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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7화 (7/102)
  • 7화

    여기서 멈춰 주십시오. 가마가 멈춘 뒤 문이 열렸다. 바닥에 발을 딛던 율은 가마 문틈에 등껍질이 걸려 한참 애를 먹었다. 겨우 빼낸 뒤 짊어지고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때 나이 지긋한 궁인이 율에게 비단으로 싼 무언가를 건네었다.

    “마마께서 꼭 드리라 하셨습니다.”

    율은 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약을 지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성의 표시이니 꼭 받아 달라 하셨습니다. 선비님께서 받으셔야 마마께서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망설이던 율은 마지못하여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씀하시면 병사를 함께 대동시키겠습니다. 바다 근처까지 모셔다드릴 수 있게요.”

    “괜찮습니다…. 지도를 주셨으니 그걸 보고 찾아갈 수 있을 듯합니다.”

    한사코 거절하자 궁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가마꾼과 궁인이 길을 되돌아갔고 율은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이들이 등껍질을 힐긋거리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고 율은 아무래도 날이 완전히 저물면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때마침 꼬르륵, 허기가 몰려온다. 율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곳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궁궐에서 왕을 만났는데 어찌나 꼬치꼬치 캐묻는지 마음이 불편하여 음식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아프신 어머님의 병환을 치료할 약을 구하러 육지에 왔다고 둘러대자 그는 선뜻 내의원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의원을 데려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지켜보니 의심은 많지만 심 낭자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인 듯하여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걷다가 주막 하나를 발견하였다. 사람도 별로 없어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사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삐쩍 마른 주인이 반가운 기색을 하며 뛰쳐나왔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선비님.”

    말을 하면서도 그는 율의 등껍질을 쳐다봤다.

    “국밥을 하나 먹었으면 하는데… 혹시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내 얼른 하나 말아서 내드릴게. 아, 술은 필요 없으실까? 마침 이번에 새 탁주가 들어왔는데, 맛이 얼마나 기가 맥힌지 둘이 먹다가 하나가 뒤져도 모른다니까.”

    인간들은 왜 그렇게 먹다 죽는 걸 좋아하는지…. 율은 처음엔 사양하였다가 그래도 맛이 궁금하여 한 사발만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게 앉아 음식은 기다리던 율은 궁녀가 주고 간 것을 내려다봤다. 이게 뭐지?

    비단을 풀자 자개를 입힌 나무 상자가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덮개를 열던 율은 흠칫 놀랐다. 금화와 은화 그리고 여러 보석이 들어 있었다. 놀라 얼른 덮개를 닫고는 주위를 살폈다. 약을 지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거늘.

    “이렇게까지 챙겨 주실 필요는 없는데….”

    지금이라도 돌려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율은 일단 비단을 다시 묶어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 얼른 상자를 봇짐에 넣었다. 그렇게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탁주가 먼저 나왔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시장 곳곳에는 불이 켜지고 있었다.

    율은 물 대신 탁주를 한 모금 꿀꺽 들이켰다.

    “아…!”

    가끔 탁주를 마시긴 하였으나, 바다에서 마시던 것과는 또 다르다. 시큼하면서도 제법 감칠맛이 난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한 잔을 다 비운 율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주인을 불렀다.

    “여기 탁주 한 병 주십시오. 사발도 하나 더 주시고요.”

    주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탁주를 내왔다.

    “아이고, 생긴 건 복사꽃처럼 곱상한 양반이 술 좀 드시네? 어때, 맛이 기가 막히지요?”

    주인이 자리에 앉아 물었고, 율은 입가에 미소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잔 하나를 주인에게 건네며 탁주를 한가득 따라 줬다.

    “제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아유, 넘친다, 넘쳐. 보기보다 정이 많으신 분이네. 그래, 물어볼 게 뭔데 그럽니까?”

    “혹시 이 근방에서 토끼를 본 적이 있습니까?”

    “토끼요…? 토끼라면… 딱 하나 알고 있기는 한데….”

    “이락? 그자 말입니까?”

    “선비님도 아시네. 내가 여기서 20년 넘게 장사했는데 토끼라고는 딱 그자만 봤지요. 원래 묘족이 사는 곳은 북쪽에 있어 이곳과는 먼데, 어떻게 그자가 여기에 터를 잡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율은 작게 탄식했다. 진짜 하나뿐이구나. 지금이라도 북쪽으로 가 볼까. 하지만 다른 토끼를 찾을 동안 용왕의 병중이 깊어진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율은 막연한 표정으로 주인의 빈 잔을 채웠다.

    “이락, 그자는 이곳에서 유명합니까…?”

    “암요. 유명하다 뿐이겠어요. 금산에 살면서 보호비와 통행세를 받는데 나라님도 함부로 못 건드려요. 원래 거기에 머무는 산신이 따로 있었는데 어째서 그놈이 활개를 치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보호비는 뭡니까?”

    “말로는 도적놈들 때려잡아 준다고 하는데, 가끔 양반들도 때려잡아서 나라에서도 골치를 썩고 있습죠.”

    “성품은… 어떻습니까?”

    “성품은, 한마디로 음….”

    율은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좆같죠.”

    좆이란 말에 율은 눈을 끔뻑였다. 먹는 건가.

    바다에 나는 것 중에 톳이 있는데 어감이 비슷하기도 하고.

    듣기만 해선 그게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좋다는 뜻인가요…?”

    “설마. 아주 최악일 때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측은지심이 있다거나 하진 않습니까?”

    “전혀.”

    하긴 자신이 본 이락 역시 그런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았다. 한 잔 더 마신 주인은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이락에 대해 말해 줬다. 이곳에선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과 귀신을 본다는 소문, 그리고 큰 상단과도 연관이 있으며, 밤마다 동네로 내려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또 그놈이 계집은 어찌나 밝히는지, 여기 영월관 기생부터 동네 처녀에 아낙들까지, 그놈하고 엮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짐승 새끼하고 붙어먹어. 어휴! 말세야, 말세. 아… 선비님도 혹시 수인이요?”

    율이 멋쩍게 웃자, 주인이 자신의 입을 때린다. 실수요. 새겨듣지 마시오.

    “아무튼, 그놈이 무슨 요술을 부리는 건지 목매는 여인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솔직히 선비님이나 나나 그놈보다 못한 게 뭐요? 안 그렇소?”

    율은 그저 하하, 웃기만 했다.

    “근데 신기한 건 뭔지 아시오? 우리 어머님이 올해 여든이 넘었거든. 걷는 건 힘들어도 정신은 또렷한 양반인데 처녀 적에 이락이 놈을 봤다는 거야. 나는 처음에 노인네가 헛소리를 하나 하였는데, 내 친구 중에 만식이라고 있거든. 걔 모친도 비슷한 얘길 하더래. 그래서 항간에는 이락이 이 몹쓸 놈이 실은 토끼가 아니라 구미호나 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구미호요…? 여우 말입니까?”

    “내, 내가 실언을 했소!”

    “예?”

    “못 들은 걸로 하시오!”

    신나게 떠들던 주인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부리나케 주막 안쪽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린 그를 보며 율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뭐야. 말하다 말고…. 뭐 귀신이라도 봤나?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던 율은 그만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살아 있었네?”

    주인이 왜 그리 겁을 먹고 도망쳤는지 뒤늦게 알았다. 마지막 보았을 때처럼 이락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띤 채였다. 율은 긴장하여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겁먹지 말자. 쫄지 마. 인간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하지 않았는가.

    근데 상대는 호랑이만큼 무서운 토끼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탁주를 마셨기 때문인지 간덩이가 조금은 커졌다는 거다. 이락이 느긋하게 맞은편으로 와 앉는다.

    “우리 전하가 자라탕이 입에 맞질 않으셨나?”

    율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펄펄 끓는 솥에서 푹 고아져야 이락 님 마음이 편하셨을 텐데요.”

    “오호, 비아냥거릴 줄도 알아?”

    비아냥뿐이겠는가. 욕도 할 줄 안다. 내가 감옥에서 토끼 새끼라고 욕하는 걸 들었어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한 번 더 퍼붓고 싶었으나 간덩이가 아직 그만큼 커지지는 못했다.

    이락은 무슨 속셈인지 상에 턱을 괴고는 율을 지그시 응시했다.

    “다시 만나니 좋구나. 실은 그렇게 넘기고 나서 찜찜했거든.”

    전혀 찜찜한 얼굴이 아니다. 율은 무시한 채 다시 탁주를 들이켰다. 뒤늦게 취기가 올라와 귀와 목이 뜨겁다.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니 이락이 율의 빈 잔을 채워 준다.

    “의외구나.”

    “뭐가 말입니까…?”

    “보자마자 성질을 내고 술이라도 끼얹을 줄 알았는데.”

    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이락이 밉다. 밉지만….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이락을 원망할 처지가 되나….

    “그냥….”

    “그냥?”

    “이락 님도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이락의 오묘한 눈동자가 율을 응시한다.

    “그래?”

    “예….”

    “그렇군.”

    그는 보일 듯 말 듯 웃더니 탁주를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다시 보아도 속내를 도무지 모르겠다. 엮여서 좋을 게 없는 건 확실하나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미안한 마음은 잠시 접어 둬야 한다. 어떻게든 이 자를 꾀어 용궁으로 간다.

    그것만 생각하자….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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