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방울전-17화 (17/102)
  • 17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온 율은 서책방에 들러 오래된 책들을 하나씩 살폈다. 어디에도 수인의 고환이 세 개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토끼의 꾐에 넘어간 게 분명하였으나 지금 다시 고한다고 하여도 기진의 마음을 돌리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도성 입구로 가는 동안 율은 여러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중간 아는 이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도 표정은 즐겁지 못하였다. 그렇게 입구 근처에 도착하니 저 멀리 이락과 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눈에 띈다. 율은 걸음을 서둘러 그곳으로 뛰어갔다.

    “벌써 나오신 겁니까?”

    이락의 시선이 숨을 몰아쉬는 율의 얼굴에 머문다. 율은 그가 무엇 때문에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룻밤 자고 나니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이마의 붓기가 눈까지 내려와 몰골이 흉하였다. 율은 갓을 조금 내려쓰고는 이락의 시선을 피했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밤새 설쳤다.”

    “저런… 불면증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니. 얻어맞은 뒤통수가 얼얼하여 잠이 오지 않더구나.”

    율은 할 말을 잃었다. 뒤통수를 때린 장본인이 바로 저이지 않은가. 머쓱하여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뒤늦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이… 이락 님도 저를 한 번 속이셨으니 서로 비긴 셈 치시지요….”

    하. 어이없어 웃는 이락을 보며 율은 얼른 말을 돌렸다.

    “저하고 다투실 시간이 없습니다…. 약효가 사라지기 전 육지로 가야 하니 어서 토끼로 변하십시오. 제가 품고 가겠습니다….”

    이락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그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라고?”

    율은 저도 모르게 툭 본심이 튀어나왔다.

    “수치스럽다니요. 얼마나 귀여웠는데요. 짧은 다리를 바둥거리는데, 아휴, 저는 그렇게 귀여운… 아….”

    이락이 대놓고 노려보길래 율은 입술을 꼭 말아 다물었다. 그럼 도성 밖으로 나가서 변하십시오. 율은 궁에서 나온 자들을 돌려보낸 뒤 이락과 함께 도성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이 있기에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이곳이면 괜찮으시겠습니까…?”

    “왜 그래?”

    “이곳도 아닙니까…? 더 멀리 갈까요?”

    “아니. 얼굴이 왜 그런지를 물었어.”

    역시 봤구나…. 율은 창피함에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락이 토끼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것만큼이나 아버지에게 얻어맞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집을 나오기 전 잠들어 있는 아버지의 머리맡에 붓을 두었다. 그가 붓을 쓸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제 집으로 가는 길에… 넘어졌습니다.”

    “얼마나 등신같이 넘어지면 그리되는 거지?”

    “…….”

    “누구한테 맞았어?”

    “아니요….”

    이락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고선 자신의 봇짐을 율에게 홱 던졌다. 율이 그것을 받았는데 꽤 묵직하다. 어어? 뭐가 이렇게 무겁지. 궁금하여 봇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보거라. 뭐가 있는지.”

    이락이 서슴없이 봇짐을 열어 보여 준다. 율은 별생각 없이 그것을 쳐다봤다. 기진이 선물로 금은보화를 주었거나 아니면 가는 동안 먹으라고 음식을 싸 줬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

    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눈을 떼지 못하자 이락이 완전히 꺼내어 보여 준다. 율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고 얼굴은 사색이 됐다.

    “이. 이것은!”

    이락이 뻔뻔하게 웃었다.

    “어떠냐. 마음에 들길래 집어왔다.”

    율은 너무 놀라 입만 벙긋댔다. 혹여나 하여 뒤를 돌아봤으나 경비병은 이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 어찌하여 이것을 가져오셨습니까.”

    기가 찼다. 이것은 용왕이 아끼는 자수정으로 수백 년 전 남해 사는 용왕이 친화의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들었다. 용왕이 매우 아끼는 것 중 하나로 침실에 놓고 매일 들여다보고 닦는다고 하였는데….

    “정말 큰일 나실 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후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후환은 네가 두려워해야지. 뭍으로 가면 내가 당장 구워 먹을 건데.”

    그의 협박이 들리지 않을 만큼 율은 흥분하였다.

    “당장 이것을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이락 님을 가만두지 않을,”

    순간 눈앞에서 이락이 토끼로 변한다. 율은 기가 차고 황당하여 그를 내려다봤다. 하아. 이를 어쩌지. 지금 가서 돌려놓는다고 하여도 괜한 분란만 생길 것이다. 그렇다고 이 귀한 것을 근처에 파묻고 가자니 그건 그것대로 내키지 않는다.

    율은 일단 그것을 봇짐에 챙겨 넣은 뒤 이락을 품에 고이 감싸 안으며 애원했다.

    “나중에라도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제발요. 약속하십시오….”

    하지만 토끼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못 들은 척 아예 눈까지 감아 버리길래 율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봇짐을 매고 뭍을 향해 헤엄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

    푸하, 물 밖으로 나온 율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운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처음 당도한 곳과 차이가 있었다. 제대로 헤엄쳤는데…. 근처를 살피는데 품에서 토끼가 꿈틀거리며 몸부림을 친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선 얼른 뒤를 돌아서서 먼 곳을 쳐다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락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긴 어디냐.”

    “이락 님도 모르시는 곳입니까?”

    “글쎄. 어두워 잘 보이질 않는구나.”

    아…. 율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중간에 살짝 바닷길이 헷갈려 머뭇거렸는데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들어왔나 보다.

    “다 입었으니 이제 돌아서거라.”

    율이 돌아보자 이락이 고름도 매지 않은 채 머리 위에 쫑긋 솟은 두 귀를 손으로 비틀어 짜며 욕을 내뱉었다. 이걸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귀찮아서 원.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젖은 머리도 털어서 말린다.

    “어째서… 젖으셨습니까?”

    “모르겠다. 약 기운이 떨어진 것인지 근처에 와서는 숨을 쉬는 것도 조금 힘들더구나.”

    율이 미안한 표정을 했다.

    “그럼 말씀을 하시지요….”

    “네 팔을 계속 두드렸는데 모른 체하더라.”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헤엄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이 주위가 천천히 밝아진다. 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에 가려졌던 달님의 얼굴이 드러났고 주위의 풍경 역시 처음보다 또렷하게 보였다. 율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락을 불렀다.

    “제가 잘못 온 거 같습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이락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일단 올라가자. 여기서 밤을 지새울 순 없으니.”

    예. 둘은 봇짐을 챙겨 언덕으로 올라갔다.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컴컴하다.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있는 길을 따라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민가가 나타나질 않고 죄다 울창한 나무뿐이었다.

    “아무래도 해달산에 온 거 같구나.”

    “해달산이요?”

    “금산과는 멀지 않지만 제대로 분간이 되려면 해가 떠야 알 수 있겠다. 오늘은 일단 묵을 곳을 찾아보자.”

    둘은 달빛을 친구 삼아 걸음을 서둘렀다. 자박, 자박, 조용한 가운데 여러 동물의 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낯선 소리들이 율에게는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겁을 먹은 율은 이락의 등 뒤에 바싹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락이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주시한다.

    “저기 집이 있습니다!”

    율은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가까이 가니 다행히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고 문에는 그림자가 어룽져 책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시오.”

    이락의 목소리를 듣고 곧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봤다. 누구십니까. 평범한 젊은 남자였는데 낡지만 단정한 옷차림에 상투를 튼 모습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