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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8화 (38/102)

38화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을 보며 율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대궐에서도 이런 음식은 보지 못했던 거 같은데. 하지만 맛있는 음식과는 대조적으로 뒤쪽으로는 무사들이 포진하여 있었다. 이건 마치 적장에서 적과 식사를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음식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건 건너편에 앉은 이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무령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는데, 여전히 낯이 익었다. 그가 율을 향해 술병을 들이밀었다.

“선비님도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탁, 이락이 술병을 손으로 막았고 허공에서 이락과 무령의 시선이 얽혔다.

“거절하지.”

“내가 선비님께 드린 술을 어째서 네가 막는 거지.”

“쥐방울은 술을 먹으면 주정뱅이가 된다.”

“선비님의 이름이 쥐방울입니까?”

율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닙니다…. 제 이름은 방율입니다. 방율. 유울.”

율은 이락이 제대로 들을 수 있게 그의 귓가에 일부러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물론 이락은 눈 하나 깜짝 안 하였지만. 주인장은 얼굴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를 띠며 율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건네왔다.

“세상에. 그런 어여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쥐방울이라고 부르다니. 이락은 역시 심보가 못됐다니까요.”

율은 머릿속으로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저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더라….

“어째서 저를 그리 빤히 보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냥 낯이 조금 익은 듯하여….”

“낯이 익다뇨. 저 같은 미남이 흔치는 않을 텐데요.”

“하하, 네….”

누가 둘이 친구 아니랄까 봐. 그러다 율은 불현듯 꿈을 떠올렸다. 연못으로 가던 갈림길에 쓰러졌을 때 꾸었던 그 신비한 꿈…. 구미호가 나왔고 강제로 입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었었지. 그때 본 구미호가 어떻게 생겼더라….

무령을 자세히 뜯어보던 율의 얼굴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직도 제가 낯이 익습니까?”

무령이 보란 듯 입을 쩍 벌리니 푸른 구슬이 반짝인다. 으악! 율은 기겁하여 잔을 집어 던지고는 이락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팔을 붙든 율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고는 이락이 무령을 쳐다봤다.

“둘이 만난 적 있어?”

“글쎄. 난 오늘 선비님을 처음 뵙는걸.”

율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따졌다.

“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그날 저에게 선물이라며 강제로 입에다 뭘 넣지 않았습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아!”

말을 맺지 못하고 율은 사색이 됐다. 그게 꿈이 아니면…. 그날 먹었던 게 아직 내 배 속에 있단 말인가. 절망하여 이락을 쳐다보니 그의 표정 역시 처음과 달리 굳어 있었다. 이락은 무령을 쳐다봤고, 무령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최면도 먹히질 않더니, 기억도 덜 지워졌구나.”

율은 울상이 됐다.

“저한테 뭘 먹이신 겁니까?”

무령이 얄밉게 웃는다.

“왜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겁나느냐?”

이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려는 건가. 율도 따라 일어서려고 하는데 이락이 순식간에 뒤에 있던 무사의 칼을 빼서 무령의 턱 밑으로 들이민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무사들 또한 칼을 빼 들고 모두 이락을 겨누었다.

율은 희게 질려 사색이 됐다.

“이, 이락 님…!”

목 아래 칼이 들어왔음에도 무령은 태연했고 이락 역시 귀찮은 투로 이야기했다.

“꺼내.”

“뭘.”

“네가 쥐방울한테 먹였다던 그거.”

“꺼내면 이 아이가 위험하다.”

이락이 서늘하게 웃었다.

“수작 부리지 말고 꺼내.”

진짠데? 무령이 율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요즘 귀신 안 보이지? 오랫동안 뭍에 있어도 멀쩡하고?”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엔 귀신을 본 적도 없고, 전처럼 물에 자주 가지 않아도 기운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져 보니 구미호를 만난 이후부터 그랬구나. 율이 대답하지 않자 무령이 턱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렸다.

“그게 다 내 덕이다. 네 몸에 귀신들이 달라붙으려 하길래, 막아 준 거라고. 알아듣겠어?”

율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제게 먹인 그 구슬이….”

“네가 뭍에 있는 동안은 삿된 것들한테서 널 보살펴 주지.”

그럼 나쁜 여우가 아니라 내게는 은인이 아닌가. 당혹스럽긴 하지만 듣고 보니 전혀 지어낸 이야기 같진 않았다. 여전히 이락은 칼을 겨누고 있었고 뒤에 있는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율은 조심스럽게 이락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이락 님… 아무래도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들었지? 율이 이해한다고 하니, 이건 치워 줬으면 좋겠는데.”

다정하게 저를 율이라고 부르는 무령의 태도가 조금 낯간지러웠다. 율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무령의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락도 만만치 않게 강경한 태세였다.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수하 하나가 들어와서는 무령의 귓가에 무언가를 전하였다.

무령의 얼굴이 아주 잠깐 차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가 턱 밑에 있는 칼을 손끝으로 슥 밀어냈다.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방을 나갔다. 졸지에 둘만 남게 되자 율은 이락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검을 빼앗아 뒤쪽으로 홱 던져 놨다. 그러고는 이락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만 앉으십시오. 천장 무너지겠습니다.

이락이 자리에 앉으며 율을 질책하였다.

“넌 어째서 여우와 만난 걸 말하지 않은 게냐.”

“당연히 꿈인 줄 알았습니다….”

“뭘 먹였는지 기억은 하고?”

“무슨 구슬이었는데….”

율은 제 배를 가만히 만졌다. 그럼 구슬이 여기 있는 건가.

“근데 정말 몸이 한결 가벼워지긴 했습니다. 물에 오래도록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멀쩡했고, 귀신도 보지 않았고요.”

“그래서. 여우의 말을 믿겠다?”

“이락 님과 친분이 있으시다면서요…. 그리고 계속 뵈니까 막 나쁜 분 같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느꼈지?”

“저분은… 제 이름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습니까.”

이락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그것이 그리 중요해?”

“당연하지요…. 그런 시도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락이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 듣는다. 지은이가 누구냐?”

이락이 눈을 끔뻑였다.

“모르겠습니다. 방금 머릿속에 확 지나갔습니다.”

이걸 어디서 읽었더라. 율은 눈동자를 굴리며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갔다. 분명 어디서 읽긴 하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락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네가 지어낸 걸 모를 줄 아느냐고 비웃었다. 하지만 율은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아무튼, 이름이란 게 그리 중요합니다. 제가 이락 님을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면 좋겠습니까?”

“엉뚱한 이름 뭐?”

율은 곰곰이 생각했다. 최대한 이락이 싫어하고 어이없어하며 다신 부르지 않길 바라는 이름으로다….

“오락? 가락? 벼락? 예를 들면 이런 것들…?”

“음….”

이락이 태연하길래 율은 조금 더 공격에 나섰다.

“아니면 붙여서 오락가락이라고 부를까요? 이락 님은 기분이 자주 이랬다저랬다 하시니 딱 맞습니다….”

음, 이락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눈치를 보면서 약과를 천천히 씹었다.

“기분 안 나쁘십니까?”

“별로.”

“어째서요?”

“난 오락가락하질 않으니까.”

“저도 쥐방울이 아닙니다….”

“그럼 나처럼 무시하거라.”

“…….”

율은 낙심하여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이락에게 전혀 먹히지 않나 보다. 그러자 이락이 삐딱하게 앉아 턱을 괴고는 율을 빤히 쳐다본다. 흐트러진 자세 때문에 그가 조금 방탕하게 느껴졌다. 율은 뒤늦게 이락의 귓가에 아직 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푸흐, 웃어 버렸다.

“왜 웃어?”

이걸 아직 꽂고 계셨습니다. 무심코 손을 뻗다가 몸이 앞으로 기울어 이락과 가까워졌다. 번뜩 머릿속에서 며칠 전 입을 맞추고 아랫도리를 비벼 대던 기억이 떠올라 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율은 잽싸게 그의 머리에서 꽃을 떼어 내고 딴청을 피웠다. 분홍색 꽃이 손바닥 위에서 곱게 꽃잎을 벌렸다.

“율아.”

율은 잘 못 들었나 싶어 이락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락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민다.

“율아.”

“…….”

“이름 불러 주는 게 그리 좋으냐?”

“무, 무슨….”

픽, 웃더니 율의 이마를 콕 찌른다.

“표정이 가관이다.”

율은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여우가 저의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기쁜 마음이었다면 이건 분명 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율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싶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서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독한 술이야.”

“목, 목이 타서 한 잔만 하겠습니다.”

말리기도 전에 벌컥 마시는데, 스르르 넘어간다. 향긋한 꽃 내음이 술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손에 쥔 꽃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제 마음속에서 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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