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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5화 (5/102)

5화

율은 경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육지에 온 기념으로 가족들의 선물을 사려고 하자 이락이 저잣거리 안쪽에 있는 커다란 상점에 데려갔는데, 온갖 신기한 것들이 다 있었다. 그중에 경대가 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궁에서나 쓰는 경대가 이런 상점에서도 팔고 있다니.

율은 경대에 비친 자신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봤다. 아버지보단 어머니와 선이를 닮은 듯하다. 눈꺼풀을 깜빡이자 물기를 머금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인다. 자세히 보니 인물이 영 못난 건 아닌 듯하여 안심됐다.

저도 모르게 헤에-, 하고 웃었더니 물건을 살피던 이락이 힐긋 돌아본다.

“낯짝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율은 민망하여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신기하여 웃은 것뿐입니다.”

“솔직해지지 그래. 이 정도면 봐 줄 만하다고 생각했잖아?”

아니, 이 자가 독심술을 하나. 뜨끔하여 얼른 말을 돌려 이락의 비위를 맞췄다.

“잘생긴 건 이락 님이시지요. 저 같은 것이 감히 어찌….”

말을 끝맺기 무섭게 이락이 곁으로 오더니 경대를 집어 든다. 뭘 하려는가 싶어 넋 놓고 보고 있는데 갑자기 자세를 낮추고 율의 얼굴 옆에 제 얼굴을 나란히 붙인다. 당혹스러워 떨어지려고 하자 머리통을 붙잡아 뺨이 맞닿을 정도로 꾹 누른다.

사각 거울 안에 이락과 제 얼굴이 나란히 보여졌다.

“나에 비하면 박색이지만 썩 나쁘지 않아.”

거울 속 이락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율은 당황하여 이락의 손을 떼어 내고 냉큼 한 발 떨어졌다. 오래된 친우와도 이 정도의 거리에서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댄 일은 없었다. 방금 전 피부가 닿았던 뺨이 뜨겁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데 이락이 경대를 내려놓고 율을 스쳐 뒤쪽으로 간다.

이상하게도 이락이 가까이 오면 숲에서 나던 향이 난다. 곰들한테서는 전혀 나지 않던 것이 그한테서만 나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나한테서는 무슨 향이 날까. 혹시 바다 냄새? 짠 내? 킁킁, 소매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데 상점 안으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아이고, 이락 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오신다고 기별이라도 넣었으면 제가 먼저 나와 있었을 텐데요.”

상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능글능글 웃으며 이락을 향해 손이 닳도록 비벼 대고 비위를 맞췄다.

“여기 있는 쥐방울한테 물건 몇 개만 내어 줘.”

쥐방울이라니. 따지고 싶었으나 괜히 더한 소리만 들을 것 같아 율은 관두었다.

상점 주인이 율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선비분은 어디서 오셨을까. 서쪽? 남쪽? 요즘 유행하는 봇짐은 아닌데. 특이하네. 내가 저걸 예전에 어디서 봤더라.”

등껍질을 살피려 하기에 율은 슬그머니 이락의 뒤로 숨었다. 주인은 더 묻는 대신 고개를 또 갸웃하더니 이쪽으로 오라며 율을 안내했다. 그곳에 가니 의복에 다는 장신구부터 시작해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처음엔 가족에게 살 선물을 골랐다. 어머니에겐 가락지를, 선이에겐 댕기를, 그리고 아버지에겐… 술을 사드려야 하나…. 그러다 갓끈 하나가 율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보라색의 구슬은 매우 영롱하였는데 그걸 보자마자 번뜩 떠오르는 이가 하나 있었다.

“저건… 얼마나 합니까?”

“이거요? 이야, 안목이 좋으시다. 이게 요즘 최고로 잘 나가는 갓끈입니다. 사대부부터 시작해 죄다 구하겠다고 난리에요. 이거 보이시죠? 이거 자수정입니다. 선비님처럼 얼굴이 흰 분들은 더더욱 잘 어울릴 겁니다. 한번 대보세요.”

주인이 얼굴에 대려 하길래 율은 정중히 사양했다.

“제가 할 건 아니라….”

“아, 선물?”

“예….”

율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는 분이 무척 좋으시겠네.”

좋아할 기진의 얼굴을 상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이걸로 하나 드릴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락이 갓끈을 낚아채 옆으로 치운다.

율이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이락을 돌아봤다.

“다른 걸로 내와.”

“어쩌죠. 이건 딱 하나 남은 물건이라. 흐흐.”

주인이 능글맞게 웃자 이락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없어?”

주인은 흠칫하여 하나 더 있는데 깜빡했다며 부리나케 달려가 똑같은 모양의 갓끈을 하나 더 가져왔다. 율은 두 개의 갓끈을 번갈아 살폈다. 아무리 봐도 같은 것인데 왜…. 어디 흠집이라도 난 걸까. 유심히 보았으나 도무지 모르겠다.

이락은 어느새 반대편으로 돌아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율은 만두를 얻어먹은 게 마음에 걸려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락 님도 하나 고르십시오….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고르십시오. 아까 향낭 주머니를 보시던데 마음에 드는 게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럼 다른 건요? 아니다. 이락 님도 갓끈을 사 드릴까요?”

말하고 나니 이락의 쫑긋 솟은 귀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귀를 자르지 않는 이상 갓을 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괜히 트집을 잡을까 싶어 얼른 말을 돌렸다.

“저기, 저 손수건은 어떻습니까? 수가 참 예쁘게 놓였습니다.”

이락은 가만히 율을 바라봤다.

“왜 사 주지 못해서 안달이지?”

“그거야….”

미안해서 그렇다는 말을 어찌하겠는가. 다시금 그를 데려가는 목적에 대해 떠올리자 죄를 짓는 것만 같아 고개가 절로 떨구어졌다.

“됐으니 얼른 나가자. 이곳에 오래 머무니 골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이락의 안색이 들어올 때보다 어둡다. 무엇이 그의 기분은 거슬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서 상점 주인이 율이 고른 물건들을 예쁜 천에 싸고 주판을 튕겨 계산을 시작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시죠?”

“예… 이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마지막 주판알을 튕기고 나서 굽히고 있던 허리를 세웠다.

“모두 해서 닷냥인데, 제가 이락 님을 봐서, 특별히! 아주 특별히!”

율이 진주를 한 알 꺼냈다. 진주를 알아본 상점 주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어? 그건!

“설마? 진주?”

“이건… 안됩니까?”

주인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다 곧 표정을 수습하였다.

“아유, 안되긴. 여긴 시체 빼고 다 받아요. 물론 이 진주로는 살짝 부족하긴 하지만, 제가 이락 님을 봐서 특별히! 물건을 내어 드리죠. 일단 한번 줘 보시겠어요? 제가 감정을 한번,”

그때 이락이 율의 손을 거둬들이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탁, 튕긴다. 주인이 저도 모르게 덥석 받고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면 충분하지?”

주인은 울상을 지으며 징징거렸다.

“왜 이러십니까. 아실 만한 분이!”

“잘 알지. 네가 이화 상단에서 좋은 물건만 떼다 파는 걸.”

“그렇게 잘 아시면서!”

“그런데 요즘 상단이 아닌 다른 데서 물건을 가져온다는 소문이 있더군. 오늘 보니 사실인가 봐. 상점 안에 이상한 것들이 잔뜩 몰려와 있네?”

이상한 것들? 실내를 둘러봤으나 보이는 거라곤 주인과 율, 이락 셋이 전부였다.

하지만 율과는 다르게 주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더 상세히 말해야 알아먹을까?”

주인이 사색이 되어 괜히 주위를 살피고는 아니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제가 계산을 잘못한 거 같아요. 이락 님 말씀이 맞습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이락이 무언가 주인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좋은 물건을 싸게 가져가자니 미안해진다.

이락에게 끌려 밖으로 나온 율은 뒤를 돌아봤다. 상점 주인이 바가지에 무언가를 담아 이쪽을 향해서 뿌린다. 용궁에서는 혼인날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에게 복을 받으라는 의미로 조갯가루를 뿌려 주는데 색은 비슷하나 아무리 봐도 저건 조갯가루처럼 보이진 않았다.

“주인 양반이 화가 많이 난 듯합니다….”

이락이 돌아보자 주인이 안으로 후다닥 도망가 버린다.

“둬. 신경 쓸 필요 없는 놈이다.”

“근데 이상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락은 대답 대신 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율은 그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여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말똥말똥 떴다. 그런데 갑자기 손을 뻗어 율의 갓끈을 고쳐 매 준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갓끈이 느슨하게 풀린 것도 몰랐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황급히 그의 손을 거두고 끈을 조여 매는데 이락이 끈을 툭 건드린다.

“아까 그것은 너한테 더 어울렸을 텐데.”

“예?”

“너 말이다. 아무 데서나 진주를 보이지 마라. 용궁은 모르지만 여기선 안돼.”

“왜요…?”

정말 궁금하여 물은 것인데 이락이 묘하게 웃는다.

“눈뜨고 코 베어 가는 곳이거든.”

“무슨 뜻입니까…?”

“아무도 믿지 말라는 뜻.”

율은 살짝 감동하였다. 외모만 보고 오해했는데 이렇게까지 챙겨 주고 걱정해 주다니. 어쩌면 이락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토끼일지도 모른다. 이런 자를 데려다 그런 고초를 겪게 해야 하다니. 가슴은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자꾸만 무거워졌다.

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의원에게 들를 차례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저잣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커다란 대문이 나타났고 그 앞에는 군사로 보이는 이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군사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 안으로 사라졌고, 율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락을 돌아봤다.

“이락 님….”

“볼일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끼이익, 그때 커다란 대문이 열리고 똑같은 옷을 입은 병사 수십 명이 뛰쳐나와 둘을 에워싼다. 율은 기겁하여 이락의 뒤로 몸을 숨겼다. 마침 병사 사이에서 푸른 관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이락, 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나타났느냐.”

율은 이락을 바라봤다. 너무도 태연한 이락의 모습을 보니 혼란스럽다.

“섭섭하군. 나를 잡아들이라고 해서 내 발로 직접 왔는데, 왜. 불만이야?”

“사특한 놈이 이번엔 또 무슨 농간을 부리려고!”

이락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혼자 남은 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이락을 향해 모여든다. 멈춰라, 이놈! 하지만 이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관복 입은 사내에게 근접하였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였으나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는다. 순간 관복 입은 사내의 시선이 율에게로 옮겨 온다. 왜 저러지? 발끝에서부터 불안감이 타고 올라온다. 율은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하고 뒤로 한 발 두 발 물러섰다.

“뭐라? 그럼 저게 용궁에 사는 자라란 말인가?”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데 병사 여럿이 먼저 와 퇴로를 막는다. 이제는 이락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너희 왕에게 내가 올리는 진상품이라고 전하거라.”

“진상품?”

“대신 내 목에 붙은 현상금은 이제 없는 셈 치자고.”

정 쓸데가 없거든 너희 왕 몸보신이나 시켜 줘. 자라탕이 몸에 좋은 건 너도 알 거야. 게다가 용궁에서 왔으니 효험이 더 뛰어나겠지. 자라탕이란 말에 율이 기겁하여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았다. 저를 둘러싼 병사들의 칼끝이 언제라도 공격할 것만 같아 두려움에 사지가 덜덜 떨린다.

율은 이락을 향해 소리쳤다.

“이, 이락 님!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돌아보는 이락의 얼굴에서 조금 전 보여 주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어째서 저한테….”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이락이 비로소 미소 짓는다.

“경고했잖아. 코 베이지 않게 조심하라고.”

냉소적으로 웃는 그의 얼굴에서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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