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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10화 (10/102)

10화

왕구는 자라의 팔을 쿡, 쿡 찔렀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시체처럼 변해 눈도 뜨지 못하고 숨만 쌕쌕 내쉬고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이봐, 방울아. 하지만 자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니야? 만난 지 며칠 안 된 사이지만 걱정이 됐다.

왕구는 곁에 있는 이락을 바라봤다. 그는 보석을 햇빛에 비춰 보며 이쪽으론 관심도 두지 않았다. 왕구는 그런 이락을 향해 핀잔을 줬다.

“형님. 너무하십니다. 애가 이 지경이 됐으면 와서 들여다보기라도 하셔야지.”

“죽은 게 아니라, 기절한 것뿐이다.”

“그야 그렇지만….”

“왜. 네 탓인 거 같아 마음이 쓰이냐?”

“그것보단, 애가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하, 이락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희한하게도 왕구는 귀여운 것만 보면 환장했다. 그래서 예전엔 어미 잃은 작은 짐승들을 자꾸 데려와 이락에게 구박을 받기도 했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병이 또 도졌나 보다. 이번엔 저 자라를 끌어안고 잘 생각인가.

“볼 만하겠군.”

왕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방율을 건드려 봤다.

“방울아. 방울아. 일어나. 용궁으로 돌아가야지.”

그때 저 멀리서 왕태가 누군가를 데려온다.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은 의원이었는데, 얼마나 급하게 끌려왔는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아이고, 숨차. 천천히 가재도. 대문 안으로 들어온 의원이 허리를 굽히며 가쁜 숨을 몰아쉬다 이락을 보고는 움찔 놀란다.

“이락 님도 계셨네요. 허허.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감, 이쪽이요. 이쪽!”

왕구의 성화에 못 이겨 의원은 앉자마자 곧바로 자라의 눈을 까뒤집었다. 가슴과 복부를 눌러 확인하더니 한참 맥을 짚었다. 기다리던 왕구는 참지 못하고 껴들었다.

“어때? 죽게 생겼어?”

“맥이 흐리고, 몸에 진이 다 빠졌네.”

“대체 왜?”

“무릇 자라란 물에 사는 생명이 아닌가. 아무리 육지에서도 적응이 가능하다고는 하나 꽤 오랜 시간을 물 밖에 나와 있었다면 탈이 날 수 있는 게지. 혹시 이 자가 오늘 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고 있나?”

“먹진 않고 아침부터 펑펑 쏟았지. 아끼는 껍질을 내가 모르고 태웠거든.”

“쯧쯧. 어쩌나. 이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이락이 곁으로 와 섰다.

의원은 그와 조금 사이를 벌리고 떨어졌다.

“그럼 어떻게. 방도가 없어?”

“없진 않습니다. 깨끗한 물에 데려가 한 시진에서 반나절 정도 푹 담가 놓으면 증세가 호전될 것입니다….”

깨끗한 물이라…. 앞에 흐르는 개울은 너무 얕고 멀리 떨어진 곳에 못이 하나 있긴 하였으나 왕구와 왕태는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곳은 영험한 기운이 깃들어 평범한 이가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자 예상치 못하게 이락이 가겠다고 한다.

“형, 형님이 직접 하시게요?”

“응.”

“웬일입니까. 조금 전까지 죽든 말든 관심도 없던 분이.”

그 말에 이락이 돌아보며 묘한 미소를 띤다.

“관심이 아주 없진 않다.”

엥? 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왕구와 왕태는 이락의 심중을 헤아리려 하였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락은 의원에게 갚을 치러 주라 명령하고 율을 어깨에 들쳐 멨다. 아니, 아픈 애를 좀 살살 드시지. 얼핏 보면 죽은 자를 내다 버리는 모습과 흡사하였으나 왕구는 그가 변심하여 가지 않겠다고 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

연못 근처에 다다르자 이락은 방율을 물속에 홱 집어 던졌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자라가 수면 아래로 꼬르륵 가라앉는다. 이락은 무심한 얼굴로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데 잠시 후 물속에서 무언가 일렁일렁하더니 서서히 위로 솟구쳐 모습을 드러낸다.

솨아- 밖으로 완전히 형체를 드러낸 이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었는데 비단처럼 길고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물 위에 가뿐하게 발을 디뎠다.

“뭐야, 아침 댓바람부터….”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노인은 이락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누군가 했더니 네 놈이었구나.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이락이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고 노인은 덩달아 밑을 내려다봤다.

물 아래에는 이락이 조금 전 빠트린 방율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때? 뭐가 보여?”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예전에 그랬지. 300년째 되는 춘삼월에 내게 귀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거라고.”

노인은 발밑을 다시 내려다봤다.

“영감 발밑에 있는 저이가 그 귀인인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여우한테 가서 물어야지.”

“영감도 알 것 아니야. 1,00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 그것도 몰라?”

노인은 발끈하였다. 산신령으로 1,000년을 넘게 살고 있긴 하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좁은 못에만 갇혀 있으니 날이 갈수록 판단력은 흐려지고, 기억력도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라고 채근하는 이락 때문에 노인은 수면에 얼굴을 대고 자라를 유심히 살폈다.

“가만 보자. 혼이 보기 드물게 깨끗한 아이구나.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영안이 잠시 트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 외에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이는데….”

이락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자세히 봐.”

산신령은 고개를 들어 이락을 지그시 쳐다봤다.

“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게야?”

이락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돌아가서 할 일이 있거든.”

섬뜩해 보이는 미소에 산신령은 혀를 찼다.

혹시 저놈이 대갚음이라도 할 작정인가. 그렇다면 이락은 더더욱 돌아갈 수 없다.

“구미호가 말한 건 사내가 아니었다.”

“여인이란 말도 없었지.”

이락은 연못 주변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끼고 못 속을 노려봤다. 꽃피는 춘삼월에 나타난 귀인이라…. 그게 저 자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긴데….

“차라리 여우를 찾아 물어보는 게 어떠냐. 나보단 신통할 텐데.”

슬쩍 찔러봤으나 이락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백여 년 전 구미호가 좋아한 사람을 이락이 꾀어낸 적이 있었고 둘은 그 일로 앙숙이 됐다. 이락은 하룻밤 장난이었고, 구미호에겐 아니었다. 구미호는 언젠가 이락을 찢어 죽일 거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게 왜 임자 있는 것을 건드려서는 쯧.”

“말은 바로 해. 꼬드긴 건 그쪽이었고, 난 넘어가 준 죄 밖에 없어.”

“애초에 너는 마음도 없었잖냐. 하지만 여우는 아니었다.”

이락은 비웃었다.

“한낱 바람에 날아갈 먼지 같은 감정.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잘났다, 이놈아. 그러다 언젠가 된통 당하지.”

“내가 꼴 보기 싫지?”

“좋겠냐?”

이락은 뻔뻔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노력을 해. 아니면 계속 찾아와서 영감을 갈구는 거로 영겁의 시간을 써 버릴 테니까.”

그 말에 산신령은 냅다 호통을 쳤다.

“이, 망할 놈. 귀인은 무슨. 너는 이곳이 딱 어울린다. 평생 이곳에서 썩어라.”

산신령이 그대로 물 아래로 쑥 사려져 자취를 감췄고 이락은 콧방귀를 끼며 여전히 물속만 노려봤다. 그런데 잠시 뒤 방율의 몸이 두둥 떠올라 물 밖으로 홱 튕겨 나온다.

“하.”

이락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과 방율을 번갈아 쳐다봤다.

“속 좁은 영감탱이.”

방율은 여전히 낯빛이 창백하였고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이락은 한숨을 쉬고 옷을 모두 탈의한 뒤 율을 안고 직접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디찬 물이 닿으니 한기가 느껴진다. 적당히 낮은 곳을 찾아 그대로 방율을 물속에 잠기도록 하고 몸을 기댔다.

방율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지더니 입이 열리고 숨을 쉬는 듯하다.

“물에 사는 게 맞긴 하네. 이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있나.”

저도 모르게 피식 웃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진다. 이락은 혀를 쯧, 찼다. 찬물에 들어와 있는 것도 싫은데 비까지 내리다니. 하늘도 너무하지. 아니, 애초에 하늘이 내 사정 같은 건 관심이 있을 턱이 없지.

안 그렇습니까? 이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노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기절해 있던 방율이 꿈틀 움직인다. 이락이 수면 위로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리자 눈을 천천히 뜨더니 하아, 하고 숨을 토해 낸다.

갈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눈꺼풀 안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였고 물기를 머금어 젖은 피부와 머리카락은 유독 색정적이었다.

“정신이 들어?”

이락의 물음에 방율이 입을 달싹인다.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긴…?”

“기절했어. 의원이 물에 데려다 놓으라길래 내가 데리고 왔지.”

율은 자신이 안겨 있다는 걸 깨닫고는 미안하면서도 민망한 표정을 했다.

“이락 님께 또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야 갚으면 되고,”

“근데… 이락 님…!”

이락이 하던 말을 멈추고 미간을 움찔 찡그렸다. 그와 달리 율의 표정은 뭔가 긴박해 보였다. 그는 이락의 팔을 붙들며 재촉했다.

“여기서 얼른, 얼른!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조금 전 제가 뱀을 만진 것 같습니다!”

“뱀?”

“예, 엄청 크고 단단하였습니다!”

이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율을 내려다봤다.

정말 그게 뱀이라고 여기는 건지 율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진다.

“육지의 뱀은 독이 있다 들었습니다. 어서 빨리, 으헉. 여기 밑에! 지금 제 엉덩이에 살짝 닿았습니다!”

이락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돌았다. 율은 빨리 나가자고 그를 재촉하며 매달렸고 이락은 쯧 혀를 차고는 율을 고쳐 안았다.

“호들갑 떨지 마. 그러다 뱀이 네 구멍에 들어가 버리면 어쩌려고.”

율의 안색은 더 나빠졌다. 뱀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라…. 고민하던 율은 금세 깨닫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이락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어서 나가자고 애원할수록 이락의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만 번져 나갔다.

“그러지 말고 손으로 살살 달래 줘. 육지의 뱀은 바다의 뱀과는 달라 길들이기 아주 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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