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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6화 (26/102)
  • 26화

    낮부터 처음 보는 손님이 방문하였다. 그들은 인간이었는데 둘은 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왔고 하나는 검은 옷을 입고 칼을 찬 자였다. 안면이 있는지 왕태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이락의 방으로 안내한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율은 왕구에게 물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이화 상단에서 왔다.”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상단이야. 저자는 주로 부녀자들의 사치품을 담당하고 있지.”

    “한데 이곳은 어쩐 일로 온 겁니까.”

    “글쎄. 오늘은 거래 날도 아닌데 왜 왔는지 모르겠다. 형님이 기생들한테 비녀나 노리개를 사줄 분은 아니고….”

    그 말에 율이 궁금하여 물었다.

    “이락 님은 여인들에게 인색하신가 봅니다.”

    “그게 아니라, 육지에서 남녀 사이에 비녀를 건네는 것은 혼인하고 싶단 뜻이다. 내가 지켜본 큰형님은 금화나 보석을 줄지언정, 마음은 내주지 않을 분이거든.”

    “아….”

    때마침 왕태가 이리 와서 술이나 마시라고 부른다. 마당 한쪽에 놓인 평상에는 낮부터 모인 이락의 수하들로 들썩였다. 그들 역시 오늘 아침 도착하였는데 커다란 수레엔 궤짝과 가죽, 비단, 곡식으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들을 돈을 주고 사지 않았다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놈 봤지? 내가 걷어차기도 전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던 거.”

    “웃기는 소리 하네. 네놈이 아니라 나를 보고 도망친 거겠지.”

    “그만 싸워. 아무렴 어때.”

    율은 왕구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얌전히 전만 집어 먹었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율에게 잔을 내밀었다. 사내는 수인인 것 같았는데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한 잔 받으시오.”

    “괜, 괜찮습니다. 저는 술을 잘 못 하여서…”

    그러자 왕구가 술병을 빼앗아 대신 따라 주려 한다.

    “빼지 말고 받아라.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어째서요…?”

    “아침부터 크게 한 건 하였으니 기분이 좋지.”

    율은 구석에 잔뜩 쌓인 물건들을 바라봤다. 정말 도적질을 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술도 주막에서 먹던 것과는 달랐다. 노란빛을 띤 술은 담긴 도자기마저도 고급스러웠다. 율이 그것을 쳐다보자 왕구가 술병을 흔들었다.

    “이게 고관대작들이 즐기는 약용주다. 어서 먹어 봐라.”

    율은 목소리를 낮춰 왕구에게 물었다.

    “혹시 이것들을 약탈하신 겁니까?”

    “에헤이. 약탈이라니.”

    “그럼요…?”

    “알아서 놓고 가던데?”

    율은 할 말을 잃었다. 이 귀한 것들을 그냥 놓고 갔을 리가….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화적 떼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니 영 내키질 않는다. 술을 받지 않으니 왕구가 에잇, 하고는 술을 직접 따라 율에게 쥐여 준다.

    “마셔 봐. 몸에 진짜 좋다.”

    “저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왕구가 입에다 술을 대 준다. 알싸한 액체가 입술을 적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거절하려고 하는데 막무가내로 들이민다. 율은 하는 수 없이 한 잔을 비웠다. 쌉싸름하면서도 풍미가 좋았다. 궁에 처음 들어갔을 때 용왕께서 직접 연회를 베풀고 술을 하사하신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하였다.

    “어떠냐? 좋지?”

    “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쁜 짓입니다. 차마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다들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아닌가. 게다가 율은 이미 거짓으로 토끼를 속였으니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왕구는 한 잔을 더 따라 줬다.

    “어린 것이 왜 자꾸 한숨이야. 너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닙니다….”

    “그럼 더 마셔라. 술은 시름을 잊게 해 준다. 네가 고민하는 것들을 싹 없애 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주막에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취했을 때는 정말 세상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율은 무심코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런 기분으로 술을 마셨을까. 모두 잊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폐인이 되어 버렸나. 가족을 모두 잊고 싶어서? 아니 어쩌면 나만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만… 없었더라면….

    기분이 울적해진 율은 왕구가 따라 주는 족족 술을 들이켰다.

    “이야, 잘 마시는구나.”

    그러자 건너편 왕태가 말린다.

    “왕구야. 쥐방울 술 먹이지 마라. 전에 큰형님 등에다 구역질한 거 기억 안 나?”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여우가 놀라서 끼어들었다.

    “뭐? 저 어린 것이 큰형님 등에 구역질을 했어? 그런데도 살아 있단 말이야?”

    “그것뿐이야. 온천에도 데려가셨대. 우리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하시면서.”

    “이런 섭섭하군.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먼저 챙기셔야지.”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드는 바람에 율은 민망하여 어찌할 줄은 몰랐다.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을 하려고 해도 다들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다. 듣고 있던 왕구가 대신하여 나섰다.

    “이 모자란 놈들아.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이 어린 것을 시기하냐. 큰형님이 그렇게 가르쳤어? 너희는 여기 있는 쥐방울이 얼마나 재주가 많은지 모르지? 비록 며칠 뒤면 용궁으로 떠나겠지만, 나는 쥐방울이 우리 가족으로 남아 줬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왜냐. 우리 중에 이만큼 똘똘한 놈이 없거든. 생각해 봐라. 여기서 글자 읽고 쓸 줄 아는 놈이 하나라도 있는지.”

    다들 뻘쭘한지 딴청을 피운다.

    “아니면 다친 다리를 치료할 줄 아는 놈은? 없지? 니들은 그래서 안 돼. 큰형님이 그렇게 짐승은 배워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가르치면 뭐 하냐. 어휴, 할 줄 아는 건 도적질하고 씹질 밖에 없는 놈들.”

    왕구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평상에 탁 내려놨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내일부터 글자라는 것을 제대로 배워 보려고 한다. 어떠냐 쥐방울. 네가 나의 스승님이 되어 주는 것이.”

    율이 당황하여 왕구를 쳐다봤다. 예?

    “싫으냐?”

    왕구가 귀를 축 아래로 접었기에 율은 입만 벙긋거렸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거기다 나는 며칠 뒤면 떠나야 하는데…. 집안일도 하라 하고, 음식도 만들라 하고, 이젠 글공부까지….

    좋게 거절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락이 얼굴을 내민다.

    “쥐방울. 잠깐 들어와.”

    아, 살았다. 율은 재빨리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떠들썩하던 마당이 조용해지고 다들 율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숙덕거린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 쥐방울을 부르시다니. 설마 상단에 팔아넘기시려는 건 아니야? 에이, 설마. 형님 몰라? 모르긴 너무 잘 아니까 그렇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잖아. 하긴 육지에서는 자라가 귀하긴 하지.

    율은 흠칫하여 뒤를 돌아봤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운다. 설마 아니겠지. 마루로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이락이 보료에 앉아 있고 맞은편에 상단에서 왔다는 남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한쪽에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그들 사이에는 커다란 궤가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엔 진귀한 보석과 장신구들이 많았다. 율은 어디 앉아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이락이 손짓하는 곳에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았다. 이락이 눈으로 궤짝을 가리켰다.

    “비녀 중에 괜찮은 게 있어?”

    “예…?”

    곰곰이 생각하던 율은 가슴이 덜컥하였다. 아까 왕구가 뭐라 하였더라. 육지에서 비녀는 연정을 고백할 때 쓰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싶으면서도 그간의 일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니 마음이 살짝 불안해진다.

    율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이락이 저를 지그시 보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어째서….”

    “뭐?”

    “언제부터….”

    “…….”

    “그러니까… 언제부터 저를….”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락의 눈초리가 올라간다. 율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싫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하지만… 저는… 상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헛소리 그만하고 네 왕자마마한테 보낼 비녀나 골라.”

    율이 기겁하며 이락을 쳐다봤다.

    “설마… 기진 마마께 반하신 겁니까?”

    이락의 표정을 보니 살벌하다. 율은 자신의 추측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어째서 비녀를 고르라는 거지. 기진에게 비녀를 준다. 왜? 그러다 율은 문득 엊그제를 떠올렸다. 둘이 들어가서 한참 대화를 했었지.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 틀림없다. 비녀는 청혼할 때 준다고 하였으니, 그럼 혹시….

    율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마마께서….”

    “네 마마가 남해 용궁에 혼담을 넣겠다더라.”

    “…….”

    “특별한 것을 부탁하길래 보내 준다 약조했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충분히 받아내겠지만.”

    저도 모르게 목이 콱 멨다. 기진 마마가 혼인한다니.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으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더군다나 용왕께서 병환으로 정신이 없는데 남해에 혼담을 넣겠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니… 달리 생각하면 지금이 기회일 수 있다. 용왕이 깨어나면 화는 내겠지만 만약 혼인이 성사된다면 기진에게도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그런데 내게 왜 아무 말씀도 없으셨을까….

    하긴….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시야가 뿌옇게 변하였고 율은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다.

    “네가 오래 보았으니 그자를 잘 알 것 아니냐.”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 둘이 막역한 사이 아니었나.”

    “그럴 리가요….”

    율은 어금니를 꾹 물고서 바닥만 노려봤다. 안다고 생각하였는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끝끝내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비녀도 고를 수 없었다. 이락이 그런 율을 빤히 보다가 자신이 직접 물건을 고른다. 율은 그저 가만히 앉아 이락이 어서 내보내 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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