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방율은 따라 주는 술을 족족 마시더니 별거 아닌 것에도 실실 웃고 있었다. 왕태가 왕구를 툭, 쳤다. 그만 먹여. 애 잡겠어. 그러자 옆에 있던 여우가 더 주라며 왕구를 부추겼다.
“둬 봐.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 제법이야. 벌써 한 양동이를 혼자 비웠다니까.”
율이 딸꾹질하더니 히이- 눈을 접어 웃는다. 두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말짱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일어나 평상 아래로 내려가 걷기 시작하였다. 이것 보십시오. 말짱하지 않습니까.
갈지자로 걸으면서 넘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더니 기어코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기 직전 어디선가 나타난 이락이 팔을 붙들어 율을 일으켜 세웠다. 율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이락을 보다가 헤헤, 하고 웃어 버렸다.
“이락 니이임.”
이락은 인상을 쓰고 수하들을 쳐다봤다.
“얘 왜 이래?”
다들 움찔하여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희는 모릅니다. 방에서 나오더니 말릴 틈도 없이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때 율이 이락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이락 니임. 머리에 이거 너무 귀엽습니다.”
쫑긋 솟은 이락의 두 귀를 예고도 없이 만지려 하자 수하들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다. 손이 닿기 직전 이락이 잡아채 막았으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전에 어떤 놈이 겁도 없이 이락의 귀를 만지려 했다가 그 자리에서 손목이 날아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지 않은가. 다들 긴장하여 쳐다보는 와중에 왕구가 주춤거리고 일어섰다. 쥐방울을 내려다보는 이락의 시선이 살벌하다.
“형, 형님. 쥐방울이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런 거니까….”
우욱,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이 이락의 옷에 여태 먹은 술을 게워 낸다. 이락의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하나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기 시작하였다.
“저, 저는 가서 길목을 살펴 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 이만…. 김 판서댁에 밀린 물건값을 받아 와야 하는 걸 깜빡했습니다.”
각자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이락이 갑자기 율의 목덜미를 낚아챈다. 놓아주십시오! 율이 버둥거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물가로 향하기에 왕구와 왕태가 부리나케 쫓아왔다.
“형님 설마 우물에 던져 버릴 작정입니까?”
“참으십시오. 곧 용궁으로 돌아갈 녀석이 아닙니까.”
이락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우물 앞에 있는 대야에 율의 얼굴을 처박았다. 말리려던 왕구가 뻘쭘한 표정을 했다. 던지는 게 아니었구나. 그런데 율이 미동을 하지 않는다. 걱정되어 한 발 다가가는 순간 이락이 율의 얼굴을 끄집어낸다. 물속에서 막 나온 율은 너무도 평온하고 해맑아 보였다.
“헤헤.”
왕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자라라는 걸 새삼 깨닫고 있는데 이락의 살벌한 경고가 이어진다.
“한 번만 더 내 귀에 손댔다만 봐.”
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무엇 때문인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물이 그렁하여 울먹울먹한다. 그 귀여운 자태에 모여 있는 동물들은 잠시 넋을 놨고 이락의 얼굴에는 황당한 기색이 스쳤다. 그 순간 율이 이락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락 니임. 저 부탁이 있습니다. 제발 들어주세요. 네?”
하. 이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자 위험을 감지한 왕구가 나서서 말렸다.
“쥐방울. 그만하거라. 너는 방금 죽었다 살아났다. 큰형님 제가 어떻게든 떼어 놓을 테니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이쯤 되니 다들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그 난리를 쳤는데도 살려 둔 걸 보면 이락이 저 쥐방울을 죽일 마음이 없다는 건데. 여태 수하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이락에게 저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군 적은 없었기에 모두 다음 벌어질 일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이락이 기가 찬 얼굴로 떨구어 내려고 하자 율이 더 악착같이 붙든다.
“저를 그냥 용궁으로 보내 주세요. 네? 제발요! 거짓말하고 이락 님을 속인 것에 대한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락이 비열하게 웃으며 율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왜. 네 왕자마마가 혼인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율은 입을 꾹 다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근데, 어쩌지. 너의 왕자마마는 널 데려갈 생각이 없던데.”
눈물에 잠긴 갈색 눈동자가 요동쳤다.
“아닙니다. 분명 저를 데려가신다고 하였습니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다니.”
율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쏟기 직전이다.
“어째서… 이간질을 하십니까.”
“잘 들어.”
이락은 율의 귓가로 입술을 옮겼다.
“그자는 너를, 버렸다.”
율은 양 주먹을 꼭 쥐고 이락을 쏘아봤다. 이락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용왕이 죽을 때를 기다리며 널 이곳에 둘 거야.”
“거짓말 마십시오….”
“두고 보면 알겠지.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는.”
이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율은 팔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락은 돌아서서 자신의 방 쪽으로 향하였고 넋이 나가 있던 율은 옆에 있던 바가지를 힘껏 쥐었다.
이 거짓말쟁이! 누가 믿을 줄 알고!
휙, 날아간 바가지가 이락의 얼굴 옆으로 날아가자 수하들이 모두 입을 벌렸다. 이락은 돌아보거나 멈추지 않았고 율은 너무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결국에는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
부우- 부우- 숲에서 신기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율은 개울 앞에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아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봤다. 졸졸졸. 적막한 가운데 새소리와 물 흘러가는 소리만 들리니 심란하던 마음이 차츰 안정을 찾아 갔다.
낮에 술에 취하여 추태를 부린 게 뒤늦게 떠올라 게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진이 혼담을 넣었다는 말에 왜 그랬을까. 신하 된 도리로 기뻐해야 마땅하거늘. 난 아무래도 자격이 부족한가 보다.
[그자는 너를 버렸다.]
기진 마마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이틀마다 온다는 병사가 오늘 오지 않았으니 마음은 심란해졌다. 착오가 있거나, 용무가 바빠 하루 미뤄진 게 아니라면 어쩌지. 율은 혼란스럽고 괴로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봤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동그랗던 달이 지금은 귀퉁이가 잘려 나간 것처럼 크기가 줄어들었다. 육지에서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빈다고 했다. 달이 정말 소원을 이루어 주는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율은 빌고 싶은 소원이 많았다.
우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빌 것이다. 그다음은 아버지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빌 것이고, 선이에게 좋은 짝이 생기게 해 달라 빌 것이며, 다음은….
“하늘에 뭐가 있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율은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그러자 이락이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울고 있었어?”
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근데 왜 기운이 없을까. 아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써 보거라.”
율은 이락을 쳐다볼 수 없었다. 이락이 얄미운 건 둘째 치고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리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꼴을 보인 게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때 꼴깍꼴깍 소리가 들린다. 쳐다보니 이락이 주둥이가 긴 호리병을 입에 대고 마시는 중이었다.
율이 쳐다보자 이락이 그것을 건넨다.
“주랴?”
“싫습니다…. 술은 두 번 다시 입에 대지 않을 것입니다.”
“주정뱅이들이 그 말을 많이 한다던데.”
주저하던 율은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아까는… 죄송하였습니다.”
이락이 귀를 들이밀었다.
“뭐라 하였어? 소리가 작아 안 들린다.”
율은 눈을 흘기고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제가 취해서 실언하였습니다…. 보는 눈도 많은데, 이락 님께 그런 추태를 부려 죄송합니다.”
“잘못은 인정하니 받아 주마.”
이락은 장죽을 입에 물고 치익,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곧 장죽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한 모금 빨더니 후, 하고 허공에 연기를 내뱉는다. 달빛이 내려앉은 이락의 얼굴은 수려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근사하였다.
율은 잠시 그의 용모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왜. 너도 피우고 싶으냐?”
율은 당황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게 뭐 좋을 게 있다고 피웁니까.”
“심신을 달래 주는 덴 효과가 있지. 한번 해 볼래?”
이락이 장죽을 내밀었고 율은 망설였다. 학당에 다닐 때 친우들과 몰래 궐련을 피운 적이 있었는데 향이 역하여 다시는 피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락이 피우는 것에서는 어쩐지 다른 향이 났다. 고민하고 있으니 이락이 율의 입에다 장죽 끝을 물려 준다.
얼결에 물자 이락이 조금 더 곁으로 붙어 앉는다.
“쭉 빨아서 삼켜 보아라.”
이락이 시키는 대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 목에 턱 걸린다. 율은 장죽을 치우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 댔다. 눈물이 고이고 목이 따갑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니 술을 마셨을 때처럼 힘이 풀리고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든다. 신기하여 이락을 쳐다보니 그가 싱긋 웃는다.
“어떠냐?”
“육지의 담배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해볼래?”
율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요령이 생기니 이번엔 처음보다 쉬웠다. 후, 하고 연기를 내뿜으니 시름이 덜어지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신기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흐흐. 하고 웃으니 이락이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기분이 좋아졌지?”
“예. 조금 몽롱한 것이…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이락이 한 번 더 권하길래 율은 장죽을 물려다 말고 이락의 얼굴을 쳐다봤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이락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붉은 빛을 띠는 듯하여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금 뒤로 물러나려 하니 이락이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고 율의 이목구비를 하나씩 뜯어본다. 눈동자가 갈색이구나. 코도, 입술도 딱 너처럼 생겼다. 너처럼이란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데 숨결이 뺨에 닿아 간지럽다.
평소 같으면 기겁을 하고 밀어냈을 텐데 오늘은 이렇게 가까이 그의 체향을 맡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홀린 것마냥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락의 입술이 이제 거의 닿을락 말락 한 위치까지 왔다.
율은 멍한 얼굴로 입술을 벌린 채 얕은 숨만 내쉬었다. 이락이 고개를 기울여 율의 입술을 집어삼키려던 그때 갑자기 율은 정신이 돌아와 그의 입술을 손으로 급히 막았다.
“가, 가 보겠습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집 쪽으로 도망친다. 어이없이 쳐다보던 이락은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입술을 문지르는 그의 눈빛에 아쉬움과 약간의 분노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 열받게 하는 덴 아주 도가 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