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붙잡기도 전에 홱 돌아서는 도망치듯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런 율을 쫓아가려고 하는데 이락이 무언가를 홱 던진다. 탁. 잡고 보니 어젯밤 그에게 건네줬던 향유다. 이건 술을 깨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락은 그것을 모르고 사용했을 것이다. 무령은 고소한 마음을 감추고 안타까운 얼굴로 웃었다.

“세상에. 내가 이것을 주었나? 정신이 없어 다른 것과 헷갈렸나 보군.”

“그럴 리가. 날 골탕 먹이려 작정한 것이지.”

“내가 왜?”

“먼 옛날 네가 사모하는 여인을 내가 품어서?”

무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반대로 이번엔 이락이 웃었다.

“백 년 전 일로 내게 감정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보기보다 여우는 뒤끝이 길구나.”

무령이 날카롭게 눈빛을 세우자 이락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무령을 향해 이락이 그의 긴 머리카락을 스르륵 손으로 훑으며 웃었다.

“달포 뒤에 오마. 그때 저 아이의 몸에서 반드시 구슬을 거둬 가라. 만약 또 장난을 치려 하면, 나도 가만히 잊진 않을 거야.”

“하, 네가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게냐.”

“나는 겁박을 말로 안 한다.”

“…….”

“진짜 겁박이 보고 싶으면, 그때도 나를 농락해 보든가.”

무령이 이를 뿌득 갈자 이락이 무령의 옷을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조언하는데 웬만하면 흰색은 입지 마라. 처녀 귀신같으니.”

그 한마디를 하더니 홱 돌아서서 가 버린다. 여태 겨우 참고 있던 무령은 폭발하여 악을 썼다. 이 건방진 놈. 너 뭐라고 했어. 네가 아직도 저승의 왕인 줄 아느냐. 감히 누굴 상대로 협박이야, 협박이! 미천한 놈을 상대해 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처녀 귀신? 너 이 옷이 어떤 옷인 줄 알고 그런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지는 맨날 똑같은 옷만 처 입는 주제에!

“대체 언제까지 입을 다물 셈이냐?”

여우의 영역에서 벗어나 금산의 숲을 걸어가면서도 율은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놔두면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단단히 마음이 상한 듯하여 이락은 결국 자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

“봇짐을 들어 줄까? 아니면 등껍질을 대신 메 줄까?”

“…….”

“나하고는 눈도 안 맞출 작정이야?”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율의 앞을 막아섰다. 율이 고개를 들었고 갓에 가려졌던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눈은 퉁퉁 부었고,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어젯밤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안아 달라 보채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그 기억을 되살리던 이락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분명 말했잖아. 너도 합의한 일이었다.”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이락 님도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난들 별수가 없었다. 네가 내 귀를 만지면서 품에 파고드는데 어찌 막아?”

“뿌리치셨어야지요…. 혼내셨어야지요. 왜 두고만 보셨습니까?”

“그래서 내 탓을 하는 게냐?”

“혹시… 저를 연모하십니까?”

이락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럴 리가.”

“그것 보십시오. 이락 님은 아무하고 입 맞추고 짝짓기하고 그런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연모하는 이하고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락 님이 어제 저한테….”

율은 눈물이 그렁그렁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한테… 그런 짓을 하셔서… 저는 이제 나중에 제가 혼인을 하여도 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면목이 없게 됐습니다….”

“영감탱이도 아니고 고리타분한 소릴 하는구나. 그런 걸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저는 쓰입니다….”

“젊은 것이 답답할 정도로 꽉 막혔어.”

그 말에 참고 있던 율이 기어코 버럭 성질을 냈다.

“모든 이들이 이락 님처럼 그렇게 방탕한 줄 아십니까!”

그러더니 눈물을 기어코 뚝뚝 흘린다. 하, 이락이 기막힌 표정으로 쳐다보자 율이 소매로 눈물을 연신 훔치었다. 이락이 달래 주려 한 발 앞으로 다가가니 율이 뒤로 물러선다.

“오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화를 낼 셈이냐. 이러려고 날 따라온 게냐.”

“벌써 치매라도 오신 겁니까. 제가 따라온 게 아니라 이락 님이 저를 끌고 오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율은 여전히 흐느끼면서도 결국 쐐기를 박았다.

“당분간 저한테 말 걸지 마십시오. 지금은 이락 님 얼굴만 봐도 징그럽습니다.”

뭐? 징그러워? 이것이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까. 이락이 기가 찬 얼굴로 쳐다보는데 율은 그런 이락을 홱 지나쳐 도망치듯 성큼성큼 앞서간다. 가는 내내 율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젯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락의 말대로 품에 파고들고, 입을 맞추고 몸을 탐하고 삽입했던 과정들이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게 문제였다.

그것이 충격이라 율은 더더욱 서러워졌다. 자신의 처음은 꼭 혼인하는 이에게 주려고 했는데. 입맞춤도, 짝짓기도. 모두 이락이 가져가 버린 셈이다. 연신 울면서 고개를 넘어가는데 저 멀리 이락의 거처가 나타난다.

의지와 상관없이 왔어도 달포 동안은 그래도 잘 지내 보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이제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다. 훌쩍이며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때마침 왕구가 부엌에서 나온다. 밥 짓는 시간인지 냄새가 솔솔 풍겼다.

“어, 방울아. 너 여긴 어쩐 일이냐. 용궁으로 아예 돌아간 게 아니었어?”

율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짐을 풀고 나오겠습니다.”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아닙니다…. 율은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왕구는 갸웃하다가 뒤이어 따라오는 이락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뛰쳐나갔다.

“형님. 오셨습니까. 용궁은 어땠습니까. 얼굴이 훤해지셨네요. 좋은 걸 많이 드셨나 봅니다.”

그 말에 이락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키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먹으려다 된통 당했다.”

“예? 그게 무슨….”

왕구가 의아하여 물으니 이락이 잠시 생각하다 왕구를 쳐다본다.

“내 얼굴이 징그럽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이락은 율이 들어간 문을 노려보며 한마디 보탰다.

“누가 나더러 징그럽다 하길래, 네 눈에도 그런가 싶어 물었다.”

“어떤 정신 나간 것이 그런 소릴 합니까. 제가 태어나서 본 인간과 수인을 통틀어 형님만 한 미남은 보질 못하였습니다! 어떤 놈인지 년인지 모르지만, 제가 찾아가서 혼쭐을,”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율이 나온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율이 마루 아래로 내려와 신을 신는다. 왕구는 갓을 벗은 율의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발견하고는 눈이 커져서는 율의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방울아. 너 얼굴이 왜 이러냐?”

솥뚜껑만 한 손에 얼굴이 눌린 율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 거야? 어떤 잡놈이 널 울렸어? 누가 괴롭혔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몰골이 이 지경이 된 거야? 어떤 놈인지 말해 봐라. 내가 가서 대가리 털을 다 뽑아 놓을 테니까.”

율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이락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치 없는 왕구는 말해 보라고, 당장 가서 혼쭐을 내 준다고 하였으나 율은 그에게 괜찮다고 말리고는 부엌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왕구는 씩씩대며 팔을 걷어붙였다.

“형님, 형님은 아시지요? 누가 우리 쥐방울을 울렸는지.”

“나다.”

“…….”

이락이 머리를 디밀었다.

“뜯어.”

왕구가 당혹스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형, 형님인 줄은 몰랐습니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요…. 그나저나 왜 애를 울린 것입니까. 저 쪼그마한 것이 혼낼 데가 어디 있다고요.”

왕구는 투덜거리더니 율을 달래 주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던 율은 왕구가 다가가 몇 마디 하니 힘없이 웃어 준다. 그걸 본 이락은 내심 부아가 치밀어 고개를 홱 돌려 버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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