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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9화 (9/102)
  • 9화

    아, 목말라. 머리 아파. 속이 울렁거려. 숙취에 몸부림치던 율은 감고 있던 눈을 겨우 떴다. 햇볕이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숙취 때문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뒤늦게 어젯밤 일이 머릿속에 홱홱 지나간다. 궁에서 나와 주막에 들렀고, 술을 마시다 이락을 만났고,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나머지 기억이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싹둑 사라졌다. 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방 안을 둘러봤다.

    등껍질도, 메고 있던 봇짐도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다. 냅다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마당에서는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드는 중이다. 어제보다 토끼의 수하가 더 늘어났다. 다들 일을 하다 멈추고 율을 쳐다봤으나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 제, 등껍질 못 보셨, 으악!”

    율을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갈색 곰 왕구와 검은 곰 왕태가 불을 피우고 거기에 등껍질을 뒤집어 올려 반죽을 부치고 있는 게 아닌가. 율은 정신 나간 얼굴로 뛰어가 그것을 낚아챘다. 전이 바닥에 떨어지고 왕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율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제 등껍질로 무얼 하신 겁니까.”

    “그야, 전을 부쳤지. 모양이 딱 전 부치기 좋은 모양이라… 야, 너 울어?”

    율은 눈물을 삼키며 뚜껑을 꼭 쥐었다.

    “어어! 너 손…그거 놔, 얼른!”

    왕태가 등껍질을 빼앗으려 했고, 율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달궈진 껍질에 데어 빨갛게 익은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도저히 껍질을 놓을 수 없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자 보다 못한 왕구가 재빨리 물 한 바가지를 떠 와서는 손에 뿌린다.

    “울지마라…. 전만 부치고 돌려주려고 했어. 진짜야.”

    “어떻게 여기다… 전 부칠… 생각을… 크흡… 이건 저한테… 목숨만큼… 흑… 소중… 흐흑….”

    “그렇게 소중한 거였어?”

    “이그은 제가… 흐윽… 시흐음에 붙어, 흐흑… 요아안님이 흑….”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자 다들 당혹스러워한다. 율은 체면이고 뭐고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첫날 예상치 못한 괴수를 만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난 것도 속상해 죽겠는데 이젠 새카맣게 그을려 특유의 무늬마저 사라졌지 않은가.

    “줘 봐. 내가 닦아 올게. 저기 개울이 있거든.”

    “됐습니다… 흑… 제가, 제가 할 겁니다… 흐으윽.”

    율은 그것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눈물을 연신 훔치는 뒷모습을 보고 왕구가 따라가려고 하자 왕태가 말리며 팔을 툭 친다.

    “놔둬. 쟤가 지금 네놈 얼굴이 보고 싶겠냐.”

    “아니, 왜 나한테 그러슈. 형님도 좋다고 했으면서.”

    “네놈이 하도 우겨 대니까 해 보라 한 거지. 저렇게 울 줄 알았나.”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수컷 놈이 눈물을 질질 짜고…. 근데 좀 귀엽지 않수? 크크.”

    “너! 또, 또!”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누가 질질 짜?”

    이락이다. 아침 일찍 온천에 다녀왔는지 그는 평소보다 얼굴이 더 반질반질하였다. 금산에는 유명한 온천이 하나 있었는데 이락은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젯밤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이더니 온천수 덕분인지 지금은 평온한 상태다.

    이때다 싶어 왕태가 나서서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제가 따라가 볼까요?”

    듣고 있던 이락이 손을 저었다. 아니다. 내가 갈게.

    집 밖으로 나온 이락은 개울가 빨래터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는 방율을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는데 눈과 코가 빨갛게 변했다.

    “왜 그러고 있어?”

    “흑흑… 이락 님. 지금 제가… 좆같습니다.”

    이락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뭐? 라고 물었으나 율은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쓴 것 같았다. 뒀다간 통곡을 할 기세이기에 이락은 바닥에 놓인 껍질을 주워 들고는 개울 안으로 첨벙 발을 담갔다. 율은 눈물을 훔치며 이락을 말렸다.

    “소용없습니다, 제가, 흑, 해 봤는데, 흐윽, 닦이질 않습니다.”

    이락은 잠자코 바닥에서 모래를 건져 껍질에 문질렀다. 벅벅, 모래가 껍질에 마찰하는 소리가 나고 같은 행동을 번복하자 그을음이 반 이상은 씻겨 나간다. 율은 천천히 일어나 신기한 듯 쳐다봤다.

    “어찌….”

    “다행히 타진 않았어. 그을렸을 뿐이야.”

    율이 저도 모르게 첨벙첨벙 개울로 뛰어 들어와 껍질을 살펴봤다. 다행이다. 신기하고 기뻐 눈물을 매달고 맹추처럼 헤에, 웃다가 이락과 눈이 마주쳤다. 민망하여 바로 고개를 떨구었으나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울다가 웃으면 몸에 털이 난다고 했다.”

    “어디… 말입니까?”

    “안 가르쳐 줘.”

    말을 하면서도 이락의 시선은 눈물이 묻어 있는 긴 속눈썹과 붉게 변한 코와 뺨, 입술을 차례대로 타고 내려갔다. 어제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물에 처박아도 시원찮지만 쥐방울만 한 게 울고 있는 걸 보니 살짝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얼룩을 지웠으니, 그만 돌아가자.”

    손이 덴 율을 대신하여 이락은 껍질을 챙겨 물 밖으로 나왔다.

    “근데 이락 님….”

    “응.”

    “제가… 어제 어떻게 집에 왔습니까?”

    “기억 안 나?”

    “예. 전혀 나질 않습니다….”

    “주막에서 봉변당할 뻔한 걸 내가 구했어.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업고 왔지.”

    율은 화들짝 놀랐다.

    “이락 님이 저를요?”

    “왜 못 믿는 표정이지?”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봉변당하는 걸 구해 줄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어쨌든 구해 줬다고 하니 감사의 인사는 하였다.

    “죄송해서 어쩝니까…. 많이 무겁진 않으셨습니까….”

    “무겁진 않았는데, 내 등에다 구역질을 했을 땐 잠깐 죽이고 싶었다. 다른 놈 같으면 벌써 사지를 찢어 죽였을 거야.”

    율은 방금 전까지 울던 것도 잊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멈춰 섰다. 아니나 달라 이락의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인다. 아무래도 농은 아닌 듯하여 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덕분에 아직도 몸에서 쉰내가 난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변상을….”

    “됐어. 거기에 대한 값은 치렀으니까.”

    “제가요…?”

    “그래, 네가.”

    말하다 보니 어느덧 집까지 다 왔다. 음식을 준비하던 수하들이 율을 보고 괜찮으냐고 묻는다. 율은 깨끗하게 닦인 등껍질을 보여 주며 멋쩍게 웃었다. 다행히 지워지긴 했습니다. 그래도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이건 제가 목숨만큼 아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마루에 놓인 봇짐이 눈에 띈다. 율은 후다닥 가서 봇짐을 열었다. 어머니께 드릴 약이 잘 있나 확인하고 심 낭자에게 받은 보석 상자도 꺼냈다. 어제 토끼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어떻게든 갚는 게 좋겠지.

    그런데 상자의 뚜껑을 열던 율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어…?”

    고개를 드니 이락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가져가셨습니까?”

    “값을 치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홀랑 다….”

    아쉬운 듯 말하자 이락이 쐐기를 박는다.

    “내 몸뚱이를 더럽혔는데도 살려 줬다.”

    “…….”

    “네 목숨이 그 정도도 안 돼?”

    “…….”

    “아니면 보물을 돌려주고, 지금이라도 네 목숨을 거두랴?”

    그랬다간 진짜 칼을 빼 들 기세였기에 율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물욕이 크진 않던 율이다. 돌려주려 하던 것이었으니 이락이 가져간다고 하여도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이것으로 그에게 호감을 얻었다면 용궁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봇짐을 챙기고 나자 뒤늦게 데인 손이 화끈거렸다. 율은 물에다 손을 담글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사라졌던 이락이 작은 통과 흰 천을 들고 나타나 앞에 앉는다.

    “이리 내.”

    “뭘… 말입니까?”

    “손.”

    아, 치료를 해 주려고….

    “괜찮습니다…. 제가 할 테니 주십시오.”

    “짜증 나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예….”

    율은 순순히 양손을 내밀었다. 이락은 흰 통의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손가락으로 퍼낸다. 노릿한 색의 약에서 퀴퀴하고 구린 냄새가 훅 풍겼다. 거부감에 인상을 쓰고 손을 빼자 확 잡아채서는 손등을 탁 때린다.

    “아얏.”

    “가만히 있어.”

    그는 약을 율의 손바닥 붉어진 부위에 꼼꼼하게 발라 줬다. 손가락이 참으로 길고 곧았다. 잠시 기진 생각이 났다. 그의 손가락도 이렇게 길고 곧았지…. 그러다 율은 궁금해졌다.

    “이것도 혹시… 값을 치러야 합니까?”

    “글쎄다.”

    약을 바르느라 손바닥을 살살 훑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진다. 기진과 닮은 손가락 때문일까.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율은 말없이 자신의 손바닥만 노려봤다.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하지만 미묘한 감각은 손바닥에서 몸으로 서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괜히 찔려 이락을 힐긋 봤는데 그 역시 손이 아닌 율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

    졸지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어째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율은 뜨끔하여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뭘 말입니까?”

    이락은 약이 묻은 손을 천에 슥슥 닦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그는 약을 정리하여 자리에서 일어섰고 혼자 남겨진 율은 가슴이 콩닥거려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뭐였을까. 그래, 이건 기진 님을 떠올려서 그런 거야. 기진 님을 떠올려서….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러울까. 이것도 기진 님을 떠올려 그런 것인가. 그러고 보니 식은땀도 나는 듯하다. 아아, 왜 이러지. 안 되겠다. 물이라도 마셔야겠구나. 율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기둥을 손으로 짚었다.

    “아!”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변하더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어! 쥐방울! 놀란 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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