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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8화 (28/102)

28화

시끌벅적한 소리에 율은 감은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하다.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도 일어날 기운이 없어 그대로 한참을 누워 있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던 율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는 몸부림을 쳤다. 어째서. 어째서 그랬을까….

술이 덜 깬 것인가. 아니면 이락이 건네준 담배에 무언가 다른 게 섞여 있는 걸까. 왜 그 순간 이락을 밀쳐내지 못하였나. 도무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밤새 잠을 설쳤고 동이 터 오를 때야 겨우 잠이 들 수가 있었다.

[아, 거기 아니라, 여기라니까.]

밖에서 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율은 유심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락은 외출했나. 차라리 어디든 가 버려서 얼굴을 안 봤으면 좋으련만. 그때였다. 쥐방울 나와 봐. 손님이 오셨다. 용궁에서 손님이 왔어.

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 고민이 무색하게 버선발로 뛰쳐나가 보니 용왕을 모시는 도승지가 평복을 입고서는 함을 멘 이들을 여럿 데리고 왔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율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율은 아래로 내려가 그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도승지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말도 마라. 명령을 받고 어제 출발하였는데 낯선 자들에게 쫓겨 밤새 도망쳤다.”

율은 놀라서 물었다. 낯선 자들이라뇨?

“인간이었는데, 칼과 횃불을 들고서 가진 걸 다 내놓으라 겁박하더구나. 싸웠다간 괜히 분란만 일 것 같아 급히 도망치긴 하였는데, 도중에 병사 하나를 잃었다.”

아…. 율은 심란하였다. 이락의 말을 전부 믿었던 건 아니지만 예정된 날짜를 지났기에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화적 떼를 만나다니. 혹시 그 화적 떼가 이락의 수하들은 아닐까. 잠시 의심을 하다가 인간이라는 말에 마음을 놓았다.

“참, 너를 만나면 제일 먼저 주라고 당부하셨는데.”

도승지는 품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 율에게 건네줬다. 수초로 예쁘게 장식한 서찰은 선이 보낸 것이었다.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율의 얼굴에 조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머니께 육지에서 구한 약을 드리고 있으나 아직 차도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토끼란 자는 어딜 갔느냐? 구명환의 효력이 떨어지기 전에 그에게 물건을 받아 돌아가야 하는데.”

율은 먹먹해지는 감정을 추스르고 왕구를 불렀다.

“왕구 형님. 이락 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글쎄다. 아침에 뒷숲에 가시는 걸 보긴 했는데….”

“대나무 숲 말씀입니까?”

“그래. 가끔 일이 안 풀리거나 하면 거기에 가서 활을 쏘신다.”

활이라…. 고민하던 율은 자신이 가서 데려온다며 서둘러 나섰다. 전에 봤던 귀신이 떠올라 겁이 났으나 더 지체하였다간 도승지와 그의 부하들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율은 빠르게 달려 들판을 지나 대나무 숲에 당도하였다. 기분 탓인지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한기가 느껴진다. 율은 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이락을 애타게 불렀다.

“이락 님! 어디 계십니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는다. 더 안으로 들어가서 이락을 찾았다. 이락 님! 이락 님!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하늘 위로 곧게 뻗은 대나무들이 스스스, 음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율은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어서 빨리 이락을 찾아 나갈 생각으로 발길을 옮기던 그때였다. 휙, 하고 얼굴 옆으로 무언가 스치고 지나간다. 으악. 율은 기겁하여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이락이 활을 들고서 나타났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율은 십 년 감수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돌아보니 조금 전 이락이 쏜 화살이 나무 한가운데 꽂혀 있었다.

“이런 귀신인 줄 알고 쐈는데, 자라였네.”

그 말에 괜히 울컥하여 따져 물었다.

“제가 어찌 귀신으로 보입니까.”

“가서 면경으로 네 몰골을 봐라. 얼굴이 허옇게 뜨고 눈 밑은 시커메서 귀신과 다를 게 뭐가 있는지.”

율은 제 뺨을 문질렀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몰골이 말이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멀쩡히 살아 있는 짐승한테 귀신이라니. 거기다 활까지 쏘고. 그러다 뒤늦게 어젯밤 일이 떠올라 괜히 딴 곳을 쳐다봤다.

“용궁에서 도승지 영감이 왔습니다….”

“그래?”

“저한테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면서요.”

이락이 처음 듣는다는 듯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억울하였으나 율은 말싸움으로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어서 가십시오…. 그들은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이락이 나무에 박힌 화살을 팍 뽑더니 화살집에 툭 던져 넣는다. 그러고서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율은 마음이 조급해져 그를 쫓아갔다.

“어디 가십니까. 집은 저쪽입니다.”

“급한 건 너지, 내가 아니지 않냐.”

율은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저를 찾아온 손님이기도 하지만 이락 님을 찾아온 것이기도 합니다. 저리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취미를 방해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난 이 시간을 오롯이 활쏘기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방해하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 다른 놈 같았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약속이 먼접니다.”

“저들이 약속한 날짜는 어제였다. 어긴 것 또한 저들이지.”

“이러실 겁니까?”

“네가 괘씸해서 그런다. 이렇게 해야 내 분이 풀릴 거 같으니 내버려 둬.”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는 화살 끝으로 율을 가리켰다.

“너.”

율은 흠칫했다.

“어젯밤 나를 무안하게 해 놓고, 사과 한마디 없지 않으냐.”

어젯밤? 갑자기 떠오르자 율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시뻘게졌다.

이락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너하고 입맞,”

율이 황급히 달려가 이락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락이 눈동자를 슥 내려 율의 얼굴을 쳐다본다. 율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락에게 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잊어 주십시오.”

어찌나 애원하는지 이락의 미간이 구깃구깃해졌다.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락 님과 그, 그런….”

이락이 율의 손을 툭 치우더니 삐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율은 그가 어젯밤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하였다고 생각했다. 같은 수컷인 자신과 그런 일이 있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잊는다고 치자. 그럼 농락당하여 상처받은 내 마음은 어디서 보상을 받지?”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냐….”

싫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데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대답해.”

“예….”

“분명 한다고 했다?”

즐거워 보이는 이락의 표정을 보니 불안하다. 율은 방금 한 말을 취소하고 싶었는데 그러기도 전에 이락이 한 발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여기서 다시 입을 맞추어 봐.”

율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어찌하여….”

“나는 어제 몹시 궁금하였다. 사내하고 입을 맞추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근래에 이렇게까지 궁금한 건 처음이었거든. 그런데 네가 도망가는 바람에 해소하지 못하였고 기분만 잡쳤지.”

“그리도… 궁금하셨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락 님 말씀은 지금 그 궁금증을 해결시켜 주면… 제 부탁을 들어주신단 말씀이지요?”

“아주 머저리는 아니구나.”

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의미가 담긴 입맞춤이 아니라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거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다 이락의 표정을 보니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율은 고민했다.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처럼 그저 입을 맞추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서양 어디서는 인사로 입도 맞춘다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부여하지 말자.

그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다.

율은 결심을 굳히고 후,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해결해 드리면 됩니까?”

이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그래.

“그러니까, 입술만 닿으면 된단 말씀이지요…?”

“몇 번을 말해. 그렇대도.”

율이 바로 코앞까지 걸어가서는 이락의 얼굴을 긴장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할 테니, 눈을 감으십시오….”

“요구하는 것도 많다.”

투덜대면서도 이락은 눈을 감았다. 율은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쭉 빼었다. 그러나 키 차이 때문에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뒤꿈치를 들어도 어림도 없어 나중에는 이락의 어깨를 붙들며 조금 더 발끝을 세웠다.

그때 갑자기 이락이 눈을 뜨고 율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놀란 율은 눈을 크게 떴다가 꼭 감아 버렸다. 양 주먹을 움켜쥐고는 부동자세로 있는데 이락의 손이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싼다. 타인의 입술이 이렇게 뜨거운 거였나. 율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촉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물컹한 것이 입술 사이를 벌리려고 한다. 어? 하고 놀라 입을 벌리니 그것이 안으로 들어와 제 혀를 문질렀다. 율은 뒤늦게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는 기겁을 하며 이락을 밀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간 이락은 젖은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악당처럼 웃었다. 율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어찌할 줄을 몰라 눈만 끔뻑였다.

“방금, 왜, 혀를, 왜….”

“가자. 더 늦기 전에 네 동료를 용궁으로 보내 줘야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휙 돌아서 가는 그를 보면서도 율은 선뜻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쿵, 쿵, 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났다. 귀는 왜 이렇게 뜨겁지. 입맞춤이란 게 원래 이런 것인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던 율은 입 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조금 전 그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니야. 이것은 입맞춤이 아니야. 궁금증을 해결한 것뿐이다. 그러니 더는 생각하지 말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떨쳐 낸 뒤 이락의 뒤를 쫓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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