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싫, 싫습니다. 무섭습니다!”
“왜. 궁금하지 않아?”
율은 질색하며 도리질을 쳤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는 뱀이 무섭습니다! 내려 주십시오!”
버둥거리던 율은 이락의 품에서 미끄러져 물에 빠졌고 허겁지겁 헤엄쳐 못 밖으로 기어 나왔다. 젖은 옷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탓인지 몸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비틀거리며 못과 떨어진 곳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뒤이어 이락이 나왔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쳐다보던 율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윗옷만 벗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부 탈의하여 알몸인 상태다. 그가 수면 위로 다 올라오기도 전에 율은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아니, 여태 저 몸으로 나를 안고 있었단 말인가. 민망하고 수치스러워 귀 끝이 붉어진다. 딴청을 피우며 젖은 옷을 짜 물기를 제거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계속하여 들려온다.
“왜 돌아앉아 있어?”
“같, 같은 사내여도 알몸을 보는 건 실례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락이 코웃음을 쳤다.
“같은 사내? 너와 내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비웃는 투였으나 율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행이 다소 거칠긴 하나 저와 이락을 동일 선상에 놓으면 누가 봐도 이락이 훌륭한 수컷의 표본 아닌가. 그에 비하면 저는 약하고 보잘것없었다.
“맞습니다. 이락 님 같은 멋지고 강한 분과 제가 어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이락 님에 비하면 저는 발톱에 때만큼도 못할 것입니다. 열 명의 아가씨들을 데려와 이락 님과 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모두 이락 님을 고를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 네 눈에도 내가 멋지냐?”
“예. 그럼요….”
그러자 이락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율의 앞에 선다. 훌쩍 큰 이락을 올려다보던 율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턱을 잡아서 치켜들고 좌우로 살핀다.
“하긴. 얼굴만 놓고 봐도 내가 훨씬 낫다.”
율은 붙들린 채로 헤헤 웃었다.
“그럼요….”
“몸도 내가 훨씬 좋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양물도 내가 훨씬 크지.”
“예, 당연히, 예?”
율이 황당한 얼굴로 이락을 쳐다봤다.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리는데 이락이 한쪽 눈썹을 치켜든다.
“아니야?”
율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제,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
“왜 몰라. 아까 만졌잖아.”
“언제요…?”
“물속에서.”
듣고 있던 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농담…이시죠?”
“그럴 리가.”
그럼 그게 뱀이 아니었단 말인가. 율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꿈틀거리던 느낌. 아, 아아…! 기겁을 하고 이락을 밀쳐 내며 떨어졌다. 뱀이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 안색이 나빠져 후다닥 못으로 뛰어가 손을 냉큼 집어넣고 박박 씻어 냈다.
“뭐 해?”
율은 돌아보지도 않고 원망의 말을 쏟아 냈다.
“어, 어찌 그런 장난을 하셨습니까!”
“먼저 착각한 건 너야.”
틀린 말은 아니라 더는 따지지도 못하였다. 씻어도 느낌이 남아 있는 듯하여 반복하여 헹구었더니 등 뒤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아주 껍질을 벗겨 내지 그러냐. 누가 보면 똥이라도 만질 줄 알겠다.”
“차라리 똥이 낫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뱉고 나니 아차, 싶어진다. 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등 뒤가 조용하며 동시에 서늘하다. 돌아봐야 하는데 고개가 마비된 것처럼 뻣뻣하였다.
“이, 이락 님? 제가 방금 실언을,”
“쉿.”
겨우 돌아보니 이락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건너편을 주시했다. 왜 그러지. 거기 뭐가 있는 걸까. 귀를 쫑긋 세우는데 슉, 슉, 하는 소리와 낑, 낑, 앓는 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이락이 그쪽으로 걸어가기에 율도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갑자기 이락이 걸음을 멈췄고 율은 그의 등에 이마를 콩 찧었다.
“아!”
이락의 등 뒤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보는데 소리가 나는 곳에 커다란 뱀이 작은 새끼 짐승을 몸으로 감아 똬리를 틀고 있다. 율은 머릿속에서 육지 도감을 펼쳤다. 기다란 것은 뱀이 분명하고 작은 짐승은 생김새로 짐작하건대….
“보십시오! 뱀이 고양이를 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아니다.”
이락은 주위를 둘러봤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호랑이 한 쌍이 머물렀고, 암컷은 새끼를 배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소리를 듣고 어미가 달려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조용하다. 보아하니 새끼의 크기가 유독 작고 힘도 없어 보인다. 버림받은 것인가….
“안 되겠습니다. 뒀다간 큰일을 치르겠습니다.”
율이 뛰어들어 구하려고 하는 것을 이락이 말렸다.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그럼 저대로 두잔 말씀입니까?”
“몸이 약해 지금 구해 준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해.”
“그, 그래도….”
“네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새끼의 목숨을 구한다면 그것 또한 순리에 어긋나는 거야. 뱀은 그저 먹이를 구하는 것뿐이거든.”
“…….”
“돌아가자. 이러다 해 떨어지겠다.”
이락이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이락 님! 하고 율이 그를 불렀으나 돌아보지 않는다. 망설이던 율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엉켜 있는 뱀과 호랑이 새끼에게로 뛰어가 둘을 분리해 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가 아니오. 어미한테 버림받은 것도 불쌍한데, 이 어린 것을 꼭 먹어야겠소. 이번 한 번만 놓아주시오!”
하지만 이미 성장을 마친 뱀은 율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새끼 대신 이젠 율을 먹자고 마음을 바꾼 건지 팔을 타고 기어 올라가 몸을 옥죄어 온다. 불식간에 당한 율은 황급히 뱀을 떼어 놓으려 했으나 그 힘이 어마어마하여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이, 이보시오! 진정하시오!”
쉬이익, 입을 쩍 벌려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에 율이 기겁하였다. 으악. 저리 가시오. 나는 맛이 없소! 몸부림을 치는 순간 사라졌던 이락이 어디선가 나타나 뱀의 머리를 잡아채고는 율의 몸에서 떼어 내 저 멀리 풀숲으로 던져 버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드는데 이락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또 나한테 신세를 졌구나. 이번엔 뭐로 갚을 테냐.”
율은 애써 웃으며 쓰러져 있는 새끼 호랑이에게 황급히 뛰어갔다. 쌕쌕,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가쁜 숨을 내쉬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어릴 적 반쪽짜리 수인이던 율을 아버지가 내다 버리려 했고 당시에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들었다.
너는 지켜 줄 어미가 없었던 것이냐….
“데려가서 어쩌게? 용궁에서 키울 거야?”
이락의 말을 듣고 율은 생각했다. 육지의 동물이 물에서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새끼 호랑이를 조심스럽게 안고 이락에게 가는데 그가 눈치를 채고 단칼에 잘랐다.
“나한테 넘길 생각 마라.”
이락이 돌아서서 가길래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제가 머무는 동안… 키워 주실 만한 분을 꼭 구해 놓고 가겠습니다….”
“알아서 해.”
“음식도 구해 놓고 가겠습니다….”
“염치가 있다면 그래야지.”
“그 전에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댁에 쓸 만한 약재가 있습니까?”
“없어.”
“약재를 파는 곳은요?”
“여기서 멀다.”
“아! 제가 약초를 캐 오면 되겠습니다.”
“재주도 좋구나. 육지에 풀을 구별할 줄 알고?”
“도감에서 보고 어느 정도 외웠습니다. 아, 그거 아십니까? 제 자랑 같아 보이지만 전 외우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하. 그래서 호랑이를 고양이라고 했구나.”
“그것은…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여….”
종알거리던 율의 말소리가 차츰 줄어든다. 앞장서 걷던 이락은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멈춰 돌아섰다. 멀찍이 서 있는 율이 가슴에 품은 호랑이를 내려다보고 가만히 서 있다. 뭐 하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율이 고개를 든다. 얼굴엔 슬픔이 깃들었다.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이락은 율이 안고 있는 새끼 호랑이를 내려다봤다. 힘겹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으나 더는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 탓입니다…. 아까 망설이지 않고 구했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책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이락은 그런 율의 얼굴을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참으로 한심한 자다. 지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쓸데없이 오지랖도 넓고 동정심이 차고 넘치는구나. 어디 가서 이용당하고 뒤통수 맞아 죽기 딱 좋은 성격이다.
“원망하지 않을 거다. 적어도 네 덕분에 구렁이 밥 신세는 면했잖느냐.”
율은 몇 해 전 일이 떠올라 마음이 미어졌다. 바다에 역병이 돈 적이 있었고 그때 어린아이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바다에선 장사를 치를 때 시체를 물에 흘려보내는데, 역병으로 죽은 시신은 병이 더 퍼져나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여 불에 태웠다.
율은 이미 숨을 거둔 호랑이의 머리와 몸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가여워라. 이렇게 작은데, 어미의 젖도 제대로 물어 보지 못하고 죽었구나. 다음 생에는 꼭 건강하게 태어나 천수를 누리거라….
“제가… 묻어 줘도 되겠습니까?”
이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율은 새끼 호랑이를 이락의 품에 맡겨 놓고는 양지바른 곳을 물색하기 위해 뛰어갔다. 그러면서 소매로 자꾸 눈가를 훔친다.
그때 숲에서 새끼 호랑이의 혼백이 툭 튀어나온다. 죽기 전과는 다르게 쌩쌩한 모습이다.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이락을 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방율의 뒤를 따라 방방 뛰어다닌다. 그걸 보는 이락은 씁쓸하게 웃었다. 거봐라.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