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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19화 (19/102)
  • 19화

    “이것은 보답으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 주십시오.”

    이락에게 받은 엽전을 건네자 선비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젓는다.

    “뭔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남는 방을 내어 드린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

    선비가 면포에 무언가를 싸서 내밀었다. 펼쳐 보니 밥을 뭉친 것이 두 덩이 들어 있었다.

    “금산까지는 꽤 먼 거리이니 허기지실 때 드시면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다니요.”

    율이 감동한 표정을 했다. 사실 이곳에 온 뒤로 인간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본 인간들의 모습은 좋은 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였으니.

    “덕분에 잘 묵고 갑니다.”

    “별말씀을요. 아, 근데 가는 길에 화적 떼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요즘 금산과 해달산 경계에 화적 떼가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는 터라….”

    “화적 떼요?”

    “예. 길목을 지키고 서서 재물을 빼앗고 목숨까지 앗아 가는 모양입니다. 저기 저분이 풍채가 좋은 것은 사실이나, 칼을 든 자들이 수십 명 덤빈다면 어떤 장사가 와도 당해 낼 재간이 없으니까요.”

    그야, 그렇지요. 율은 뒤를 돌아 출입구 앞에 서 있는 이락을 쳐다봤다. 아무리 이락이라고 해도 떼거리로 덤비는 걸 막을 도리는 없을 거다. 선비에게 알겠다고, 고맙다고 한 번 더 인사를 한 뒤 율은 이락에게로 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나눴어?”

    율은 그에게 주먹밥을 보여 줬다.

    “가면서 먹으라고 음식을 싸 주셨습니다. 아, 그리고 산 너머에 화적 떼가 나타난다고 하니 아무래도 날이 어둡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율이 주먹밥 하나를 이락에게 내밀었다.

    “드시겠습니까?”

    이락이 고개를 젓는다. 너나 먹거라. 율은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이락은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았다. 입이 짧은 건지 아니면 율이 없을 때 다른 걸 먹는 건지 모르겠으나 커다란 체격에 비교하면 먹는 양은 현저히 적었다.

    율은 주먹밥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다가 감탄했다.

    “신기합니다. 씹을수록 단맛이 납니다.”

    이락은 율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볼이 볼록 튀어나와 씹을 때마다 씰룩인다. 거기다 입술 옆에 밥알까지 묻히고. 다람쥐가 도토리를 입에 잔뜩 머금고 있는 것 같아 이락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샜다. 그러자 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이락이 손을 뻗어 입술로 가져가자 율은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 반응에 이락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뭐 하냐.”

    “갑, 갑자기 손을 뻗으시길래.”

    “쯧. 입에 묻은 밥알을 떼 주려고 했던 거다.”

    아. 율은 민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더듬어 밥알을 떼어 냈다. 어젯밤 일 때문에 그런지 이락이 곁으로 다가오기만 해도 긴장하고 경계하게 된다. 물론 귀신에 씌워 그랬다고는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손으로 이락의 양물을 막 주무르고 있었지. 벌써 두 번째다. 처음은 연못에서. 그리고 어젯밤….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어찌 같은 자의 양물을 두 번이나 만질 수 있단 말인가.

    율은 표정이 굳어 주먹밥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으….”

    “으?”

    서늘한 표정에 번쩍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러고선 이락과 조금 거리를 벌리고 나란히 걸었다. 이락은 이후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산길을 지나가는데 여러 색의 꽃들이 만발하여 피어났다. 노란색도 있고, 연분홍색도 있고. 율은 꽃이 신기하여 걸음을 멈추고 요리조리 살피며 냄새도 맡아 봤다.

    앞서 걷던 이락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기억력이 좋다며?”

    “말이 그렇지, 어찌 다 외우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살짝 투정을 부리는 말투에 이락이 선뜻 대답을 해 주었다.

    “진달래.”

    진달래… 이름이 귀엽구나. 율이 꽃을 관찰하는 사이 이락이 한마디 보탠다.

    “화전을 해서 먹기도 하고 생으로 먹기도 해.”

    먹을 수 있다니 신기하였다. 맛이 궁금하여 혀를 내밀어 살짝 꽃잎을 핥았다.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서 다시 혀를 내밀어 꽃을 핥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이락을 봤는데 미간이 구겨져 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누가 진달래를 그렇게 처먹어.”

    “아… 따서 먹는 거였습니까?”

    이락은 한숨을 쉬더니 돌아선다. 율은 조심스럽게 꽃잎을 하나 따 입에 넣었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돌아가면 화전을 부쳐 먹을 생각으로 꽃송이를 여러 개 따서 손수건에 감싸 봇짐에 넣었다. 그런데 이락이 보이질 않는다.

    이락 님? 이락 님!

    아무리 낮이라고 하나 숲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니 덜컥 겁이 났다. 율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락 님!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갑자기 위쪽에서 이락이 나타난다. 아후, 놀래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이락이 무언가를 가져와 건네준다.

    하얀 꽃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도 신기한데 더 놀라운 건 향기였다.

    그 어느 꽃보다 달콤하고 진한 향을 풍겨 냈다.

    “세상에… 이건 무엇입니까.”

    “아카시아.”

    먹어도 되느냐 묻고서는 꽃을 하나 입에 넣었다. 진달래보단 단맛이 강하다. 향도 좋고 맛도 좋구나. 하나 더 따서 입에 넣으려다 이락이 신경 쓰여 건네줬다. 드셔 보십시오. 이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린다.

    “아.”

    머뭇거리던 율은 그의 입에다 꽃을 쏙 집어넣었다. 이락이 씹더니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나 적게 먹는 것이 아니라 입이 짧은 거였다. 이 정도면 먹을 만한데 왜 그럴까. 율은 그것도 봇짐에 넣었다.

    신기한 것이 보일 때마다 챙겼더니 어느덧 봇짐이 불룩해졌다. 그때마다 이락은 별말 없이 기다렸다. 율은 그것이 참으로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락은 왕구나 왕태, 아니면 다른 동물들이 무언가를 할 때도 채근하거나 참견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반나절을 꼬박 산길을 걸었다. 다행히 해가 넘어가기 전에 금산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빨리 걸음을 서두르는데 바로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온다. 돌아보니 무언가 숲에서 움직인다. 율은 긴장하여 머리털이 쭈뼛 섰다. 선비가 말한 화적 떼인가.

    “이락 님….”

    앞서 걷던 이락 역시 기척을 느낀 듯하다. 율은 떨리는 손끝을 말아쥐었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거기다 뿜어내는 위압감은 처음 뭍에 올라와 정체 모를 짐승에게 습격당했을 때와 비슷하였다.

    “쥐방울. 뒤로 와.”

    저와 달리 이락은 태연자약하다. 율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있는 돌 하나를 쥐어 들고는 후다닥 이락에게 뛰어갔다. 그의 옆에 서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쳐다보는데 천천히 숲을 헤치고 그것이 정체를 드러낸다.

    “아…!”

    율은 숨이 턱 막혔다. 차라리 화적 떼가 나았을까. 육지에서 가장 강하다는 동물. 사람도 잡아먹는다는 동물. 인간들이 병사들을 조직하여 잡으러 다닐 만큼 위험하다는 동물.

    “호랑입니다….”

    얼마 전 구해 줬던 새끼 호랑이에 비하면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과장하여 집채만 하다고 말해야 할까. 덜덜 떨던 율이 두려움에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이락이 팔목을 붙들어 제지한다.

    “이곳을 지키는 산군이다.”

    “산군…이요?”

    “우리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 보내 줄 거야.”

    그의 말을 증명하듯 호랑이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온다. 쉬익, 쉬익, 숨을 내쉴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눈빛과 이빨은 당장에라도 목을 물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호랑이가 둘의 주위로 한 바퀴 빙 돈다. 꿰뚫듯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율은 금방이라도 바지에 소변을 지릴 것 같아 두려웠다. 탐색하듯 여러 번 주위를 맴돌던 호랑이가 갑자기 휙 하고 날아올라 위쪽으로 사라진다.

    어찌나 높이 뛰어오르는지 율은 놀라서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니 호랑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아. 어제는 귀신, 오늘은 호랑이. 이러다가는 바다로 돌아가기도 전에 제 명에 못 살고 죽겠구나.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 얼른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도무지 걷질 못하겠다.

    율은 양 주먹으로 허벅지를 팡팡 두드리고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잠시만, 잠시만, 숨을 돌리겠습니다.”

    이락은 이번에도 기다려 줬고 율은 호랑이가 사라진 곳을 한 번 더 확인하며 안도했다. 막상 눈앞에서 두려운 존재가 사라지니 뒤늦게 짜릿한 감정이 밀려든다. 그림 속에서만 보던 호랑이를 직접 눈앞에서 보다니. 그것도 산을 지키는 영물을.

    “도감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다릅니다. 새끼 호랑이는 귀여웠는데. 저 호랑이는 너무 무섭습니다.”

    살짝 들뜬 목소리로 얘길 하니 이락이 웃는다.

    “착한 이를 해치진 않아. 쟤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거든.”

    착한…. 율은 이락을 쳐다봤다. 둘 중에 착한 이가 있긴 할까. 하나는 토끼를 꾀어 용궁에 갔고 또 하나는 금산에서 악명 높은 토끼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락이 그렇다고 하니 믿고 싶어진다.

    그때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살랑 불어왔다. 바람과 함께 시원한 향이 묻어온다. 첫날 이락에게서 맡았던 그 향이다. 율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시 맡아도 좋구나. 내가 나무가 된 기분이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천천히 눈을 뜨니 이락이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율은 당황하여 바위에서 냉큼 내려왔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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