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타닥, 타닥, 율은 마당 한가운데 놓여 있는 모닥불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이것이 육지의 불이로구나. 소리도 소리지만 불티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모양이 아름답다. 넋을 놓고 보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니 왕구가 목덜미를 잡아챈다.
“방울아. 얼굴도 구워 먹을 셈이야?”
“아! 저도 모르게 불빛에 홀렸나 봅니다.”
“홀려?”
“너무 아름다워 자꾸 보게 됩니다.”
“하하. 아름답다니. 너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무섭다니요…?”
“이렇게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순식간에 이 숲을 모두 없앨 수 있는 게 이 불이다. 너도, 나도! 흔적도 없이 태울 수 있는 것 또한 이 불이지.”
“아… 바다의 불과는 다르군요.”
“바다에도 불이 있어?”
“예. 이것과는 달리 파란색을 띠고 있습니다. 쉽게 번지지도 않고요.”
오호. 왕구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율은 바다의 불에 대하여 설명했다. 아주 먼 옛날, 4명의 용왕이 모여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에게 불을 달라 청하였다고 한다. 육지의 불은 바다에서 사용할 수 없으니 물속에서도 탈 수 있는 불을 내어 달라고. 당시 염라대왕은 불을 주는 대신 용왕의 딸들을 바치라고 명하였단다. 이에 용왕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딸들을 바쳐 불을 얻어 냈고 그것이 지금의 바다 불이 됐다.
듣고 있던 왕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딸들을 달라고 했대?”
“첩으로 삼으려고요.”
“니미, 욕심도 많은 양반이네.”
“거기다 성격도 아주 고약하다 들었습니다.”
“어우, 난 죽어도 염라대왕은 만나고 싶지 않아. 옥황상제라면 또 모를까.”
율이 웃었다. 저도요.
“둘이 무얼 그렇게 신나서 떠들어?”
어느덧 이락이 나타났고 율은 왕구와의 대화를 멈췄다. 새끼 호랑이를 묻어 주고 오는 내내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덕분에 복잡한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었다.
“바다의 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불?”
“바다에 불꽃이 푸른빛을 띤다고 하니 왕구 님이 신기해하셨습니다.”
왕구가 바로 껴들었다.
“님이라고 하지 말고, 형님이라고 해라.”
“그래도….”
“어허. 내가 나이가 한참 많지 않느냐. 형님이라고 해.”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왕구 형님.”
이락은 둘은 한심하게 봤고, 율은 이때다 싶어 이락의 곁으로 살짝 붙어 앉았다.
“이락 님은 바다의 불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참에 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또 왕구가 껴들었다.
“방울아. 그러지 말고 내가 가면 안 되냐? 나도 궁금하다!”
율이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데려가겠다는 말에 왕구는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반면 이락은 대답 대신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할 뿐이었다. 율은 불과 이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내키지 않으시면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오시면 됩니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긴 해?”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율은 소매 주머니를 뒤져 곱게 접은 광목을 꺼냈다. 그것을 펼치자 작은 알약이 나온다.
“이것은 구명환이라는 약입니다. 먹으면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물속에 사는 이가 먹으면 뭍에서 며칠은 버틸 수가 있습니다.”
“너도 그걸 먹어?”
“저는 자라라 약 없이도 가능합니다. 물론, 오늘처럼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미리 알았다면 먹었을 테고 이락의 품에 안겨 그런 꼴로 추태를 부리진 않았을 거다.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니 귀가 뜨거워진다. 불 때문에 더 그런듯하여 일부러 몸을 살짝 뒤로 하였다. 그런데도 홧홧함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손으로 얼굴에 피어오르는 열을 식히니 이락이 빤히 쳐다본다.
“뜨, 뜨거워서 그렇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예….”
그때 집 밖이 어수선해지더니 왕태를 비롯하여 여럿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커다란 술 항아리와 음식을 가져왔고 조용하던 산골 집은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를 띠었다. 그들 중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이락과 율의 가운데로 파고들며 콧소리를 냈다. 오라버니이.
덕분에 율은 옆으로 밀려나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여인이 와 율의 팔을 붙든다.
“어머나, 이분은 누구실까. 처음 보는 얼굴이네.”
율은 당황하여 여인의 팔을 슬그머니 빼냈다.
“저는 방율이라고 합니다….”
“율 선비님? 세상에, 어찌 이리 피부가 매끈하고 고우실까.”
율은 새삼 반가웠다. 이곳에 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아듣는 자는 처음이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낭자께서 더 아름다우십니다….”
“호호. 말씀도 참 예쁘게 하십니다. 그럼 우리 누가 더 부드러운지 한번 비교해 볼까요?”
여인이 자신의 뺨을 대고 문지르려 하기에 율은 얼굴이 빨개져 꽁무니를 뺐다.
다들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왜 어린 것을 놀려? 방울아. 이리와 앉아. 여기서 술이나 받아.”
“내 옆으로 오거라. 왕구는 술주정이 심하여 너를 때릴지도 몰라.”
서로 곁으로 오라고 난리다. 아무래도 저를 놀리는 듯하여 율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저는 피곤하여 먼저 쉬겠습니다. 재미있게들 노십시오.”
정신없이 들어와 보니 오늘 아침 눈을 뜬 곳과는 다른 방이다. 호롱불이 켜진 방에는 자개장이 있었고, 붉은 보료와 화려한 병풍 그 옆으로 서책과 그림을 그리다 만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여러 장 눈에 띄었다.
다른 이의 물건을 함부로 만질 수 없기에 율은 그것을 눈으로만 보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눈은 붉은색 보료에 가서 닿았다. 오래된 집과 어울리지 않는 세간들이다. 마음 같아선 보료에 누워 편하게 한숨 청하고 싶었으나 신세를 지는 객으로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율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길고 고단한 하루였다. 낮에 묻어 준 어린 짐승이 떠올라 마음이 뭉근하게 아려 온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일은 부디 이락의 마음이 바뀌어 용궁으로 함께 갈 수 있기를 소원하며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으응!]
야릇한 소리에 율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어딘가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밖에 있어야 할 이락이 보료 위에 앉아 바닥에 종이를 펼치고 붓질을 하는 게 아닌가.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신음이 들려온다.
[아으, 어때? 이 오라비의 좆물이 꿀같이 달지 않으냐.]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는 왕태의 것이었다. 좆물이라…. 좆이라면 몹시 나쁜 상황이란 뜻이 아니었나. 율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또다시 신음이 쏟아지더니 이어서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온다. 눈동자만 움직이던 율은 이락과 시선이 마주쳤다.
율은 당황하여 자리에 머뭇머뭇 일어나 앉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내 방이다.”
“아….”
율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죄송합니다…. 얼른 나가겠습니다.
“있어라. 오늘은 빈방이 없을 듯하니.”
그의 말을 증명하듯 여기저기서 신음이 들리고 난리다. 아아, 할 수만 있다면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란한 저와는 달리 이락은 이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뭘… 하십니까?”
“그림을 그리는 중이야.”
설마 하였는데 정말 그림을 그리고 있었구나. 율은 신기하여 무릎으로 기어가 그의 곁에 가까이 갔다. 붓을 쥔 손 모양하며 자세가 여느 양반집 도령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려하다. 아무렇게나 옷고름을 매는 사내에게 의외의 면이었다.
율은 그의 자태를 눈에 담았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떠냐. 내 그림이.”
“아….”
이게… 뭘 그런 거지? 동그란 것에 점이 세 개라….
“혹시… 떡입니까?”
“떡이라니. 이건 왕구 얼굴이다.”
이락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다. 율은 당혹스러워 재빨리 시선을 피하였다. 신선 같은 자태로 그림은 참 개떡같이 그려 놨구나. 아니, 이게 어딜 봐서 왕구 형님 얼굴이란 말인가. 발에 밟힌 떡이지.
율은 입을 달싹였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멋, 멋지십니다. 왕구 형님하고 똑 닮았습니다.”
“진심이야?”
“예….”
“너도 하나 그려 줄까?”
“아….”
“싫어?”
“저는… 괜찮습니다.”
“거절이군.”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쉬워라. 그림을 그리게 해 주면 용궁에 함께 가는 것도 생각해 보려 했는데.”
율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정말입니까? 놀라서 물으니 이락이 대답은 하지 않고 묘한 미소를 짓는다. 율은 생각했다. 용궁에 같이 가 준다면 그림을 그리는 게 뭐 대수란 말인가. 그리하여 제 얼굴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자! 얼마든지 그리십시오.”
“여기 보료 위에 올라오거라.”
“보료에요…?”
“그래.”
율은 그가 시키는 대로 보료에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푹신하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안락함이란 말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이락이 와서는 자세를 잡아 준다. 다리를 이렇게 하고, 팔은 이렇게 받치고. 그리고 망설일 틈도 없이 손이 위로 올라와 순식간에 옷고름을 잡아당긴다. 휘릭, 저고리가 벌어지는 순간 율은 당황하여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옷을 꽁꽁 여미고 있으니 답답해 보이지 않느냐. 적당히 풀어 헤치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래.”
“저,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어?”
율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가 시키는 대로 고름을 풀어 헤쳤는데 그것도 모자라 저고리를 어깨 뒤로 넘긴다. 율은 기겁하여 팔을 내저었다.
“그만하십시오!”
“하지 마?”
율은 입술을 힘주어 꾹 다물었다. 그래, 뭐 이 정도쯤이야. 옷을 홀딱 벗으라는 것도 아닌데. 마지못해 시키는 대로 옷을 어깨 뒤로 넘기니 살이 비치는 속적삼이 드러난다. 기분이 이상했다. 보료에 비스듬하게 기대 저고리까지 풀어 헤치고 있으니, 마치 타락한 양반네가 된 느낌이었다.
어차피 발로 그릴 거 왜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락의 기분은 상하지 않게 하려 그의 장단에 최대한 맞췄다. 설마 용궁으로 가겠다고 한 말이 농은 아니겠지.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이락이 상의를 벗어 바닥으로 던진다.
율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옷은 왜 벗으십니까….”
“먹이 튀잖아.”
그러더니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 왕구의 얼굴처럼 찌그러진 만두를 그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꽤 정성을 들인다.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길 기다리며 율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이락이 그리는 그림을 바라봤다.
어…? 제법… 잘 그리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용궁 화원의 화공보다 뛰어난 듯하다. 붓을 쥔 길고 곧은 손가락을 보던 시선이 단단한 팔과 어깨, 흉곽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며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뺨이 달아올랐다.
“표정이 좋구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율은 무슨 이유에선지 더는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만 계속하여 응시했다. 하지만 어색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안락함 때문인지 자꾸만 졸음이 몰려왔고,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