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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8화 (8/102)

8화

동그란 이마. 마늘쪽 같은 코. 티끌 하나 없는 피부에 붉은빛이 도는 입술이라…. 그래, 여인이라고 믿길 만큼 눈에 띄는 외모긴 하지. 이락은 앞에 있는 율을 가만히 응시했다. 술에 잔뜩 취한 그는 봇짐을 품에 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계속 자면 두고 간다?”

“…….”

“어지간히 취했군.”

남은 술을 비우고 일어서자 주인이 문으로 얼굴을 빠끔 내밀었다.

“가, 가십니까?”

이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로 걸어갔다.

“술값은 그 샌님한테 받아.”

아니, 완전히 기절했는데 술값을 어찌 받는단 말입니까. 꿍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으나 그것이 이락을 멈춰 세우진 못하였다. 밖으로 나와 금산으로 돌아가려고 방향을 트는데 처음 보는 패거리가 맞은편에서 걸어온다.

이락을 발견하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아 이곳에 사는 자들이 아니었다. 하고 다니는 행색이 평범하진 않은데, 무슨 연유로 이곳에 나타난 걸까. 그들은 이락을 한번 돌아보고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멈춰 섰던 이락은 주저 없이 발길을 뗐다. 시장은 북새통을 이뤘고, 오색의 불빛들은 어두운 거리를 밝히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때 근처 폐물 점에서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여인 하나가 튀어나와 이락의 팔을 잡았다.

“오라버니.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셔요?”

눈을 곱게 접어 웃는 그녀는 영월관 기생 중 하나였다.

“너는 여기 어쩐 일이냐. 지금 일할 시간 아닌가.”

“야시장이 선다 하여 구경 나왔죠.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 잘되었습니다.”

“잘 되었다니?”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왈짜패들이 보여 불안했지 뭡니까.”

“왈짜패?”

“예, 저한테도 어찌나 추근대고 시비를 걸던지. 그러니 오늘은 오라버니가 같이 있어 주셔요. 그럼 이 애월이는 든든할 것 같습니다.”

이락은 애월이 말한 왈짜패가 누군지 알 것 같아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 나서 살포시 안기는 애월의 작은 머리통을 막았다. 새침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기에 이락은 그녀를 떼어 놓고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주막 쪽으로 걸어갔다.

딱히 구해 줄 생각은 아니었다. 궁궐에서 살아 돌아온 것까진 운이 좋아서 그랬다 치고, 이번에도 악운을 피해갈 수 있으려나. 구경이나 하려고 간 것인데 아니나 달라 이미 왈짜패들이 자라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먼발치서 주막 주인이 안절부절못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완전 실신했네. 어이, 일어나 봐.”

“가만. 이거 계집이 변복을 한 거 아닌가.”

“하, 설마.”

“자세히 봐. 곱상하니 생긴 게 딱 봐도 계집처럼 보이잖아.”

“그럼 확인해 볼까.”

낄낄거리던 패거리 중 하나가 방율을 눕히고 옷고름을 스르르 당긴다. 이락은 팔짱을 낀 채 담장에 기대서서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때마침 주막 주인이 이락을 발견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락 님. 도와주십시오! 선비님이 지금 곤욕을 치르게 생겼습니다!”

패거리들이 인상을 쓰고 홱 돌아본다.

“뭐야. 넌.”

이락은 여전히 담장에 기댄 채 계속하라며 손짓을 했다.

어서 벗겨 봐라. 나도 그 녀석이 정말 수컷인지 궁금했거든.

그러자 덩치가 제일 큰 녀석이 험악한 얼굴로 다가왔다.

“감히 수인 주제에! 썩 꺼지지 못해! 아니면 혼구녕을 내 줄 테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덩치 뒤로 패거리가 낄낄대고 웃었다.

“개똥아, 살살 해라. 바지에 지리겠다.”

개똥이라는 남자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었다.

“덩치 믿고 까부나 본데, 오늘 앙증맞은 네놈의 귀를 잘라 줄 테니 이리 오거라!”

휙 칼이 날아왔고 이락은 가볍게 피한 뒤 사내의 낭심을 걷어찼다. 억. 사내가 가랑이를 잡고 쓰러지자 이락은 손목을 비틀어 칼을 빼앗은 뒤 그대로 한쪽 귀를 인정사정없이 도려냈다.

“끄아아아악!”

상대가 고통에 몸부림을 쳤고 이락은 피가 묻은 칼을 세워 무심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제법 괜찮아. 날이 잘 섰어.”

저, 저 미친놈이. 율을 둘러싸고 있던 왈패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금 전 쓰러진 왈패가 땅바닥을 기어가려고 하자 이락은 그의 등을 꾸욱 밟으며 나머지 패거리를 차례대로 응시하고 칼끝을 겨눴다.

“이번엔 어딜 썰어 볼까? 코? 눈? 아니면 팔다리?”

그들은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서도 이락의 기세에 선뜻 덤벼들지 못하였다. 때마침 몸짓이 날렵한 사내가 호기롭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죽어라! 이 토끼 놈아! 하지만 이번에도 이락은 너무도 쉽게 상대를 제압하여 넘어트렸다. 그러고는 발 뒤쪽에 칼을 가져다 대며 웃었다.

“집에 갈 땐 기어가게 생겼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목 뒤를 칼로 슥, 긋자 피가 뿜어져 나와 이락의 얼굴에 튄다.

나머지 놈들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됐고 이락은 피 묻은 얼굴을 무심하게 닦았다.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빌어. 내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없는 아량을 쥐어짜 보마.”

씨벌!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깟 놈한테 당할 것 같으냐! 이번엔 떼로 덤빈다. 하지만 제아무리 날쌘 자라고 해도 이락을 당해 내는 건 어려웠다. 이락은 순식간에 그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바닥을 기게 하였다.

일을 마친 뒤 이락은 구겨진 소맷자락을 툭툭 털고 꼼짝도 안 하고 누워 있는 방율에게 다가갔다. 옷고름이 풀어져 있길래 칼끝으로 저고리를 벌리고는 안을 들여다봤다. 그는 실망한 표정으로 쯧, 혀를 차며 칼을 옆으로 내던졌다. 진짜 수컷이었구나.

“아이고, 세상에. 이락 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때마침 오셨기에 망정이지 선비님이 큰 화를 당할 뻔했지 뭡니까.”

주막 주인은 바닥에 뒹구는 왈짜들을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락을 치켜세우고 아부를 떨었다. 이락은 문밖에 사람이 꽤 많이 모인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구겼다. 곧 관군들이 몰려오겠군.

돌아가려던 이락의 발에 무언가 툭 걸린다. 바닥에 떨어진 방율의 봇짐이었는데 비단으로 감싼 물건이 튀어나와 있다. 이락은 그것을 꺼내 거리낌 없이 풀었다. 자개를 입힌 상자? 상점에서 이걸 산 적이 있던가.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이락이 눈빛이 달라졌다.

“이락 님. 그게 뭡니까.”

주인이 궁금한 얼굴로 가까이 오길래 이락은 웃으며 그것을 탁 닫았다.

“넌 몰라도 돼.”

이락은 상자를 품에 넣은 후 방율을 챙겨 어깨에 들쳐 멨다.

주인이 반가운 표정으로 따라온다.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그럼 밥값하고 술값은 어떻게….”

이락이 품에서 은화를 꺼내 튕겼다. 주인이 그것을 받고는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아유, 뭘 이렇게까지. 그냥 가셔도 되는데 성의가 있으니 일단은 받겠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주인을 뒤로하고 이락은 주막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관군이 달려오는지 횃불이 일렁인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 줬고 이락은 그들을 지나쳐 금산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금산 입구로 막 들어서던 그때 어깨에 매달려 있던 자라가 끙, 끙, 신음을 낸다. 이제 깨어난 건가. 내려서 확인을 하려는 찰나 등으로 뜨거운 것이 쏟아진다. 그리고 시큼한 냄새도 함께 올라왔다. 이락은 얼굴이 구겨져 자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발라당 드러누운 자라는 등껍질 때문에 팔다리가 바닥에 제대로 닿지를 못하고 버둥거렸다.

“하, 이런 망할….”

손으로 등을 더듬으니 축축한 게 만져진다. 이락은 어금니를 까득 물고 누워 있는 자라를 노려봤다. 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다.

하, 그냥 죽일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분노를 다스린 후에 그는 바로 근처의 작은 못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검은 형체들이 자라를 에워싸고 빙빙 돌고 있다.

[음기, 강하다!]

[만지고, 싶다. 내가, 원하는, 몸!]

[비켜, 내가, 갖는다. 내가!]

이락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호통을 쳤다.

“썩 꺼져! 저승 문턱까지 끌고 가기 전에!”

꺄아아아. 하는 비명과 함께 음산한 기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숲에는 고요함만이 맴돌았다. 이락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묘한 눈으로 자라를 내려다봤다.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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