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율은 이락의 거처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집 주변으로 등들이 켜져 있었다. 용궁에서 온 병사들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이 근방에선 보기 드문 검은색 비단 도포를 두르고 온 이를 율은 한눈에 알아봤다.
“마마. 여기까진 어찌 오셨습니까.”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기진이 돌아본다. 그가 쓰고 있던 검은 갓 아래로 자수정 갓끈이 살랑 움직였다. 율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네 안부를 확인하러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병사를 보낸다고 하셨지, 직접 오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갈까?”
율은 귀 끝이 빨개져 입을 벙긋댔다. 그게 아니라…. 괜히 속내를 들킬 것 같아 고개를 얼른 떨구고는 좌우로 저었다.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직접 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을 마치자 기진이 싱긋 웃는다.
“먼저 떠난 네가 도착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하였다.”
“실은… 제가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다행히 인심 좋은 선비를 만나 하룻밤 신세를 지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귀신에 씌어 이락과 해괴한 짓을 벌인 거나, 호랑이한테 붙들려 갈 뻔한 건 말하지 않았다. 말해 봤자 걱정만 할 테고, 오해를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기진의 시선이 율의 어깨 너머로 이동한다.
“토 선생 오셨소.”
율은 뒤를 돌아보며 이락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보십시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기진 마마께서 병사를 보낼 거라 했지요. 병사를 보내다 뿐입니까. 직접 제 안위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이제 구워 먹는다고 하지 마십시오.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락이 피식 웃더니 율을 지나쳐 마루에 가서 턱 앉는다. 율은 부리나케 그에게로 갔다.
“이락 님…. 왕자마마께 예를 갖추십시오.”
이락이 일갈했다.
“착각하지 마. 여긴 육지고 이 숲에선 내가 왕이야.”
“그래도,”
기진이 됐다고 손짓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락의 시선이 잠시 기진의 얼굴에 닿았다가 조금 더 아래로 움직여 갓끈에 멈췄다.
“단순히 쥐방울 안부를 확인하러 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야.”
“별주부의 안위도 확인하고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물어볼 것?”
“단둘이 이야기했으면 하는데.”
율은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서운하였다. 저만 빼고 단둘이 할 이야기가 뭐람.
이락이 망설임 없이 방으로 앞장서 걸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들어가서 하지.”
기진이 율을 한번 쳐다보고 웃었고 곧 신을 벗어 두고는 마루로 올라간다. 그가 이락의 방으로 사라지고 나서 문이 닫혔다. 닫힌 문 너머로 두 개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율은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 툇돌에 올려진 기진의 신을 내려다봤다.
검은 신은 황금색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율은 조금 비뚤어진 신을 가지런히 정돈한 다음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으나 정확히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여 엉덩이가 슬금슬금 그쪽으로 옮겨 가려는데 병사 하나가 율을 보며 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율은 뜨끔하여 얼른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불현듯 봇짐에 넣어둔 자수정을 떠올렸다.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율은 부리나케 그것을 꺼내어 기진을 경호하는 수하의 봇짐에 옮겨 담았다.
“별주부. 이게 뭔가.”
“매우 중요한 겁니다. 용궁에 도착해서 꺼내십시오. 기진 마마께서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기진과 이락이 나온다. 훤칠하게 잘생긴 둘이 붙어 있으니 제법 그림이 됐다. 기진이 내려와 신을 신고서는 율에게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마쳤으니 나는 그만 가 봐야겠구나.”
율은 깜짝 놀랐다.
“길잡이도 없이 이 늦은 밤에 어찌 가려 하십니까. 주무시고 날이 밝으면 가시지요.”
이락이 기둥에 기대서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집주인은 나야. 왜 네 마음대로 자고 가래.”
율은 입을 삐죽 내밀고 시선을 피했다.
“용무가 바쁘다. 아침에 대신들과 회의가 있으니 빠질 수가 없어.”
회의란 말에 율은 눈을 크게 떴다. 용왕이 쓰러지고 나서 그것은 우의정인 가자미 대신이 주관하였고 기진이 참석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건 대신들이 그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였다는 뜻이기에 율은 감격스러워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애써 준 덕분이다.”
하지만…. 율은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기진이 완전히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용왕의 병이 나으려면 치료제가 있어야 하고, 치료제는 고환이라는데, 토끼는 약에 쓸 고환을 내줄 생각이 없지 아니한가.
“아 맞다.”
율은 봇짐에서 천에 싸인 것을 기진에게 건넸다. 기진이 그것을 펼쳐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무어냐.
“향을 맡아 보십시오.”
꽃에 코를 대더니 그의 입가에 꽃보다 더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좋구나….”
“오래전에 마마께서 제게 육지의 꽃이 궁금하다 하셨지요. 어떤 향기를 품는지, 어떤 자태를 띄는지….”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예. 이것이 제가 여기에 와서 맡은 꽃 중에 가장 인상적인 향이었습니다.”
그 말에 기진이 웃는다.
“고맙다. 율아. 나는 너한테 늘 받기만 하는구나.”
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마마께선 이미 제게 너무 많은 걸 해 주고 계십니다.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는 병환으로 반송장처럼 누워 지낸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점점 폐인이 되었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기진이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율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이가 아니던가.
“혹, 나에게 따로 부탁할 게 있느냐.”
“다른 건 아니라….”
율이 망설이자 기진이 느긋하게 기다린다.
“어머니께 육지의 약을 가져다드렸는데… 잘 드시는지 차도는 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래. 다음 병사를 보낼 땐 그 소식을 함께 들려주마.”
율은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붓을 보았는지.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선이는 학당에 잘 다니는지. 궁금한 것은 많았으나 돌아간다면 어차피 알게 될 일들이었다.
“그럼 가마. 잘 지내거라.”
기진이 율의 어깨를 토닥였고 율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가 병사들과 함께 집을 나섰고 율은 집 밖까지 따라 나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다행히 올 때와는 다르게 달이 얼굴을 드러내 가는 길목을 비춰 준다.
이대로 쫓아가고 싶다. 같이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하아. 한숨을 내쉰 율은 뒤를 돌아서다 화들짝 놀랐다. 이락이 바로 등 뒤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댔다.
“간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내가 준 꽃을 다른 놈한테 주다니.”
“아…혹시 제 선물이었습니까?”
“선물 같은 소리 하네.”
“…하하. 아닌 줄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너, 아카시아의 꽃말이 뭔지 알고 준 것이냐.”
“꽃말이요…? 그런 게… 있습니까?”
“몰랐군.”
율은 신기하여 들떠서 물어봤다.
“전혀 몰랐습니다. 꽃말이 뭡니까?”
이락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한다. 가까이 가자 은밀하게 속삭인다.
“숨겨 둔 사랑.”
율의 안색이 확 굳었다. 당황하여 고장 난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거짓말쟁이는 너고. 그러고선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간다. 율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갔다. 봇짐을 들어 챙기던 이락의 얼굴이 확 구겨졌고 율은 흠칫하여 뒷걸음질 쳤다. 이락이 봇짐을 위아래로 흔들더니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쥐방울.”
“원…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 것뿐입니다.”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에 도둑질을 해?”
도둑질은 자기가 했으면서….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화를 많이 낼 줄 알고 긴장하였는데 예상 밖으로 봇짐을 툭 던져 놓고 더는 뭐라고 하질 않는다. 그러다 이락은 마루 끝에서 흰 천을 발견하고 그것을 들어 펼쳤다.
“이건 왜 남겨 뒀어. 같이 주지 그랬느냐.”
율이 다가왔다. 이락이 펼쳐 든 것은 진달래꽃이었다.
“이것은 이락 님 겁니다. 내일 화전을 만들어 드리려 했습니다.”
“네가 아주 배은망덕한 놈은 아니구나.”
“헤헤….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요.”
이락도 덩달아 웃었다.
“설마 이 정도로 은혜를 갚으려 했어? 내가 목숨을 구해 준 것만 해도 몇 번인데.”
“저는… 이곳에 은혜를 갚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알아. 내 고환을 가지러 왔지. 그러니 더더욱 잘 보여야 할 게 아니냐. 그래야 내가 마음이 동해 고환을 냉큼 내어 주지.”
어차피 다 거짓말 아니었던가. 율은 가까스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이락이 제 목숨을 부지하고자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은 짐작이 가나 왜 저를 이곳에 끌고 왔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처음엔 해코지하기 위함인가 하였는데, 지켜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가려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잘 붙어 있어야 한다.
“뭐 해. 알아들었으면 얼른 들어가서 내 이부자리를 펴거라.”
“예?”
“내 말이 어려워? 다시 말해 주랴?”
얼른 들어가 이불을 펴라고 눈짓을 하길래 율은 얼결에 마루 위로 올라갔다. 물을 떠 놓는 것도 잊지 말라고, 방도 대충 치우라고 잔소리다. 어젯밤 지나가는 말로 수발들 몸종이나 시킨다고 하더니 진심이었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진달래를 챙기던 율은 문득 이락을 돌아봤다.
“이락 님….”
이락은 우물로 가 물을 긷고 있었다.
“왜.”
“그런데 이것도 꽃말이 있습니까?”
이락이 돌아본다. 율은 진달래를 내보이며 다시 물었다.
“이것은 꽃말이 뭡니까?”
“궁금해?”
“예….”
“맞춰 봐라.”
“음….”
“너하고 딱 어울리는 꽃말이다.”
율은 기대하여 눈을 반짝였다.
“단아한 선비…?”
하, 이락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뻔뻔하구나.”
“그, 그럼 대체 뭡니까?”
“머저리.”
율은 울컥하며 물었다.
“거짓말이지요…?”
그러나 이락은 대답이 없었다. 거짓말하신 거 다 압니다. 라고 물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율은 이락을 흘겨보고는 방으로 향했다. 나를 두고 머저리라니. 성질이 나서 일부러 발을 쿵쿵 구르다 문을 쾅 닫았는데 소리가 너무 크다. 율은 화들짝 놀라 문을 살포시 열고 얼굴을 내밀고 변명하였다.
“바, 바람에 문이 세게 닫혔습니다….”
여전히 이락은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민망해진 율은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