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율은 방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앞에 놓인 상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이락이 제 모친에게 주라고 했던 산삼으로 선이 대문 앞에 놓여 있는 것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산삼을 받고 뒤늦게 나가 봤으나 이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율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여야 했다. 당시에는 이락이 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나 필요 이상으로 모진 말을 쏟아부었다. 어찌 보면 그에게 화풀이한 셈이었다.
날이 밝자 율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집안일을 해 주는 이가 부엌에서 나오다 율을 보고서는 딱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잠이 오질 않아서요.”
“에휴. 고운 얼굴에 멍이 들었네. 아들 하나 있는 거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율은 멋쩍게 웃으며 갓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밤에 붓기를 가라앉혀 주는 약초를 짓이겨 얼굴에 붙였더니 그나마 멍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옆방을 보니 선은 아직 자는 것 같았다. 율은 잠시 나갔다 온다는 말을 남기고서는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침 일찍 문을 연 가게를 찾아간 율은 그곳에서 무언가를 신중하게 골랐다. 그리고는 그것을 종이에 싸 품에 넣고서는 용궁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가마 하나가 곁으로 지나가다가 멈춘다.
가마의 작은 창이 열리면서 좌의정이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이게 누구야. 별주부 아닌가.”
별주부는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좌의정 나리 아침 일찍 뵙습니다.”
“자네는 당분간 입궐하지 않는다 들었는데?”
“잠시 궁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었사옵니다.”
“그래. 한데 얼굴은 왜 그러나? 누구하고 싸웠나?”
별주부는 애써 미소 지었다. 좌의정이 율의 사정에 대하여 알 리가 없었다. 한눈을 팔다 넘어졌다고 둘러대니 그가 조심하지 그랬냐며 걱정을 해 준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천천히 오게.”
예. 좌의정을 태운 가마가 앞서가고 율은 조금 떨어진 뒤에서 걸었다. 그렇게 용궁으로 들어간 율은 지나는 궁인들을 붙들고 이락의 거처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기진의 침소와는 멀지 않은 곳이었고 중요한 손님이 오면 머무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락의 침소 앞에 당도하였을 때 율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이른 시간부터 정원에 용왕의 딸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녀들은 깃털이 달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는 사담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자세히 보면 대부분 이락의 방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어머, 별주부. 여긴 어쩐 일인가.”
“자네 혹시 토끼를 만나러 온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흩어져 있던 공주들이 율에게 몰려든다. 자네가 육지에서 토끼와 함께 있었다지. 성품이 어떻더냐. 몸이 좋던데 따로 운동은 하는 게 있더냐. 글을 잘 쓰던데, 혹시 글 선생은 누군지 알고 있느냐. 고환을 직접 확인하였다는데, 그럼 양물도 봤느냐.
율은 점점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서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율을 보며 공주들은 깔깔 웃었다. 얘 봐라. 아직 동정이구나. 어쩌면 이리 귀여울꼬. 막내 공주가 율의 볼을 꼬집으려 했고 율은 어색하게 그 손을 물리었다.
“그럼 혹시 토끼에게 배필이 있느냐?”
율은 고개를 저었다.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여인은?”
여인을 많이 만나는 것 같기는 한데 사모하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다들 잔치 분위기다. 그럼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볼까, 아니야 너보다 내가 낫지. 서로 앞다투어 이락한테 말을 걸겠다고 난리다.
율은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거 같다고 생각했다. 문 앞에다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선물만 놓고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공주들에게 붙들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잠시 벗어났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구나.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던 그때 문이 벌컥 열린다. 어머나- 공주들이 부채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옆에 있던 궁녀들 역시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란스러워 깼는지 이락이 바지 하나만 걸쳐 입고서는 인상을 쓴 채 밖으로 걸어 나온다.
어머, 세상에.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저 얼굴이라니. 저리 잘생긴 미남은 여태 보질 못하였다. 기진과 견주어도 빠지질 않는구나. 어디 그것뿐이겠어요. 저 단단한 근육을 보세요. 기생오라비 같은 기진보다야 저리 튼실한 자가 사내구실을 하는 법이지요.
자기들끼리 꺄르르 거리면서 웃고 떠드는데 이락이 앞에 있는 세숫대야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든다. 저것 보세요. 저리 무거운 쇳덩이를 종잇장처럼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것을 공주들에게 휙 뿌리는 게 아닌가.
꺄아아악. 놀란 공주들이 기겁하며 흩어졌고, 몇몇은 졸지에 물벼락을 맞았다. 멀찍이 떨어졌던 율은 다행히 물은 맞지 않았으나 이락과 눈이 마주쳐 오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는 물을 뿌린 다음 짓궂게 웃었고 공주들은 너나 할 것 이락에게 성질을 냈다.
“이봐, 토끼야. 네가 아바마마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이구나!”
“우리한테 이리 무례하게 군 것을 후회할 것이다!”
“상대하지 맙시다. 그래 봤자 짝불알인 것을!”
왜 이렇게 소란을 떠는 것이야. 마침 제일 맏이인 무연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첫째로 외모가 아름답고 성품 또한 어질어 용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도 늘 앞장섰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계에 들지 못하였다. 무연 공주가 어린 동생들을 나무랐다.
“귀한 손님이 머무는 처소 앞에서 왜 이리 소란을 떠는 것이냐.”
“큰언니. 그런 것이 아니라!”
공주들이 변명하려고 하자 무연 공주가 무서운 표정으로 야단을 친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이락을 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가 동생들을 잘 가르치지 못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시지요.”
그 말에 이락이 픽 웃었다. 적어도 멀쩡한 이가 하나는 있군. 그 말을 하고서는 한쪽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율을 응시한다. 율은 아까 도망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락이 무연 공주를 불렀다.
“별주부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대의 동생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 그리하겠습니다.”
무연 공주가 동생들을 데리고 사라지고 정원에는 율 혼자만 남게 됐다. 율은 민망하고 뻘쭘한 표정으로 이락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내려다봤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이리 가까이와.”
율은 쭈뼛거리며 마루로 다가가서는 품에서 준비해 온 것을 꺼냈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이락이 물었다.
“뭐지?”
말이 없자 이락이 직접 그것을 풀어 본다. 그러고는 인상이 구겨진다. 커다란 엿 하나가 들어있었다.
“어젠 나한테 상처를 주더니, 오늘은 엿을 주는구나.”
빈정거리는 소리에 율은 뜨끔하였다.
“그것이 아니라… 용궁에서는… 벗끼리 사과할 일이 생기면 엿을 선물로 줍니다.”
“내가 너의 벗이던가.”
“그것은 아니지만….”
“됐고. 그럼 편지는 뭐야. 연서?”
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이락이 편지를 펼쳐 보더니 읽어 내려가고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서체가 반듯하니 꼭 너를 닮았구나.
“어제 제가 이락 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락은 율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락 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려 한 건데… 그 마음도 모르고… 막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짓궂게 하셔도 내내 저를 챙겨 주신 걸 압니다. 감사합니다. 산삼은… 어머니께 잘 먹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뵐 일은 없겠지만… 부디 무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그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짓궂고 못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정말 나쁜 이는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데 무슨 이윤인지 이락이 한쪽 입꼬리를 슥 올려 웃는다.
“그래, 알았다. 잘 새겨들으마.”
율은 마음이 놓였다.
“부디 몸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는데 저 멀리서 기진이 나타난다. 율은 그에게도 인사를 하려고 기다리는데 기진이 가까이 와서는 반가운 얼굴을 한다.
“별주부, 내 그러지 않아도 집으로 사람을 보내려 했는데.”
“예?”
“벌써 토 선생과 이야기를 끝낸 것인가.”
무슨 소리지? 이야기를 끝내다니. 둘이 싸운 걸 기진이 알고 있는 걸까. 돌아서서 이락을 보니 그의 표정이 어딘가 묘하다. 등 뒤로 불안감이 번지기 시작하였으나 애써 외면하며 기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기진이 이락을 힐긋 보더니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모르고 있었군.”
“뭘… 말씀입니까?”
“자네가 달포간 육지에 머물면서 토 선생의 일을 돕게 되었네.”
예? 율이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고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니… 그러니까… 저는… 어제 막 육지에서 돌아왔습니다….”
“내 그래서 다른 이를 보내려 했는데, 토 선생이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다 하시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절대 싫다고 말하려는데, 기진의 간절한 표정이 율의 마음을 흔든다.
“달포면 된다. 부탁한다, 율아.”
율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이락을 돌아봤다. 어찌나 사악하게 웃는지 저승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았다. 율은 그제야 이락이 꽤 뒤끝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율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을 육지에선 뭐라고 표현하더라? 뭐였는데….
아, 그래. 기억났다.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