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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7화 (37/102)

37화

“육지가 아니라 저승에 끌려가는 얼굴이구나.”

도성 입구에 먼저 도착해 있던 이락은 터덜터덜 걸어오는 율을 보고 빈정거렸다. 율은 그의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이제 겨우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어젯밤엔 주막에서 홀로 술을 퍼마셨고, 집에 돌아가서는 숨죽여 울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떠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락이 코를 들이밀더니 인상을 쓴다.

“쥐방울. 술 마셨어?”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처지가 딱하여 한잔했습니다.”

“눈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울었느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울든 말든.”

“그러다 네 아비처럼 술에 잡아먹혀 천지 분간 못 하게 될 거다.”

율은 다툴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육지보단 용궁이 낫다고, 열흘 머무는 것도 힘들었는데, 달포간 끌려가 있을 생각을 하니 또다시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다. 계속 죽상을 하고 있으니 이락이 이마를 쿡 찌른다.

“정신 똑바로 차려. 저번처럼 또 엉뚱한 곳에 날 데려가지 말고.”

율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변신이나 하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락이 토끼로 변한다. 율은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가지를 챙겨 봇짐에 넣고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라면 고이 모셔서 품에 안을 텐데 맺힌 게 있으니 괜히 심술이 난다.

토끼의 귀를 잡고 번쩍 들자 발버둥을 치며 저를 쏘아보고 앞발로 탁, 후려친다. 율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락을 품에 감쌌다. 육지로 가면 갈굼을 당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품에 안긴 토끼가 갑자기 얼굴을 율의 가슴에 대고 문지른다. 뭘 하나 내려다본 순간 앞니로 율의 젖꼭지를 콱 깨무는 게 아닌가. 악! 율은 비명을 지르며 토끼를 떼어 냈다. 토끼의 눈빛이 기세등등하다. 율은 울먹이며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한, 한 번만 더 그래 보십시오. 망망대해에 팽개쳐 버리고 갈 것입니다!”

소심하게 경고를 날리고서는 이락을 도로 품에 넣었다. 미운 건 미운 거고 혹시라도 떨어질까 싶어 그를 꼭 안고서는 넓은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잠을 못 잔 데다 술까지 마신 탓에 졸음이 몰려왔고, 꾸벅꾸벅, 몇 번을 졸다 보니 어느덧 뭍에 당도하여 있었다.

물 밖으로 나온 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분명 제대로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졸면서 물살을 잘못 탄 것일까. 율은 품에서 이락을 꺼내어 내려놓았다. 어? 그런데 이락의 상태가 이상하다.

맥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자는 건가. 이락 님. 이락 님? 하고 부르자 이락이 인간의 형태로 변한다. 아! 얼른 뒤로 돌아 얼굴을 가렸는데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깨어나신 겁니까…?”

“…….”

율은 불길함을 느꼈다.

[중간부터 숨이 쉬어지질 않아서 죽는 줄 알았다. 너를 건드려도 모른 체하더구나.]

설마…. 뒤로 돌아선 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락이 사람의 모습으로 미동조차 없었다. 세상에.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부리나케 다가가 코에 가만히 손을 대 보는데 숨결이 느껴지질 않는다.

율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 탓이다. 나 때문에. 이락 님. 정신 차리십시오. 이락 님. 이락 님! 애타게 부르며 뺨을 두드리고 몸을 흔들어도 이락은 깨어나질 않았다.

“어쩌면 좋아….”

율은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서책에서 배운 대로 이락의 가슴을 양손으로 눌러 쉬지 않고 압박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입에다 숨결을 불어 넣었다. 여러 차례 그러길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도 이락은 돌아오지 않았고 율은 결국 울음이 터져 눈물을 뚝 뚝 흘렸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이락 님 제발 죽지 마십시오!”

상반신을 껴안고 제발 죽지 말라 애원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진다. 시끄럽다. 골 울리니 그만 울어. 율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락이 정신이 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리고는 율을 쳐다보다 웃는 게 아닌가.

율은 기쁜 나머지 울면서 웃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이락 님이 흑, 죽어 버린 줄 알았습니다.”

“울면서 웃으면 몸에 털이 난다.”

“상관없습니다. 이락 님이 살아 계신 게 중요하지요.”

정말 괜찮으신 것 맞지요? 움직이실 수는 있겠습니까?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는 건가요? 몸을 더듬던 율은 흠칫했다. 뒤늦게야 이락의 알몸 위에 자신이 올라타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언제까지 깔고서 비벼 댈 셈이냐?”

율은 황급히 일어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이락이 옷을 다 입고 나서도 율은 그의 안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걸으실 수는 있겠습니까. 다리에 힘이 없으면 다시 토끼로 변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집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그런 율을 보며 이락은 헛웃었다.

“아까는 바다에 나를 내팽개쳐 버릴 기세더니, 이젠 죽을까 봐 걱정하는구나.”

“그, 그건… 저도 화가 나서 그런 것이지요. 이락 님이 죽는 걸 원치는 않습니다.”

“어차피 난 안 죽는다.”

“안 죽는 이가 어딨습니까.”

“있어.”

율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 존재가 있긴 있지. 구미호나 산신령처럼. 그들과 아는 사이니 이락도 그럼 그런 존재일까. 그럼 이락도 신령 같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행색이며 말투가 너무… 상스럽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얼굴이 그래?”

“아, 아닙니다.”

“가만. 그런데 여기는 어디냐.”

주위를 둘러보던 이락은 눈썹은 찡그리며 얕게 한숨을 내쉬었고, 율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잘 온다고 왔는데… 어째서 엉뚱한 곳에 왔는지….”

“이 정도면 너 길치 아니냐.”

“잠깐 졸았는데, 그만….”

“술 처먹을 때부터 알아봤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잘됐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고 가자.”

“어디서 묵습니까?”

“근처에 아주 친한 벗이 살고 있지.”

“아, 이락 님 벗이면….”

“기대되느냐?”

“…….”

사실 만나고 싶진 않습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솔직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를 따라 뭍으로 나와서 걷는데 언덕이 하나 나온다. 언덕을 오르던 율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언덕 위가 연분홍색의 꽃나무로 뒤덮였다.

“와…. 너무 아름답습니다.”

“복사꽃이다.”

“이락 님의 집 뒷마당에서 봤습니다. 이렇게 많이 피어 있는 것은 처음 봅니다.”

율은 신기하여 쳐다보고 향을 맡아 보고 가까이 가서 살피었다. 먼 길을 오느라 노곤했던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이락은 꽃 하나를 따서는 율에게 손짓을 까닥였다. 의아한 얼굴로 가까이 가니 귓가에 대뜸 꽃을 꽂아 준다. 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가 웃는다.

“잘 어울리네.”

율은 손으로 더듬어 꽃을 확인하였다.

“마음에 드시면 이락 님도 하나 해 드릴까요?”

“…….”

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락이 선뜻 자세를 낮추어 준다. 율은 꽃을 하나 따서 이락의 귓가에 꽂아 주고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내 얼굴에 뭔들 안 어울릴까.”

“이락 님은 그 자신감이 참 보기 좋습니다.”

“너도 이 얼굴로 오래 살아 봐라. 저절로 뻔뻔해질 테니까.”

율은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막상 육지에 오니 신기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렇게 둘이 걸어가는데 도화밭 끝에 하얀 안개가 잔뜩 끼어 있다. 율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도화밭은 멀쩡한데 왜 이곳에만 안개가 끼어 있지. 불길한 느낌에 돌아가자고 이락에게 말하려는데 그가 율을 데리고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이락 님. 잠시만요. 이락 님. 그때 희미하게 무언가 나타났다. 커다란 대문? 쾅쾅쾅. 이락이 문을 두드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에 율은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귀신에 홀린 건 아니겠지. 걱정되어 곁에 있는 이락을 봤는데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다시 쾅쾅쾅. 세 번 문을 두드리니 잠시 후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린다.

이락이 문턱을 넘었고 율도 덩달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안으로 진입하자 기다렸다는 듯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율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기와집이 있었다.

그리고 마치 율과 이락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두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신비하고 다소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그들은 대부분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장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때 무사의 복장을 한 이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이락과 율의 앞을 막는다.

율은 주춤하여 뒤로 물러섰고 이락은 여전히 태평하였다. 그들 사이를 가르고 누군가 등장했다. 시중드는 이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의복 또한 화려한 수가 놓여 있었다. 이락은 그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무령. 오랜만이구나. 하룻밤 신세를 지려 찾아왔다.”

살기 어린 그의 눈빛을 보며 율은 생각에 잠기었다. 왜 낯이 익지.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무령이란 자는 이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너의 뻔뻔함은 여전하구나.”

율은 아무래도 잘못 방문하였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이락의 소맷귀를 붙들었다. 이락 님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여우의 눈이 율의 손에 닿았다가 쭉 올라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보통 미친 애들이 머리에 꽃 달고 다니던데. 둘이 쌍으로 아주, 잘 어울리네.”

“칭찬은 됐고. 피곤하니 방이나 내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이락이 싱긋 웃었고 무령 또한 표독스러워 보이던 눈을 샐쭉하게 접어 웃었다.

“좋아. 옛정을 생각해서 방을 내어 주지.”

그러더니 수발드는 이들에게 방을 안내토록 지시한다. 율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이 음산한 분위기도 그렇고 아까부터 적대심 가득한 눈빛들도 그렇고. 이락이 왜 이곳에 오라고 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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