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음, 맛이 기가 막힌다.”
왕구는 율이 조금 전 건넨 화전을 먹고 있었다. 어제 딴 진달래로 화전을 만들어 간장에 살짝 찍어 먹으니 제법 맛이 났다. 율도 하나 입에 쏙 넣었다. 꽃을 먹으니 내가 마치 꽃이 된 기분이었다.
“형님. 쥐방울이 재주가 많아요. 부러진 다리도 고치고, 음식도 잘하고.”
“칭찬 감사합니다…. 이락 님은 어떠세요? 입에 맞으십니까?”
이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아. 당분간 음식도 쥐방울이 하면 되겠다.”
그 말에 율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어째서 일이 점점 늘어나는 거지?
“제가요…?”
“나한테 신세 진 게 많지 않으냐. 갚는다며.”
“하, 하지만 저는… 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걸요….”
“누가 아예 살라더냐. 돌아갈 때까지만이다.”
돌아갈 때까지…. 그건 이락이 말한 고환을 받는 날이겠지. 열흘의 말미를 주었는데 집에서 고환은커녕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율은 이곳에서 볼모로 잡혀 괜한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율은 사발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충분히 마셔 주고 있었으나 갈증과 함께 어지럼증은 더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눈으로 이락을 찾았다. 그는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락이 없는 틈을 타 율은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왕구 형님. 저는 산보를 다녀오겠습니다…. 집 안에만 있으니 갑갑하여서요….”
왕구가 다녀오라고 손짓을 하였고 율은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대나무숲이 보인다. 얼마 전 율을 겁먹게 했던 혼백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기대하고 집 앞 개울에 도착하였으나 물이 너무 얕아 몸을 담그는 것은 불가능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율은 이락과 함께 갔던 연못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서둘러 가면 될 것 같았다.
아무리 훤한 대낮이어도 숲은 해가 잘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머릿속으로 외워 둔 길을 따라가는데 작은 동물들이 낯선 자의 방문에 얼굴을 내밀고 쳐다본다. 나무 사이에 앉아 있던 새들도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걸음을 서두르던 율은 두 갈래의 길 앞에서 멈춰 섰다.
“분명 왼쪽으로 갔어.”
주저 없이 왼쪽을 선택하여 걸어가는데 이상하게도 또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율은 당황했다. 어라? 갈림길 두 번이나 있었나. 율은 냉큼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조금 전 걸어왔던 길 위에 하얀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놀라고 당황하여 앞을 보니 자신이 가야 할 길마저 똑같은 형국이 됐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깨비의 장난인가. 아니면 귀신의 짓인가.
율은 두려운 마음에 앞뒤를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보시오…. 거기 아무도 안 계시오? 짐승이면 모습을 드러내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시오…. 달달 떨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던 그때 안개 속에서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저벅, 저벅. 반대로 율은 주춤하여 뒤로 물러섰다. 겁을 먹고 도망치려던 그때 안개 속에서 누군가 확 튀어나온다. 검은색 두루마기에 은발의 긴 머리를 늘어트린 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뿜어내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율은 기겁하여 뒤로 넘어갔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리 가시오!”
눈만 보이던 사내가 부채를 천천히 아래로 내리는 순간 율은 할 말을 잃었다. 키나 풍채로 보면 분명 사내인데, 얼굴의 생김새로 보면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용궁 어디에서도 저렇게 수려한 외모는 본 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로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데 사내가 천천히 몸을 굽혀 율의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본다.
“생각보단 평범하네.”
씩 웃는데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율은 기겁하였다.
“잡아먹지 마십시오! 저, 저는 맛이 없습니다!”
요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살짝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저에겐 아픈 어머니와 어린 누이가 있습니다! 살려 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 해 보아라.”
율은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살려 줄 테니 아, 하라고.”
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육지에서 만난 이들은 아, 하라고 하면 입에 꼭 뭘 넣던데. 혹여 자신을 해칠까 싶어 율은 입을 읍, 다물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자 요괴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간 빼 먹는다.”
간?
붉은 눈에, 은발의 머리. 요상한 기운까지….
머릿속에서 스쳐 가는 인물이 하나 떠올랐다.
“구미호!”
빽 소리를 지르니 요괴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제법이다. 용궁에서 온 촌뜨기라길래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더니.”
“진짜… 구미호입니까?”
율의 눈동자엔 두려움과 동시에 다른 감정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걸 알아챈 무령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확히는 천호다. 천년을 넘게 살았거든. 근데 넌 어디서 내 존재를 들었느냐?. 혹시 이락이 그 새끼가 내 욕을 하디?”
욱해서 묻는 구미호에게 율은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책에서 봤습니다…. 근데 이락 님을 아십니까…?”
“뭐. 안면만 트고 지내는 사이랄까.”
아, 율은 속으로 감탄하였다. 이락은 산신령과도 친분이 있고, 구미호와도 친분이 있다니. 알면 알수록 대단한 자가 아닌가. 잠시 이락을 생각하고 있는데 무령이 얼굴을 더 들이민다.
“책에는 내가 뭐라고 나와 있어?”
율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여우가 백 년을 살 때마다 꼬리가 하나씩 늘어나고,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면 구미호, 그 이상 살면 천호라 하여 신과 같은 존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뛰어난 미모로 사람을 홀리며, 그 미모에 빠진 자는 벗어날 수 없다고….”
“직접 보니 어때?”
“예?”
“내 미모 말이다.”
율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대답하였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 눈이 머는 줄 알았습니다….”
무령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손짓을 했다.
“민망하게 뭘 그렇게까지 치켜세워. 그리고 또? 나에 대해서 아는 걸 모두 말해 봐라.”
율은 머릿속에서 서책의 구절을 꺼냈다. [은혜를 갚을 줄 알며 칭찬을 좋아한다. 다만 거만하고 변덕이 심하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잔인하게 변한다.]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심성이 고운 좋은 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육지와 달리 용궁에는 내 칭송만 자자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용궁에 갔을 때 그냥 정체를 밝히는 건데. 그렇다면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게 아닌가. 뒤늦게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런 미련은 접어 두기로 했다. 지금은 이 앞에 있는 순진한 자라를 구워삶는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래, 너의 칭찬을 잘 들었다. 다 끝난 거 같으니 이제 입을 벌려라.”
“…….”
율이 다시 버티자 무령은 조금 짜증을 냈다.
“선물을 주려고 한다.”
“제게 주시는 선물이니 무엇인지는 알고 받고 싶습니다….”
음, 무령이 잠시 생각하더니 들고 있던 구슬을 보여 준다. 그것은 다채로운 빛을 내며 신기하게 반짝였다. 하지만 화려한 색을 가진 식물일수록 독이 있을 확률이 높다. 이 구슬 또한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차마 입이 벌어지질 않는다.
율은 얼른 말을 돌렸다.
“이것은… 여우 구슬인가요?”
“그럴 리가.”
“하긴. 천호의 구슬은 영롱한 푸른빛을 띤다 들었습니다.”
“별걸 다 아는구나. 그것을 나는 입 안에 늘 품고 다니지.”
“와, 정말입니까?”
눈을 크게 뜨고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더니 무령이 코웃음을 쳤다. 보여 주랴? 라고 묻길래 율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러자 무령이 입을 벌린다. 그의 말대로 영롱한 빛깔의 구슬이 입 안쪽에서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을 홀릴 듯한 빛깔에 율은 진심으로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어찌 이렇게 아름다운 빛을 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제 됐지? 그럼 너도 아, 벌리거라.”
“근데….”
“또, 뭐. 왜.”
“제가 소피가 마려워 그러는데, 잠시 다녀와서 먹어도 될까요?”
무령의 눈빛이 스산하게 바뀐다.
“너 보기보다 아주 깜찍하구나.”
“예?”
“아까부터 자꾸 질문을 던지면서 내 일을 방해하고 있지 않느냐.”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어서 입을 벌리지 못해? 아니면 네 배를 갈라 직접 구슬을 넣겠다.”
협박에 율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싫습니다…. 선물은 받는 이가 거절하면 그만 아닙니까.”
구미호의 눈빛이 흉포하게 변하였고 율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입을 암팡지게 다물고 버텼다. 어서 입을 벌려. 입을 벌려. 벌려. 벌려! 신기하게도 머릿속에서 구미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율은 끝끝내 입을 벌리지 않았다. 이에 구미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라. 내 최면이 통하질 않네?”
“방금 그것이… 최면이었습니까?”
“시끄럽고. 안 되겠다. 강제로 먹이는 수밖에.”
구미호가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율은 입을 손으로 막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으며 몸부림쳤다. 싫습니다. 절대 안 먹을 겁니다. 절대요. 저는 용궁에 무사히 돌아가야 합니다! 어서 입을 벌리지 못해. 어서 벌리래도. 진짜 네 배를 갈라야 말을 들을 것이냐!
무시무시한 협박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쥐방울.]
어디선가 이락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락 님! 하고 부르는 순간 여우가 율의 입에 구슬을 쑥 집어넣는다. 켁, 켁, 그것을 토해 내려 하였으나 구슬은 기다렸다는 듯 미끄러져 몸 안으로 흡수됐다.
어떻게든 토해 내려 손가락을 입에 넣었으나 소용없었다. 먹었구나. 먹어 버렸어. 깔깔깔깔 요사스럽게 웃는 여우의 목소리와 함께 온몸이 타는 듯 괴로워 율은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다 끝내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