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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4화 (24/102)
  • 24화

    살려 주십시오. 저는 먹기 싫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빽 소리를 지른 율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에는 이락이 한심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율은 흙바닥에 누워 팔을 휘젓는 중이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벌떡 일어나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있던 여우와 안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너무나 쨍하고 맑은 날씨에 율은 혼란스러웠다.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것입니까?”

    멍청한 얼굴로 묻는 율을 보며 이락이 코웃음을 치더니 율의 볼을 있는 힘껏 꼬집어 잡아당겼다. 악! 저도 모르게 이락의 손을 떼어 내고 보니 뺨이 얼얼하다. 율은 뺨을 감싸고는 울먹울먹하여 이락을 쳐다봤다.

    “아픕니다….”

    “아직도 꿈 같아?”

    “아니요….”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꼬집을 필요까진 없지 않습니까…. 율은 우는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뺨을 문지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고민하던 갈림길 앞이다. 정말 무언가에 홀린 것인가.

    “산보를 나갔다더니 왜 이곳에서 자고 있어?”

    “자던 것이 아니라….”

    “거짓말 마라. 침까지 흘렸잖아.”

    예? 율은 서둘러 입가를 닦았다. 하지만 침을 흘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락이 저를 놀렸음을 깨닫고는 아주 잠깐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봤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도포가 다 흙으로 범벅이다. 율이 도포 자락을 털자 흙먼지가 풀풀 날린다.

    “어지러워서 연못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더 좋은 곳을 데려갔을 텐데.”

    “좋은 곳이요?”

    “온천.”

    온천이란 말에 율은 반색하고 이락의 곁으로 다가갔다.

    “방금 온천이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여기서 멀지 않다.”

    “아침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번거롭지만 네가 원하면 한 번 더 가마.”

    내가 원하면…. 늘 다른 사람의 뜻대로 움직였지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율은 기분이 이상해져 괜히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 이락이 먼저 앞장서 걷길래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온천은 연못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는데 한참을 걷다 보니 신기한 나무가 보였다. 줄기가 온통 흰색으로 칠해 놓은 것 같아 율은 넋을 놓고 쳐다봤다.

    “이 나무는 이름이 뭡니까….”

    “자작나무다.”

    “너무 근사합니다….”

    감탄하며 손으로 줄기를 더듬어 만졌다. 길게 쭉 뻗은 나무의 끝이 마치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율은 눈을 감고 줄기를 감싼 채 냄새를 맡았다. 좋다. 숲의 냄새다. 눈을 뜨고 보니 이락이 풀숲으로 막 들어가는 중이다. 율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다다른 곳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났다. 크기는 작은 연못과 비슷하였는데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둘레에는 커다란 돌들을 쌓았고 주위로 예쁜 꽃과 나무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근처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멋들어진 정자까지….

    “와….”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율은 온천으로 가서 물속에 손을 넣었다. 뜨끈뜨끈하다. 불이 없이도 물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온천이라는 것을 이야기로만 들었지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손을 넣어 기분 좋게 휘휘 젓는데 이락이 정자로 올라가서는 장죽을 꺼내 든다.

    “난 여기서 쉴 테니, 푹 담그고 나오너라.”

    “그,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율은 갓을 벗고 도포의 끈을 풀었다. 그러다 이락을 힐긋 돌아봐다. 그는 장죽을 입에 물고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포를 벗으려던 율은 주춤하였다. 시선이 느껴지니 옷을 벗는 게 영 께름칙했다.

    “뭐 해.”

    “다, 다른 곳을 보시면 안 됩니까.”

    “왜.”

    “창피합니다….”

    이락이 혀를 쯧 찼다. 까탈스럽기는. 그는 곧 방향을 틀어 율을 등지더니 정자에 한쪽 팔을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허공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율은 조금 안도한 마음으로 도포와 저고리, 바지 등을 벗어 옆에다 잘 개어 놓았다.

    속곳만 입은 채로 천천히 발끝을 온천물에 밀어 넣었다. 뜨겁다. 발부터 서서히 담그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곳에 앉아 있으니 물이 가슴까지 차오른다. 육지의 생활로 인해 묵직해진 팔다리가 나른해졌다.

    한 칸 내려가니 이번엔 목까지 잠긴다.

    “아 살 것 같다.”

    율은 입을 헤 벌리고 눈이 풀려 목만 내어놓았다. 너무 좋다. 온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구나. 이런 곳에 가족들과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걸….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니 눈동자에 그리움이 스친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으니 잠이 몰려왔다. 이락이 무얼 하나 궁금하여 돌아봤더니 그는 정자에 신선처럼 늘어져 있었다.

    “이락 님?”

    이락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고 율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제가 알기로… 이런 온천은 나라의 왕이 휴양처로 삼는다 들었습니다….”

    “어째서 미천한 놈이 사용하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미천한 놈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별거 없다. 아주 오래전 인간의 왕에게 선물로 받았어.”

    선물이란 말보다 오래전이란 말이 더 율의 호기심을 사로잡는다. 주막 남자의 말로는 여든이 넘은 자신의 모친 또한 젊은 시절 이락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 않았는가. 율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

    “저 궁금한 것이 또 있습니다.”

    “물어봐.”

    “이락 님은 나이가… 어찌 되십니까….”

    그 말에 이락이 눈동자를 굴렸다. 글쎄. 내 나이가 올해 몇이더라.

    “백 세가 넘은 것은 아니겠지요?”

    “왜. 넘었으면 노인네 취급하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르신으로 공경을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르신이란 말에 이락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정자 난간을 뛰어넘어 바닥으로 풀썩 내려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서 장죽을 물고 율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는다.

    “콜록콜록.”

    “어차피 태어났다 소멸하는 건 다 똑같아. 몇 년을 더 사는 게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그… 그래도요….”

    “그러는 넌 몇 살인데?”

    “저요…?”

    이락이 웃었다.

    “스물은 넘었겠고.”

    “올해 스물입니다.”

    움찔. 이락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

    “이래 봬도 제가 최연소 소과 합격잡니다. 헤헤.”

    해맑게 웃는 율을 보며 이락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 생각보다 더 핏덩이였군.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물에 젖은 속곳 사이로 율의 뽀얀 살갗이 드문드문 비친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뺨 또한 불그스름하게 익어 복숭아 같았다.

    율은 한 번 더 헤헤, 웃었으나 이락이 웃질 않자 얼른 시선을 피한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락은 몸을 움직여 율의 바로 뒤로 가서 앉았다. 율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돌아보자 이락이 손을 뻗어 율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저도 모르게 움츠리자 손끝이 어깨를 쓸며 목을 향해 움직인다.

    “아…!”

    피하려고 하니 이번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쥔다.

    “가만히 있어 보아라.”

    여차하면 목을 부러트릴 기세라 율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구워 먹는다더니 목을 졸라 죽일 셈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율의 목을 꾹꾹 주무른다. 늘 뻐근하고 아프던 목의 통증이 사라졌고 처음 느껴 보는 시원함에 율은 차마 그만하라고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뒤에서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한가 보지?”

    “…….”

    “어린 것이 책만 읽어서 그런지 어깨와 목이 단단히 뭉쳤구나. 여기, 이쪽 혈을 눌러 주면 더 시원하다. 어때?”

    손이 아래로 내려와 어깨와 날갯죽지 사이의 옴폭 팬 것을 은근히 문질렀다. 아아, 율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바로 귀가 빨개졌다. 더불어 몸이 더 노곤하고 나른해졌다.

    “그, 그만하십시오….”

    “시원해?”

    “시원은 하지만….”

    이번엔 척추를 따라 내려가던 손길이 허리에 도달한다.

    “너 허리도 자주 아프지?”

    율이 놀라서 살짝 돌아봤다.

    “그건 어찌 아십니까?”

    “뻔하지. 책에만 파묻혀 사니 멀쩡할 리가 있나. 평소 잘 때 쥐가 나지는 않고?”

    “그건 또 어찌 아십니까? 맞습니다. 가끔 다리까지 저릴 때도 있습니다.”

    “쯧쯧. 젊은 게 벌써 골병이 들었네. 무릇 수컷이란 여기. 여기, 힘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구실을 하지.”

    여기. 그리고 여기 말이다. 손으로 허리와 엉덩이 경계를 더듬길래 율은 움찔하였다. 혈 자리를 눌러 준다더니 손길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황급히 일어섰다.

    “이제 됐습니다!”

    이락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온다. 율은 뒤늦게 자신의 속곳이 젖어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여 목까지 빨개져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얼굴만 내밀었다. 그러자 이락이 묘한 표정으로 웃는다.

    “이제 몸이 좀 나아진 거 같으냐?”

    “예….”

    “그럼 나와라.”

    “왜, 왜요?”

    긴장하여 물으니 이락이 한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서 네가 할 집안일이 태산이다.”

    아. 율은 머쓱해져 고개를 끄덕인 뒤 눈짓을 했다.

    “그럼 나가서 옷을 갈아입을 테니 저어기 멀리 떨어져 돌아 계십시오.”

    “왜. 내가 네 알몸에 발정이라도 할까 봐 그래?”

    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워 그럽니다….”

    그래라, 그럼. 더 놀려 먹을 줄 알았는데 이락은 순순히 숲을 향해 돌아섰다. 그 틈에 율은 재빨리 밖으로 나와 부리나케 젖은 속적삼을 벗고 봇짐에서 새 적삼을 꺼내 입었다. 저고리, 바지, 도포까지 챙겨 입은 다음에는 젖은 속곳을 짜서 탁탁 털고는 이락을 불렀다.

    “이제 됐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이락이 오면서 바위 위에 올려둔 율의 갓을 챙긴다. 아, 율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락은 그것을 직접 씌워 주고는 끈을 매 주었다. 거절하기도 뭣하여 율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무심한 손길과는 달리 이락은 갓의 끝을 예쁜 모양으로 마무리하고는 고개를 기울여 율의 안색을 살피더니 웃었다.

    “보기 좋다. 그새 얼굴이 폈구나.”

    별말 아닌데도 율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 이락 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니 그가 먼저 돌아서 저만치 가고 있다. 율은 괜히 달아오른 뺨을 한번 문지르고는 이락의 뒤를 냉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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