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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2화 (22/102)

22화

잠에서 깬 율은 몸을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서는데 머리가 핑 돈다. 또다. 그날도 이렇게 어지럽고, 시야가 흐릿해지다 기절을 했었지. 율은 의복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왔다.

우선 급한 대로 우물에 가서 물을 퍼 꿀꺽꿀꺽 삼켰다. 조금 나아지긴 하였으나 어지럼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근처 물가에 가서 몸을 적실 요량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데 저 멀리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커다란 덩치와 옷차림새로 보아 왕구 같았는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낯선 자를 업고 온 왕구는 힘든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쥐방울. 왜 여기 있는 거야? 형님하고 같이 떠난 게 아니었어?”

율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의 대장인 토끼를 데려다 고환을 떼려 했으니 면목이 없었다. 아무리 왕구가 제게 호의적이라지만 사실을 알면 등껍질이 아닌 율을 불에 구워 버릴지도 모른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꽤 아파 보이는데.”

“이놈은 왕방울. 이름은 따로 있는데 부른지 오래라 기억이 안 난다.”

왕방울이라… 생김새로 보면 쥐가 맞는 거 같은데, 어째서 쥐방울이 아니라 왕방울일까.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왕구가 그를 마루에 눕힌다. 왕방울이 아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친다. 다리가 꺾인 것으로 보아 부러진 듯했다. 왕구가 마른 목을 축이는 사이 율은 누워 있는 환자의 상태를 살피었다.

“다리가 어째서 부러진 것입니까?”

“계곡에서 선녀들을 훔쳐보다 걸려서 그 지경이 됐지 뭐냐.”

선녀란 말에 율은 깜짝 놀랐다. 선녀란 무릇 천계에 머무는 여인들이 아닌가.

“선녀들이 이곳에 옵니까?”

“저기 금산 끝자락에 선녀탕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그믐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거든. 간혹 훔쳐보는 놈들이 있는데, 그러다 걸리면 선녀들이 몽둥이로 뒈지게 패서 반병신을 만들어 놓는다. 바로 이놈처럼.”

아아. 율은 그제야 쥐의 다리가 왜 너덜너덜해졌는지 이해가 됐다. 맞을 만한 짓을 하였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나. 그런데 왕구가 다리를 치료할 생각은 않고 이리저리 살펴보기만 하고 있다.

“어찌하여 치료를 안 하십니까…?”

“왕태 형님이 의원을 데리러 갔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어디서 정신 줄을 놓고 계집질을 하는 건지.”

“그럼 이락 님께 부탁을….”

율은 이락의 방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락의 방 툇돌에 있어야 할 신이 사라지고 없다. 자는 줄 알았는데 외출을 하였나 보다.

“오늘 온천을 가시는 날이다.”

“온천이요? 이 근방에 온천이 있습니까?”

“그래 형님이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멀지 않아. 그 뜨끈한 물에 담그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왕구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율은 놀랍기만 했다. 말로만 들었지 온천이란 것을 직접 보진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만 떠들고 내 다리나 어찌 해 봐!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단 말이다!”

빽 비명을 지르는 왕방울을 보고 율은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에 제일 끝 방이 들어왔다. 율은 왕구를 불렀다.

“왕구 님.”

“형님이라 부르래도. 정 없게 왕구 님이 뭐냐.”

“예, 형님. 혹시 빳빳한 나무를 구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나무는 뭣에 쓰게?”

“일단 부러진 다리를 고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잠시 의원 일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직접 하는 건 처음이지만, 급한 대로 저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구가 알겠다며 후다닥 뛰어나갔다. 율은 마루로 올라가 약재를 넣어 둔 방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주인의 허락 없이 뒤지는 게 마음에 걸렸으나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율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이게 다 뭐야.

남루한 외관과는 달리 진귀한 물건이 한가득하다. 통행세를 걷고, 양반들의 물건을 약탈한다고 하더니 그것이 참이었나.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약재가 보이지 않는다. 선반 아래 바구니가 있길래 그것을 살피던 율의 눈에 상자 하나가 들어온다.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상자는 열어 본 지 오래된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뚜껑의 안쪽에 거울이 있다. 아, 약재가 아니구나. 뚜껑을 덮으려는 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린다.

[잠깐만.]

율은 화들짝 놀라 방을 둘러봤다. 이락이 돌아온 건가. 하지만 말소리가 들린 건 자신이 조금 전 뚜껑을 덮은 경대였다. 율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이 또 헛것을 보고 듣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어서 밖에 있는 쥐를 치료해 주고 물에 가서 몸을 담가야지.

경대를 집어 넣던 율은 그 위에서 다른 상자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열자 헝겊과 가위 그리고 연고들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율은 일단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서둘러 방에서 나오는데 왕구가 벌써 곧은 나뭇가지를 여러 개 구해다 놨다.

“이 정도면 되겠어?”

예. 충분합니다. 율은 환자를 똑바로 눕힌 뒤 가위로 바지 밑단을 길게 찢었다. 눈앞에 드러난 상처는 더 참혹했다. 대체 무엇으로 두드려 패면 이렇게까지 뭉개질 수가 있지. 이걸 내가 손대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마을까지 데려가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율은 하는 수 없이 다리를 손으로 잡았다.

“형님. 이분이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아 주십시오.”

“오냐. 내가 힘쓰는 건 자신 있다.”

그러더니 환자가 몸을 들썩이지 못하도록 꽉 잡는다. 그런데 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압박하여 숨을 쉬지 못하게 하니 왕방울이 캑캑거리고 몸을 들썩인다. 형님 그렇게 세게 잡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를 말리자 왕구가 조금 힘을 뺀다.

율이 부러진 다리를 맞추자 환자가 자지러지며 소리를 지른다.

“아악! 하지 마라. 만지지 마! 나 죽는다! 나 죽어!”

“미안합니다. 조금 참아 보십시오.”

율이 진땀을 빼며 다리를 맞추는 동안 환자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연신 내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실신한다. 율은 급히 손끝을 환자의 코에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져 안도하며 이마에 땀을 닦아 냈다.

“잠시 혼절한 모양입니다….”

왕구가 가져온 나무를 다리에 대고는 연고를 살펴봤다. 전에 이락이 제게 발라 주던 그 냄새 고약한 연고에는 가죽 ‘피’ 자가 적혀 있었고 옆에 다른 약통에는 뼈 ‘골’ 자가 적혀 있다. 율은 ‘골’ 자가 적힌 약통을 열어 연고를 손에 덜어 냈다. 저번보다 냄새가 더 고약하였다. 생선이 수십 일 동안 썩어도 이런 냄새는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것을 환부에 바른 뒤 헝겊으로 감기 시작했다. 다 감고 나니 몸에 기운이 쏙 빠져나가는 듯하다. 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왕구는 곁으로 다가와 엄지를 치켜들었다.

“쥐방울 제법이다?”

율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급히 처방은 하였으나 의원께 꼭 보이셔야 합니다.”

“알았다. 그런데 손은 어서 닦고 오는 게 좋겠다. 냄새가 이렇게 고약해서야 원.”

율은 수긍하였다. 마음이 급해 약을 바르긴 하였는데 냄새가 지독해도 이리 지독할 수가 없다. 서둘러 우물에 가서 손을 씻었는데도 여전히 냄새가 나는 듯하다. 돌을 집어 손바닥을 박박 문지른 다음 다시 맡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오니 왕구가 환자의 바지를 벗기려 하고 있었다. 율은 의아하여 물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이놈이 얼마나 아팠는지 오줌을 지렸다. 내가 갈아입힐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아라.”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너덜너덜해진 바지를 바로 벗겨 버린다. 순간 율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속곳을 입지 않은 건지 적나라하게 양물이 드러났는데 더 놀라운 것은 고환의 크기였다. 율은 기겁하여 힉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그러자 왕구가 옷을 입히며 키득거리고 웃는다.

“이놈이 왜 왕방울인지 알겠냐?”

듣고 보니 영 그렇다. 고환이 커서 왕방울이면… 나는 왜 쥐방울이지. 율은 저도 모르게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방울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작지는 않은 거 같은데. 하지만 따진다고 하여도 아무도 제 말을 들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옷을 다 입힌 기미가 보이기에 율은 돌아서서 왕구에게 갔다.

“왕구 형님, 제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육지에 사는 수인은 보통 고환이 몇 갭니까?”

엥? 왕구가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을 했다.

“불알 말하는 게냐?”

“예….”

“불알은 두 쪽이지.”

“왕구 형님도요?”

“그렇지. 나도 두 쪽. 왕태 형님도 두 쪽. 여기 이, 왕방울도 두 쪽.”

“역시….”

“왜. 너는 달라?”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본인의 고환이 세 개라 하여, 제가 믿기지 않아 형님께 여쭤본 것입니다.”

“하하, 어떤 돌대가리 새끼가 그딴 소릴 해?”

율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혹시 그 돌대, 아니. 이락 님 고환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큰형님? 글쎄다. 양물은 얼핏 봤긴 한데…. 아, 너 큰형님 양물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저는 이락 님의 양물이 궁금한 것이 아니오라….”

“다리 사이에 팔뚝만 한 게 매달려 있는데 그걸로 좆질을 하잖아. 그러면 계집들이 다 자지러지며 나가떨어진다.”

“예… 하지만 저는 그분 양물보다는… 고환이 정확히 몇 개인지… 그것이….”

아, 큰형님! 율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기척도 없이 이락이 나타났다. 사립문으로 들어오는데 어젯밤보다 얼굴이 훤해진 걸 보니 온천물이 좋긴 좋은가 보다. 조금 전 대화를 들었을까 싶어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웃는데 이락이 와서는 환자의 상태를 살핀다. 왕구는 그가 다친 연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환자를 보던 이락이 돌아서서 율을 찾았다.

“제법 그럴듯하게 치료를 했네?”

“형님. 말도 마십시오. 쥐방울이 비리비리해 보여도 어찌나 야무진지 몰라요. 이참에 우리 식구로 받아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일단 찬성입니다.”

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 참 그리고 형님. 쥐방울이 형님 불알이 몇 갠지 궁금,”

으헉, 율은 황급히 왕구의 입을 틀어막았다. 왕구가 읍읍, 하고 눈동자로 율을 쳐다보자 율은 황급히 고개를 저어서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런데 이락이 성큼 율에게로 다가온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만들어졌고 한 뼘 거리에서 이락이 율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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