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백발의 꼬마 아이는 연못가에서 서성이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나무 옆에 세워 둔 도끼를 가져와 연못에 집어 던진다. 풍덩, 도끼가 가라앉으며 뽀글뽀글 수면 위로 물방울이 생겨나고 물속에서 산신령이 반쯤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꼬마가 던진 도끼가 들려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내 오침을 방해하는…!”
꼬마를 본 산신령이 한숨을 내쉬며 도끼를 연못 밖으로 홱 던졌다.
“무령.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아이는 천년을 넘게 산 구미호로 성별을 떠나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할 수 있었다. 저번엔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더니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아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단잠을 방해했다.
“심심해서 와 봤어. 요즘은 도끼 던지고 가는 놈들이 없나 봐?”
산신령은 헛웃음을 쳤다. 대체 어떤 놈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것인지 한참 동안 너나 할 것 없이 도끼를 가져와 연못에 던져 대는 통에 난리가 아니었다. 처음엔 좋게 타일러 보냈는데 나중에는 화가나 고함을 치고 엉덩이를 걷어찼다. 마음 같아선 저주를 퍼붓고 싶었으나 산의 신령이란 자가 함부로 목숨을 해하여서는 안 되기에 혼을 내주는 것으로 끝냈다.
“내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네.”
“뭘?”
“얼마 전 이락이 여길 다녀갔지? 누굴 데려왔던가?”
산신령은 물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숲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구미호다. 거짓으로 말을 한다고 하여 속을 자가 아니었다.
“탈진한 자라를 데려와 치료하고 갔다네.”
구미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흠, 진짜 보냈구나.”
“보내다니? 무슨 소린가?”
구미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가 용궁에 가서 장난을 좀 쳤거든.”
“장난?”
산신령은 작년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날 구미호는 사는 게 따분하다며, 바다 구경이나 하러 다녀올까, 했었다. 수년 전 방씨 성을 가진 자라가 뭍으로 잠시 올라왔고, 구미호에게 반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명환을 내어 줬다면서. 이참에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혹시 자네…?”
구미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생겼고 산신령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이락을 골탕 먹이려는 거면 그만두게. 언제까지 둘이 그렇게 지낼 건가. 이락이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게 자네 아니었나. 그럼 도와줘야지. 왜 훼방을 놓는 건가.”
훼방이라…. 구미호는 꽃 한 송이를 툭, 꺾어 귀에 꽂은 뒤 물에 다시 비췄다.
“물론 깔끔하게 사라져 주면야 고맙지.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놈 행동거지를 봐. 지은 죄를 씻어 내기는커녕 오히려 업보를 쌓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골탕이라도 먹여야 내 속이 풀리는 걸 어쩌겠어. 아니면 이참에 고환이 뜯겨 나가 불구가 되면 좋겠네. 그럼 그땐 내가 그놈을 예뻐해 줄 텐데.”
방정맞게 깔깔 웃는 구미호의 모습에 산신령은 고개를 저었다. 천년을 넘게 살아도 철딱서니 없는 건 여전하구먼. 이락이 괘씸한 건 사실이지만 고환을 뜯는다고 하니 그건 좀 불쌍해진다. 그놈이 내세울 게 잘난 얼굴과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참 그런데 그자는 어땠어?”
“누구?”
“자라 말이야. 특별할 것이 있어 보였나?”
구미호가 이락과 똑같은 걸 묻는다. 영안이 트이는 중이고 인물이 반반해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외모이긴 하였지만 특별할 것은 모르겠다. 그가 이락의 귀인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산신령은 내내 궁금하였던 것을 물어봤다.
“한데 자네 말이야. 그 예언이 사실이었나.”
“예언?”
“백 년 전 이락에게 말했잖나. 꽃피는 춘삼월에 귀인이 나타나 이락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거라고.”
구미호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그러다 기억이 났다며 싱긋 웃는다.
“그러고 보니 올해군.”
“참이었어? 혹시 자라가 귀인인가?”
“몰라. 근데 이건 하나 알고 있네.”
“뭘.”
“실은 귀인이 아니야.”
“그럼?”
구미호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궁금해진 산신령이 재촉했다. 말을 해 보게. 답답해 죽겠네. 늙은이 숨넘어가는 거 보려고 하나. 아, 미안. 나이로 따지면 자네가 나보다 더 늙었지. 가끔 얼굴만 보고 잊어버린다니까.
그 틈에 구미호는 서서히 어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얀 백발을 늘어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여우의 미모는 누구라도 홀리기에 충분했다. 구미호는 귀에 꽂고 있던 꽃을 빼 화르르 불태워 없애고는 햇살처럼 웃었다.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 하지만 두고 보면 알겠지. 그것이 인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는.”
***
푸드득, 하고 날아오르는 소리에 율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날은 저문 지 오래였고 숲엔 어둠이 찾아왔다. 달까지 구름 뒤로 숨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자 걷는 것이 더더욱 버거워졌다.
그러다 툭, 발에 무언가 채여 앞으로 고꾸라졌다. 벌써 몇 번짼가. 바닥을 손으로 더듬으며 일어서는데 이락이 팔을 잡아 준다. 저와 달리 이락은 어둠 속에서 길을 능숙하게 찾았다.
“나를 잡고 따라와.”
율은 머뭇거리다 이락의 소매 끝을 슬그머니 잡았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도 콰당 앞으로 넘어진다.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잠시 쉬었다 가려는 순간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들린다. 어어, 하고 놀라는 동시에 몸뚱이가 이락의 어깨 위에 짐짝처럼 걸쳐졌다.
당황한 율은 그를 말렸다.
“내, 내려 주십시오!”
“가만히 있어.”
“걸어갈 수 있습니다!”
팔다리를 버둥거리자 이락이 율의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졸지에 엉덩이를 맞은 율의 얼굴이 불에 덴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짓입니까! 하고 울먹울먹하니 이락이 대답한다.
“이대로 가면 내일 아침이나 도착할 것 같아서 그런다. 나는 숲에서 자고 싶지도 않고, 잘 생각도 없다. 자꾸 난리 치면 너만 던져 놓고 갈 테니 그런 줄 알아.”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락이라면 정말 던져 놓을 거다. 이 컴컴한 숲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고 싶진 않았다. 율은 반항을 멈추고 이락의 어깨에 얌전히 몸을 의지하였다. 성큼, 성큼,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걸음을 디디면서도 그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제가… 무겁지 않습니까?”
“쥐방울만 한 게 뭐가 무겁다고.”
“이락 님….”
“응.”
“사실 제 이름은 방울이 아닙니다. 따로 있습니다. 용궁에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쥐방울.”
“예….”
“거봐라. 네 이름이 쥐방울이고 아니고 무어냐.”
율은 당황하여 설명했다.
“아니,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긴 하였지만 제 이름은 쥐방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은,”
“어차피 구워 먹을 건데 이름이 뭐가 중요해.”
구워 먹는단 말에 율은 흠칫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정말 구워 드실 겁니까? 라고 물으니 이락이 그럼 거짓말이겠냐고 받아친다. 이쯤 되니 정말 걱정스러워졌다.
“저를 구워 드시면 안 됩니다…. 이락 님도 들으셨지요? 기진 마마께서 이틀마다 병사를 보내 저의 안위를 확인하겠다 하셨습니다.”
“그자는 병사를 보내지 않을 거다.”
“분명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믿지?”
율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하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곁에서 보아 왔습니다. 약조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해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단단히 씌었군. 내가 볼 땐 제 아비 자리나 노리는 간악한 놈으로 보이던데.”
간악하다는 말에 율은 울컥하였다.
“아닙니다! 그분은 이락 님과 다릅니다!”
“당연히 다르지. 나는 내가 나쁜 걸 인정한다. 한데 그자는 나쁜 놈인데도 착한 척을 하지 않느냐? 둘 중에 뭐가 더 나쁠까.”
율은 흥분하여 말이 빨라졌다.
“저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상관은 없으나 그분을 욕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락은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코를 베이지.”
율은 결국 폭발했다.
“야!”
“야?”
이락의 미간에 빗금이 쭉 생긴다. 율은 당황하여 입을 벙긋댔다. 아무리 화가 나기로 서니 야! 라고 하다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
“업어 주고, 구해 주고, 좆도 만지게 해 주니까 내가 아주 만만한 모양이구나.”
율은 의기소침해져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욱하여….”
진짜 던져 버릴까 조마조마하였는데 이락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은근히 성깔이 있다니까. 율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친우들조차 너는 배알도 없느냐고, 화도 낼 줄 모르냐고 늘 놀리던 게 방율이다. 그런 내가 친하지도 않은 자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이락과 엮이면 엮일수록 저도 몰랐던 성격이 튀어나와 깜짝깜짝 놀랐다.
“다 왔다.”
한참 걷고 나더니 이락이 율을 내려 줬다. 율은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꽤 오랜 시간 거꾸로 매달려 왔더니 피가 쏠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다음에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나서 이락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까 소리 지른 건 정말… 죄송합니다.”
“됐다. 나는 속 좁은 놈이 아니니 마음에 담지 말아라. 대신, 은혜를 갚는다고 했던 약속은 꼭 지켜. 약속마저 어기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으니 말이다.”
은혜란 말에 율은 갸웃했다.
“무슨… 은혜요?”
“또 내가 일일이 짚어 줘야 하느냐? 왈짜패한테 구해 줘, 귀신 씐 것도 구해 줘, 호랑이한테 물려갈 뻔한 것도 구해 줬지. 아, 산 아래부터 너를 업고 오느라 고생한 것도 포함시켜라.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이락이 곰곰이 생각하는데 율이 무엇을 발견하였는지 얼굴이 환해져 집 쪽으로 후다닥 뛰어간다. 하. 이락은 기가 찬 표정으로 멀어지는 율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던 이락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의 수하들이 있어야 할 집에 낯선 손님들이 눈에 띈다. 변복하였으나 그들이 용궁에서 온 자들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진이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