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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5화 (25/102)

25화

율은 빨랫줄에 젖은 옷들을 널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왔더니 피로가 싹 가셔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아침에 치료해 준 왕방울은 정신이 돌아와 끼니로 미음을 먹고 있었다.

율이 집을 나선 뒤 왕태가 의원을 데려왔는데, 누구의 솜씨인지 모르지만, 치료를 잘해 주었다면서 칭찬을 했다고 한다. 내심 뿌듯한 마음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집 안을 대충 청소한 율은 이제 저녁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그러자 왕구가 따라 들어왔다.

“쥐방울. 피곤한데 쉬어라. 저녁은 왕태 형님과 내가 한다.”

“아닙니다. 온천에 다녀왔더니 몸이 한결 가볍습니다.”

“온천에? 형님이 너를 온천에 데려갔단 말이냐?”

“예….”

“이상하다….”

“뭐가 말입니까?”

“형님은 늘 혼자서 온천에 다니는데. 누가 가고 싶다고 해도 절대 데려가는 법이 없는 분이다.”

“아….”

“아무래도 형님이 네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에이, 설마요…. 아닐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보기엔 넌 어딜 가든 예쁨받을 녀석이다. 귀여운데 싹싹하고 손재주도 좋잖아. 내가 형님이어도 네가 예뻐 죽을 것 같은데?”

왕구의 칭찬에 율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괜히 마음이 살랑살랑 간지러운 것 같아 얼른 쌀을 바가지에 담아 우물가로 뛰어갔다. 쌀을 씻고 남은 물로는 솥에다 국을 끓이려 된장을 풀었다. 육지의 채소는 바다의 것과 생김새는 비슷하였으나 맛은 매우 달랐다. 바다의 채소는 대부분 짠 편이었고 육지의 채소는 싱거웠다.

도마 위에서 그것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있는데 이번엔 왕태가 들어와 율을 유심히 살핀다. 왕구와 달리 왕태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조금은 어색했다. 율은 괜히 눈치가 보여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후후, 불씨에 입바람을 불어 넣었다.

“너는 언제쯤 용궁으로 갈 예정이야?”

그들은 율이 왜 이곳에 남아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형님인 이락의 고환을 얻으려 남았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니 나를 살려 두기는 할까. 율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이락 님께서 주기로 한 것이 있어 그것을 받기 전까지 머무를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데?”

“이락 님께… 여쭤보십시오….”

“어차피 형님은 말해 주지 않을 거다. 비밀이 많은 분이라.”

왕태가 옆으로 와서 앉으며 율을 슬그머니 밀어낸다. 비켜 봐라. 불은 그렇게 붙이는 게 아니다. 그러더니 후, 후, 크게 바람을 불어 넣자 금세 불길이 치솟아 아궁이 밖으로 삐져나온다. 율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고 왕태가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

“어떠냐. 내 불붙이는 솜씨가.”

율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와. 대단하십니다….”

“자고로 사내란 입 힘이 좋아야 한다.”

이락은 허리가 튼튼해야 한다더니 왕태는 입 힘이 좋아야 한단다.

“입이요…?”

“그래야 잘 빨 수 있거든. 윗입이든 아랫입이든.”

율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고 왕태는 답답하다며 혀를 내밀어 날름날름했다. 이거, 말이다. 이거. 율은 그 해괴한 짓에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자 왕태가 율의 어깨에 턱, 팔을 걸치며 물었다.

“너 말이야, 아직 숫총각이지?”

율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니 그 얼굴로 뭐가 부족하여 그러고 사는 거냐. 혹시, … 아랫도리가 부실하냐?”

율은 당황하였다. 아랫도리가 부실한지 아닌지 써먹지도 않았는데 어찌 안단 말인가.

“몸이 약해는 보인다만 그것까지 부실할 줄이야….”

“…….”

“좋다. 내가 선심을 쓰마. 부실한 양물을 강철로 만드는 법을 알려 줄까 하는데 어떠냐.”

율은 그의 팔을 거둬 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밥을 하는 것이 먼저라….”

왕태는 들은 척도 않고 그릇 두 개를 꺼내 물을 떴다.

“자 봐라. 우선 이렇게 뜨거운 물과 찬물을 두 개 준비해.”

율은 궁금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라고 말을 할 용기도 없었다.

“처음엔 좆을 찬물에 담근다. 그다음엔 뜨거운 물에 담그면 돼. 이걸 수없이 반복하면,”

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뜨거운 물에 담그면 껍질이 까지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까질 껍질이면 애초에 없는 게 낫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왕태는 물 두 개를 떠 놓고는 정말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설명하였다. 손가락 하나를 마치 좆처럼 세워서는 여기에 넣었다가 저기에 넣기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단련을 하다 보면 좆의 감각이 무뎌지고 씹질의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거야. 알겠어?”

모르겠다고 하면 더 떠들 것 같아 율은 얼른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잘 들었습니다. 때가 되면 요긴하게 써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태가 뿌듯하게 웃으며 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뭘 써먹어?”

나른한 음성에 율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서 이락이 팔짱을 끼고 기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천을 다녀오더니 한숨 푹 잔 모양이다. 헝클어진 옷을 추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는 부엌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하하, 형님. 제가 쥐방울에게 진정한 사내가 되는 법을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이락이 들은 척도 않고 국자를 들더니 끓고 있는 솥에서 국물을 떠서 맛을 본다. 이윽고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국자를 왕태에게 떠넘기며 일갈했다.

“왕태야.”

“예, 형님.”

“좆질말고, 간 맞추는 법을 가르쳐라.”

“왜요.”

“짜.”

“예?”

“짜다고.”

율은 서둘러 간을 보다가 윽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일부러 된장과 소금을 많이 넣었는데 그것이 화근인 것 같았다.

“얼, 얼른 간을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락이 이리 오라며 손을 까닥인다. 율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가까이 갔고 이락은 율의 얼굴에 묻은 검불을 떼어 냈다.

“칠칠맞지 못하기는.”

아, 율이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동시에 왕태가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얼굴을 이락에게 내밀었다. 형님 저도…. 그러자 이락이 홱 돌아서는 부엌을 나가 버린다. 왕태는 당황하는 법도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봤느냐. 우리 형님이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으시다.”

“…….”

율은 간을 맞춘 뒤 다시 아궁이에 나무를 넣었다. 한번 붙기 시작한 불은 활활 잘도 타올랐다. 율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왕태는 옆에서 나무를 부러트렸다.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두툼한 나무도 단번에 잘랐다. 율은 그를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됩니까?”

“뭔데?”

“세분은 언제 처음 만나셨습니까…?”

음… 왕태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율은 그가 말을 할 때까지 가만히 불쏘시개로 아궁이 속 나무들을 건드렸다. 불티가 허공에 날아오르자 그것을 보던 왕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 우리 부족이 인간들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왕구와 나를 장독 안에 숨겨 뒀는데, 시간이 흘러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죽은 뒤였지.”

아, 율은 왕태에게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습니다.”

“뭐, 다 지난 이야기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한겨울이었는데… 눈이 펑펑 쏟아져 앞이 보이지도 않았어. 먹을 것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이 우리 형제가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던 순간에 집채만 한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호랑이요…?”

“그래. 녀석도 며칠 굶었는지 우리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려들더구나.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태어나서 그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고, 산에는 먹을 게 없었거든. 정말 죽는구나 싶었는데, 그때 호랑이를 막아선 자가 있었다.”

“그게… 이락 님입니까?”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지 뭐야. 상상이나 했겠냐. 토끼가 호랑이를. 거기다 부족도 없이 혼자서.”

“그래서요?”

“단번의 일격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히길래 나는 확신했다. 이자를 따라가면 배는 곯지 않겠구나. 내 부모처럼 개죽음은 당하지 않겠구나.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렀고 여기 금산에 터를 잡은 거란다.”

“그럼 이락 님은… 그때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습니까?”

왕태가 뜻밖의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형님은 왜 그대로지?”

율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쩌잔 건지.

“시도 때도 없이 산삼을 드셔서 그런가.”

“산삼이요…?”

“그래. 엄청 좋아하신다. 이 금산에 나는 삼은 모두 큰형님 배 속으로 들어갔을걸.”

들을수록 율은 이락의 존재에 대하여 더 궁금해졌다. 정말 100년도 넘게 살고 있단 말인가. 수인의 평균 수명은 인간과 흡사하나 동물마다 다르긴 하였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토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이락의 모습은 말이 안 된다.

복잡한 표정의 율과는 달리 왕태는 굳건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그날 결심했다. 큰형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기로. 누굴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리고, 나더러 죽으라면 열 번, 아니 백 번, 천 번도 죽겠다고 다짐하였지.”

“예….”

“그러니 행여,”

왕태가 말을 멈췄고 불꽃을 바라보던 율의 시선은 그를 향했다.

“우리 형님한테 해코지라도 할 생각이라면 당장 용궁으로 돌아가. 아니면 내가 먼저 너를 해칠 수도 있으니.”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야 하는데 꼬챙이로 꿴 것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심각한 율과는 달리 왕태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물론 네가 그럴 배짱이 있는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왕태는 국의 간을 보더니 이젠 된 것 같다며, 창고에서 술을 가져올 테니 밥 먹을 준비하자고 부엌을 나섰다. 율은 그가 사라진 문을 응시하였다.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함이 가시질 않는다. 실제로 이락이 위험에 빠진다면 그들은 언제든 율을 벨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친근하던 왕구마저 무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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