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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35화 (35/102)

35화

이락은 숨만 내쉬고 있는 용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열흘 만에 본 그의 얼굴은 병색이 짙어져 의식조차 없었다. 때마침 의원이 들어와 침을 놓고 탕약을 올리려 하자 기진이 그들을 물렸다 둘만 남게 된 상황에서 기진은 용왕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꼴 좋군.”

기진이 곁으로 와서 선다.

“호두를 가지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락이 웃었다. 다들 바보 천지인데 그걸 알아보는 자가 하나는 있군.

“아무렴 어때. 어차피 자네는 아비를 살릴 마음이 없잖아.”

기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눈으로 이락의 모습을 좇았다. 이락은 뒷짐을 진 채 침전에 있는 것들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갔던 자수정이 제자리에 있는 걸 보고 혀를 차더니, 말린 아카시아꽃 앞에서는 유독 오래 머물렀다.

기진은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놈이 기어코 나를 없애러 왔구나! 염라 그놈이 원수를 갚으러 온 게야!]

토끼가 처음 궁에 온 날 잠시 정신이 든 용왕이 그리 소리쳤다. 처음엔 용왕이 제정신이 아니라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기진은 짚이는 구석이 있어 서고에서 예전 기록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수백 년 전 기록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진은 번뜩이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어차피 그도 용왕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터. 그것을 이용한다면 어떨까. 물론 그가 쉽게 허락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다음날 바로 육지에 있는 그를 찾아간 것이었다.

“초면엔 몰라뵙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지상으로 쫓겨난 몸. 지금의 난 그저 볼품없는 토끼에 불과하니까.”

“시간이 흐르면 천제께서도 용서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락이 웃었다. 건방지군.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사실 딱히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복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끼고 흥미를 잃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락은 돌아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서해 용왕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저승에 있는 불을 내주었더니 나중에는 나를 추방하는 데 앞장섰지.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놈.

“네 목숨도 이제 달포면 끝이 나겠구나.”

그러고 나서 기진을 바라봤다. 기진의 눈빛에선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용왕은 욕심이 많고 속이 훤히 보이는 자였다. 그런데 이자는 누구를 닮은 걸까. 이락은 그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붙잡을 것이다.

“혼담은.”

“아직 이른 듯하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남해에 혼담을 넣으라 조언한 것도 이락이었다. 남해 용왕의 딸 중에 숨겨 둔 자식이 하나 있는데, 워낙 박색 하여 데려가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용왕의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혼담을 넣는다면 남해 왕은 고마워서라도 기진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인물은 중요한 게 아니지. 후궁이야 따로 두면 되는 거고.”

그 말에 기진이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그때 내관 하나가 와서는 연회 준비를 마쳤다고 알려 준다. 긴 복도를 지나 연회장으로 당도하였는데, 별주부가 보이지 않는다. 이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진을 불렀다.

“왜 쥐방울은 없어?”

“별주부는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효심이 지극한 아이라, 모친을 돌봐야 하니까요.”

흠. 이락이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하였다. 앉아 있던 대신들이 이락을 보며 이리 앉으라고 난리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화려한 비단 치마를 입은 기녀들이 저고리도 입지 않고 어깨를 드러낸 채 이락에게 아양을 떨었다.

“나으리. 제 술 한 잔 받으시어요.”

술을 권하는 것을 마다하고 이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나는 가 볼 데가 있어서, 이만.”

“아니, 토 선생을 위해 마련한 자린데 어디를 가신다고 그럽니까.”

“맞소. 우리에게 육지 이야기 좀 들려주시오. 교류가 끊긴 지 오래라 그곳이 너무 궁금하오.”

“아니면 다른 아이를 부를까? 이월아. 가서 삼월이를 불러와라.”

이락이 그만하라며 손을 내젓고는 귀찮은 표정을 했다.

“이월이든 삼월이든 됐고. 별주부 집이 어딘지나 알려 줘.”

“별주부 집은 왜….”

“오늘이 마지막인데 나한테 인사도 없이 가다니. 괘씸하잖아.”

집에 도착한 율은 담장 너머로 안을 들여다봤다. 선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벌컥벌컥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보니 차마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율은 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서 아버지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대고 있으니 긴 여정 때문인지 꾸벅꾸벅 잠이 쏟아진다. 깜박 졸다가 깨기를 반복하던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던 율은 화들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왜. 귀신이라도 봤어.”

이락이 뒤를 돌아보길래 율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보아하니 그가 혼자 온 듯한데…. 율은 당황함을 감추고 이락의 행색을 살펴봤다.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락이 웃었다.

“너희 왕자가 가르쳐 주던데. 집이 헷갈려 고민하고 있는데 네가 딱 앞에 나와 있지 뭐냐.”

“아….”

“그런데 왜 여기서 궁상맞게 쪼그리고 있어?”

율은 입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담장 너머를 흘깃 보니 아버지가 아직 술을 먹는 중이다. 이락 역시 그걸 놓치지 않았다.

“네 아비 되는 잔가.”

“예…. 술을 드시고 있어, 이따가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지금 들어가면 안 될 연유라도 있어?”

“…….”

율은 차마 말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락이 율을 지나쳐 가더니 대문을 벌컥 연다. 놀라서 말리기도 전에 그가 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갔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어? 이 댁 아드님 아닙니까. 그런데 옆에 분은….”

그때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율을 본다. 율은 긴장하여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소자 왕자마마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데, 아버지가 들고 있던 술병을 탁 내려놓고는 마루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온다. 율이 움찔하여 뒷걸음질을 쳤고 순식간에 아버지가 손을 치켜들어 율의 뺨을 후려쳤다. 솥뚜껑만 한 손에 율이 얼굴을 맞아 저만치 나가떨어졌고 방희는 악을 썼다.

“왜 또 기어들어 와! 왜! 나가서 죽든 말든 없어지라고 했잖아!”

일꾼이 말리려고 하자 그들을 뿌리치고는 율을 발로 밟기 시작하였다. 율은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락은 그런 방희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반대편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얻어맞고 있던 율이 고개를 들자 이락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그때 넘어졌다고 한 건 거짓이었구나.”

눈물을 흘리던 율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아버지! 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이락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방희가 몽둥이를 들고서는 이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락은 몽둥이를 가볍게 막아 내고는 방희를 배를 걷어찼다. 악. 배를 잡고 마당에 뒹굴자 이번엔 방희의 가슴을 발로 짓밟고는 몽둥이로 그의 목을 꾹 눌렀다.

컥, 방희가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이자 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락을 말렸다.

“그만하십시오! 뭐 하는 겁니까!”

그런데도 이락은 힘을 풀지를 않는다.

방희의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러나오고 눈은 하얗게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이러다 죽습니다! 제발 놓으십시오!”

다급해진 율은 이락의 손을 냅다 깨물었다. 이락이 미간을 찡그리며 쳐다봤고 율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대체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왜 여기까지 오셔서 저를 괴롭히십니까!”

이락이 멈칫하였다. 엉엉 우는 모습에 이락이 몽둥이를 옆으로 집어 던지고 발을 치웠다. 방희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율은 그를 부축하였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이락이 그 모습을 노려보다 홱 돌아서서 대문을 걷어차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버지를 부축하여 방으로 옮긴 율이 부리나케 그를 쫓아 나섰다. 이락 님! 하고 부르니 저만치 가고 있던 이락이 돌아봤다.

율은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 내면서 이락에게 다가갔다. 얻어맞은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랐고 옷은 흙투성이가 됐다. 이락은 차가운 어조로 율에게 따졌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 봐라. 뭐? 괴롭혀? 내 너를 몇 번이나 구해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기는.”

“그래서 은혜를 갚으려고 제 딴에는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락 님은 사사건건 저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도 보십시오. 제가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왜 시키지도 않은 일로 저를 곤란하게 하십니까.”

“너 지금 네 아비를 때렸다고 이러는 거냐?”

“아무리 그래도 제 아버집니다. 잘못하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었어? 멀쩡히 살아 있잖아. 아니면 지금이라도 죽여 주랴?”

율이 답지 않게 이락을 쏘아봤다. 그러자 이락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너도 저런 아비는 없는 게 낫지 않겠어? 말만 해라. 네 왕자가 내 뒷배가 되어 준다고 하니,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나한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노려보던 율은 봇짐을 뒤져 이락에게 받은 산삼을 내밀었다. 이락의 얼굴이 서늘해졌고 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이락에게 떠넘겼다. 율은 눈물을 훔치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더는 신세 진 게 없습니다. 앞으로 볼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쪽으로 가 버린다. 하. 혼자 남은 이락은 어이가 없어 손에 든 산삼을 노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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