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왕구가 방에서 커다란 궤짝들을 들고나왔다. 그것의 뚜껑을 여니 화려한 모양의 비녀와 노리개, 고급 한지로 만든 부채 같은 사치품들이 가득하다. 특이한 것은 모양이 같은 물건이 여러 개라는 점이었다.
“확인해 봐.”
이락의 말에 도승지가 같이 온 누군가를 불렀다. 그는 궁인이 아닌 장사치 같았는데 안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내 들더니 물건을 살피었다. 마지막 물건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에는 도승지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도승지가 부하를 시켜 용궁에서부터 들고 온 함들을 내려놓는다. 그것이 열리는 순간 지켜보던 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산호가 담겨 있었는데 대부분 바다에서도 진귀한 눈물 산호였다.
눈물 산호는 아주 오래전 옥황상제가 자식을 잃고 흘린 눈물이 바다에 떨어져 산호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수가 많지 않아 용궁에서도 왕족과 귀족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이락이 산호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함의 뚜껑을 덮었다.
“다음 거래 때는 약속을 지켜 줬으면 좋겠는데. 너희가 늦으면 나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예, 명심하지요.”
도승지는 이락을 깍듯하게 대하였다.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 기진에게 몇 번이나 당부를 받았을 것이다. 그자가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이며 도발해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는. 속내야 어떻든 그는 조아리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다.
한편 율은 의아함이 생겼다. 다음 거래라니…. 그러고 보니 혼담에 쓸 물건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들이 꽤 많았다. 어째서 사내들이 쓰는 물건이 반을 차지하는 것일까.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율이 떠나는 도승지를 배웅하러 따라갔고 이락은 함을 가득 채운 산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정도면 두 배의 값을 매겨 이화 상단에 넘겨도 되겠구나. 그는 왕태를 불러 함을 처리하게 했다.
“귀한 산호니 잘 보관하거라.”
예. 왕태가 함을 번쩍 들고 안으로 옮기는 사이 저 멀리서 율이 도승지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쪽을 한번 봤다가 다시 이야기하다가 또 이쪽을 봤다가. 그걸 보며 이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잠시 뒤 용궁 사람들을 보내고 나서 율이 걸어오는데 멀리서 봐도 성이 난 게 느껴질 정도로 팔이 앞뒤로 휙휙 움직인다. 그걸 보며 이락은 키득 웃었다. 곁에 있던 왕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큰형님. 뭘 보고 그리 즐거워하세요?”
“왕구야.”
“예.”
“나는 요즘 네 심정이 이해가 간다.”
“예?”
“귀여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 하였지, 내가 지금 딱 그렇다.”
왕구가 잘못 이해하고는 입술이 찢어지게 웃었다. 형님도 이제 귀여운 게 얼마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지 깨달으신 거군요. 그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이참에 어디서 강아지 한 마리 데려다 키우는 건 어떻습니까. 라고 말을 하는데 이락이 홱 돌아섰다.
“강아지보다 더 귀여운 게 있는데 뭣 하러. 나는 잠이나 한숨 자야겠다.”
이락이 방으로 들어가자 이어서 방율이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서는 이락을 찾는다. 방으로 들어갔다고 알려 주니 냉큼 신을 벗고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일어나 보십시오. 주무시는 거 아니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락은 몸을 돌린 채 보료 위에 누워 미동도 없었다. 율은 억울한 마음에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째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도승지 영감에게 다 들었습니다. 혼담에 넣을 것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말해 보십시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그래도 대답이 없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락 님.”
하고 부르는 순간 이락이 홱 돌아눕는다. 으앗. 율은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지다 책상에 머리를 쿵 찧었다. 아이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굴러다니니 이락이 모로 누워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너는 내가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구나.”
율은 부딪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울먹거렸다. 혹이 난 것 같았다.
“어찌하여 제게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너야말로 왜 그래?”
“예?”
“왕자의 혼인이 무에 그리 큰일이라고 어제부터 네 기분이 오락가락하느냐 이 말이야.”
율은 뜨끔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그자를 연모해?”
이번엔 불에 덴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닙니다! 그분에 대한 제 마음은 존경과 선망입니다. 경외의 마음이지 연모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펄쩍 뛰니 더 수상한걸.”
율은 마음을 추스르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락 님이야말로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왜 자꾸 저한테 심술을 부리십니까. 제가 이락 님을 언짢게 해 드린 게 있습니까. 아니면 저를 구워 먹는 대신 괴롭히는 거로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이유가 궁금해?”
“예, 말씀해 보십시오….”
꼭 들어야겠다는 표정을 하니 이락이 손짓한다. 이리 가까이 와 봐. 말해 줄 테니. 율은 흠칫하였다. 가까이 가려니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 슬그머니 뒤로 꽁무니를 뺐다.
“거, 거기서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딜 가고 쪼느냐. 마음 아프게.”
“이락 님이 하도 괴상망측한 짓을 많이 하시니 경계하는 것입니다.”
“괴상망측이라. 숲에서 내게 입을 맞추겠다고 한 건 네 선택이었다.”
율은 기겁하고 문밖을 내다봤다. 조용히 하십시오. 누가 듣겠습니다. 안절부절못하자 이락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병풍 끝으로 걸어간다. 뭘 하려나 봤더니 그가 병풍을 옆으로 밀어서 접는다. 놀랍게도 병풍으로 가려진 뒤에는 서책이 빼곡하니 꽂혀 있었다.
율은 방금까지 역정을 내던 것도 잊고 홀린 듯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예전부터 모으던 것들이다. 네 마음이 언짢다니 여기 있는 서책을 빌려 주마.”
율은 서책들을 살폈다. 용궁에서도 육지의 책들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보지 못하였다. 겉이 한지로 된 것부터 시작하여 가죽으로 된 것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책의 상태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차례대로 살피며 제목을 읽던 와중에 서책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인과 요괴? 이것은 무엇입니까.”
“서양의 이야기책을 번역한 것이다.”
서양이라니. 율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상단을 통해 꽤 거금을 주고 구했지.”
“읽어 보셨습니까?”
“내 취향은 아니었다.”
혹시 봐도 되느냐고 물으니 이락이 흔쾌히 승낙한다. 율은 그것을 펼쳤다. 놀랍게도 중간중간 그림도 있다.
“내용이 어찌 됩니까?”
“아주 못된 왕자가 벌을 받아 괴물로 변하고 착한 아가씨를 만나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이야기다.”
“아….”
“내용이 마음에 드느냐…?”
곰곰이 생각하던 율이 고개를 저었다.
“제 취향은 아닙니다….”
“어째서.”
“인간의 본성을 숨길 순 있어도 바꾸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못된 왕자가 진실한 사랑을 얻었다고 하여 착해지란 법은 없지요.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본성이 나올 테고, 그러면 그 아가씨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가슴을 쥐어뜯겠지요. 자고로 인간이든 짐승이든 고쳐 쓰는 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이락이 눈을 가늘게 늘이고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너 은근히 부정적인 구석이 있다?”
“예?”
“그럼 그 요괴가 평생 그러고 살길 바라는 거냐?”
율은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왜 갑자기 저한테 불똥이 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됐다. 그럼 읽지 마라.”
이락이 책을 빼앗아 다시 넣으려 하기에 율은 얼른 붙들었다.
“그, 그래도 읽고 싶습니다.”
책을 가져가 품에 꼭 안는 모습을 보고 이락이 슬쩍 웃었다. 다른 책들도 구경하는데 위쪽 높은 곳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 보인다. 그것을 꺼내려 손을 뻗었으나 도저히 닿지 않았다. 그러자 이락이 뒤로 와 대신 손을 뻗어 줬다. 등에 이락의 가슴이 닿고 정수리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지니 율은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책장에 몸을 바싹 붙였다.
책을 꺼낸 다음 이락은 그것을 율에게 건넸다.
“이 책이 맞아?”
거리가 너무 가까워 율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조용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이락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대나무 숲에서 입맞춤한 것이 떠올라 가슴이 콩닥거렸다.
“잘… 읽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옆으로 비켜 도망치려는데 이락이 앞을 턱 가로막는다. 율은 놀라서 다시 이락을 쳐다봤다.
“나 궁금한 것이 있다.”
이락이 율을 포위하더니 그의 옷고름을 손으로 잡았다. 율은 그것을 주시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젠 고름 끝을 손으로 은근하게 문지른다.
“기분이 어땠어?”
“예?”
“숲에서. 네 기분이 어땠느냐고.”
율은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도 못 했다.
“좋았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율은 옷고름을 잡을 이락의 손을 확 떼어 내고는 질색을 하며 옆으로 비켜 도망쳤다.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책, 책은 읽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후다닥 말을 마친 뒤에는 문을 열고 빠르게 도망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그 앞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고 나니 가슴이 요동을 친다. 율은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는 꾹 눌렀다. 왜 이러니. 진정해라. 진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