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율은 서늘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그림을 그리다 잠이 든 것 같은데. 내 팔다리가 왜 묶여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왕구를 비롯한 수인들이 저를 에워싸고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율은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왜, 왜들 이러십니까.”
“쥐방울! 감히 네가 우리를 속여?”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걸 풀고 얘기를 나누면서,”
“네가 우리 형님 불알을 떼러 왔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벼락같은 호통에 율은 사색이 됐다. 대, 대체 그걸 어떻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는 하얗게 질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동물들을 하나씩 쳐다보는데 다들 서슬 퍼런 눈빛으로 낫이며 칼을 들고 저를 노려보고 서 있다. 그때 동물들이 옆으로 갈라지며 이락이 나타났다. 이락은 저고리를 벗고 한 손에는 붓을 쥐고 있었다.
“널 위해 그림까지 그려 주었는데, 날 기만해?”
그가 그린 그림을 내밀었는데, 발로 그린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율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 이락 님!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시끄럽다! 감히 누굴 속이려고! 뭣들 해! 어서 쥐방울 옷을 벗겨라! 그리고 똑같이 고환을 잘라 내라!”
율은 기함하여 몸을 버둥거렸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데 바지가 슥 벗겨진다. 가랑이가 벌려진 채로 몸부림을 치자 이락이 앞으로 나서며 왕구의 칼을 낚아챈다.
“줘라. 내가 직접 자를 테니.”
이락이 붓이 아닌 칼을 쥐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엉엉,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칼날은 무참히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다리 사이에 꽂혔고 눈앞에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율은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애원하면 할수록 몸은 점점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제발… 제발…!”
버둥거리던 율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손가락 끝에 걸쳐 있었고 사방이 조용하다. 자신의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이던 율은 황급히 일어나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혹시나 몰라 가랑이를 손으로 더듬어 만지는데 있어야 할 것이 잘 붙어 있다.
아휴. 꿈이었구나. 십 년 감수했네. 가슴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의 눈에 저 멀리 그림 한 장이 들어온다. 그림을 그리는 걸 보다가 너무 졸려 눈을 감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대로 잠이 든 줄은 몰랐다.
자는 동안 내가 별말을 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율은 옷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아….”
어제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그림은 율의 얼굴과 매우 흡사했는데, 표정은 조금…. 왜 서책 방에서 본 춘화집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약에 취한 듯하기도 하고,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야하다고 느껴져 율은 입술을 말아 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이렇게 생기진 않았을 텐데….”
그림을 살포시 접어 옆으로 치우고는 옷매무새를 단장하고 밖으로 나왔다. 제일 먼저 자신의 껍질과 봇짐을 확인하고는 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어디에서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마당 한가운데 빈 술병과 타다 남은 나무뿐이었다.
“꽤 오래 잤구나.”
주위를 살피던 율은 마당 구석에 있는 우물로 가 물을 길어 올린 다음 갈증을 다스렸다. 그리고 남은 물로 세수를 하고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다음에는 집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그러다 작고 노란 꽃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쁘다…. 그것 말고도 담장을 따라 신기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들을 구경하며 걷던 율은 어느덧 뒤뜰 앞에 걸음이 멈췄다. 앞과는 달리 뒷마당에는 꽃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졌다.
무슨 꽃일까. 열매를 맺는 나무 같기도 한데….
코를 대고 향을 맡고 난 다음 꽃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용궁에도 꽃이 피어났으나 향기가 없었다. 그러나 육지의 꽃은 은은한 향이 났다. 그게 신기하여 다시 향을 맡다가 율은 저 멀리 숲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시커먼 옷을 입었고 체격은 왕구와 비슷했다. 혹시 왕구인가. 손을 흔들자 검은 형체가 좌우로 왔다 갔다 춤을 추듯 움직인다. 뭐야. 왕구 형님이 장난을 치는 건가. 다시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니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처음엔 정말 왕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율의 얼굴에선 미소가 차츰 사라졌다. 형체가 또렷해질수록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 보는 자였는데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양쪽 다리가 기이하게 구부러져 좌우로 뒤뚱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몸이 약해져 또 헛것을 보는 것인가.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앞을 보는데 한참을 떨어져 있던 남자가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다.
율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고 입을 틀어막았다. 자세히 보니 눈알이 파여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무슨 연유인지 열 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더는 다가오질 못한다. 율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귀신이란 소린데. 왜 내 눈에 귀신이 보이는 거지. 몸을 떨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는데 등 뒤로 무언가 닿는다. 동시에 율의 어깨에 손이 올라온다.
“네 냄새를 따라왔군.”
율은 뒤를 돌아 이락이 왔음을 확인했다. 어쩐지 그가 모습을 나타내니 안심이 된다.
“이락 님도… 저것이 보입니까?”
“가끔 나타나는 놈인데, 근처까지 온 건 처음이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지요?”
“지금은. 예전엔 사람이었겠지만.”
역시… 귀신이 맞았구나. 율은 자신이 귀신을 보는 것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도 간혹 귀신을 보는 자들이 있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육지의 기운이 자신의 무언가를 바꿔 놓은 것일까. 덜컥 겁이 난다. 앞으로 계속 귀신이 보이면 어떻게 하지. 율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락이 어깨를 잡아당긴다.
“가자. 저놈은 독종이라 엮여서 좋을 게 없어.”
그에게 이끌려 앞마당으로 온 순간 율은 다리가 풀려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을 내려다보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내가 귀신을 보다니. 왜… 대체 왜….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영안이 트이기 시작했다 하더군.”
“그 얘길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저를 치료해 줬던 의원입니까?”
“아니. 산신령이 말해 줬다.”
산신령이란 말에 율은 크게 놀랐다. 혹시 그 연못에 산신령이 산단 말인가. 율은 산신령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매우 인자하지만 선악을 구별할 줄 알며 상벌이 확실하다고 했다.
“산신령과 아는 사입니까…?”
“응.”
“혹시, 금도끼 이야기도 아십니까?”
“금도끼?”
“그분은 마음이 착한 사람에겐 은혜를 베풀고, 나쁜 사람에겐 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무꾼은 쇠도끼를 금도끼로 바꿔 줬답니다. 이락 님도 혹시 금도끼를 받으셨나요…?”
“…….”
“받지 못하셨군요….”
“…….”
“하긴….”
하긴? 이락의 눈초리가 위로 올라가기에 율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한편 점점 의문이 생긴다. 귀신도 보고, 산신령과도 알고 지낸단 말인가. 어쩌면 이락은 자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욱더 대단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런 자를 용궁에 데려가도 될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런 자의 고환이기에 효험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 이락이 율의 봇짐과 등껍질을 챙겨 툭 옆에다 놓아 준다.
“이것을 왜….”
“용궁에 갈 채비를 해야지.”
“예?”
“어제 말했잖아. 네 얼굴을 그리게 해 주면 용궁에 가겠다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뛸 듯이 기뻐야 하는데 어젯밤 꿈 때문인지 오히려 걱정스럽다.
“어째서 그런 얼굴이야. 막상 떠나려니 이곳에 아쉬움이 남아?”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선뜻 가신다고 하니 놀랐습니다….”
“나쁠 것 없잖아. 내게 준다던 보석도 얻고. 미인들도 많겠지. 물론 나는 착한 놈이 아니라 금도끼는 얻지 못하겠지만.”
율은 입만 벌려 어색하게 웃었다. 뒤끝이 있으시구나. 그리고 미인이라니…. 고환을 떼어 내고 나면 미인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다시 죄책감이 몰려온다.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그러나 지체했다간 이락의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짐을 챙겨 나서던 율은 뒤를 돌아 집을 한번 바라봤다. 이곳에 머문 건 며칠이지만 막상 떠나려니 기분이 묘해진다. 돌아올 일은 없겠지만, 용궁으로 가면 가끔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뭘 그리 쳐다봐?”
“아닙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미안한 마음은 그만 접어 두자.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이대로 용궁까지 이락을 안내하면 내 할 일은 거기서 끝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