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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2화 (2/102)
  • 2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 어찌 제게 그런 일을!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좌의정 대감!”

    율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갑자기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아 고개를 들어 대신들의 표정을 살폈다. 대부분 회피하기 바빴고 상석에 있는 좌의정, 우의정만이 긴 수염을 쓸며 율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럼 어쩌겠나. 우리 중 육지에 갈 수 있는 게 자네밖에 없는걸. 거기다 자네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질 않은가.”

    “제, 제가요…?”

    “그래, 맞아. 예전에 바다에 빠진 처자를 구한 적이 있었지. 그 처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심, 심 뭐시기였는데. 하여튼, 이 일에는 자네가 적격이네.”

    율은 강하게 부정하였다. 인간을 구한 것과 육지에 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니던가.

    “구, 구명환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먹으면 누구든 육지에 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보게, 별주부. 자네 구명환이 얼마나 귀한 약재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리인가. 거기다 토끼를 찾는 데 며칠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구명환을 먹으면 육지에서 머무는 것은 가능하나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약효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선뜻 나서는 자가 없는 건 당연했다.

    “어려울 것 없네. 가서 토끼만 데리고 오면 돼.”

    “대감. 저는 토끼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서책에선 봤을 거 아닌가.”

    율은 입을 다물었다. 실은 육지 도감에서 토끼를 본 적이 있다. 작고 하얗고 앙증맞게 귀여우며 눈이 동그란. 물론 수인의 모습은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제가 아는 토끼는 그저 작은 솜털 같았다. 하지만 율이 망설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토끼를 찾아 데려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말해 보게.”

    “살아 있는 목숨을 약으로 쓰는 건 도저히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런 무엄한!”

    저 멀리 서 있던 복어 대신이 불룩한 뺨을 씰룩이며 냅다 고함을 쳤다.

    “전하를 살리는 일이네. 신하 된 도리로 어떤 일이든 해야지. 할 짓 못 할 짓 가리다가 전하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종6품이면 시키는 건 뭐든 해야지. 우리 땐 까라면 깠는데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 저자의 부친이 좌종사 방희 아니던가. 처가 쓰러진 뒤로 지금은 폐인처럼 지내지만 일 하나는 똑바로 잘했는데, 자식은 어찌 저렇게 유약하게 키웠을꼬. 쯧쯧.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율은 울컥하여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모두 그만하세요.”

    때마침 기진이 나타났고, 대신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용궁 밖에서와는 다르게 그는 수가 놓인 흰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빛나는 용모 때문인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느껴졌다. 기진은 가까이 와 한쪽 무릎을 꿇고 다정하게 율을 불렀다.

    “별주부.”

    “예, 왕자마마….”

    “내 이리 부탁하네. 아버님의 병환이 저리 심각한데 자식이 되어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자네라면 믿을 수 있을 거 같네. 그러니 부디, 내 청을 들어주게.”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율은 잠시 넋을 놨다가 정신 차렸다. 앞쪽에 서 있는 대신들의 못마땅한 시선이 이곳까지 날아왔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어도 그들은 기진을 무시했고 이 넓은 궁에서 기진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가여운 사람. 그래서 지켜 주고 싶은 사람. 율은 생각했다. 내가 토끼를 데려오면 기진을 보는 대신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조금은 인정해 주지 않을까.

    “그러면 왕자마마, 하나만 약조해 주십시오.”

    “약조라?”

    “토끼의 고환을 떼고 나면… 치료하여 꼭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 말에 기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구나.

    “좋아. 약조하지. 그자의 목숨을 거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고민하던 율은 마음을 굳힌 뒤 고개를 조아렸다.

    “육지에 다녀오겠습니다.”

    대신들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진다.

    “잘 생각했네. 진작 그랬어야지. 대신 다녀오면 자네에게 포상을 내리겠네.”

    “전하의 목숨을 살리는데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혹시 아나? 전하께서 원하는 건 다 들어주실지.”

    듣고 있던 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든… 다 말입니까?”

    좌의정이 고개를 끄덕였고 율의 시선은 기진에게 옮겨 갔다. 원하는 건 뭐든….

    부귀영화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불쌍한 왕자가 궁에서만큼은 편히 지내길 원했다. 그 소원을 왕에게 빌어도 될까. 진짜인지 아닌지는 토끼를 데리고 오면 알게 되겠지. 율은 그들을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별주부, 방율.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육지로 가 반드시 토끼를 데리고 돌아오겠나이다.”

    ***

    집으로 들어온 율은 마당에 뒹구는 집기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루에서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대자로 뻗어 잠들어 있었다. 집기들을 정리한 뒤 아버지를 일으키려 했으나 덩치가 크고 만취한 그를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포기하고 안방으로 들어가자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여인이 누워 있었다.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녀가 겨우 눈을 뜨고 아들을 바라본다. 늘 총기 넘치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흐릿하였고, 복숭아처럼 발그스레 하던 뺨은 옴폭 패여 뼈와 거죽만 남아 있었다.

    [토끼의 고환을 먹으면 어떤 병도 나을 수 있다.]

    어머니가 쓰러진 지 벌써 수년째다.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다녀갔고 별의별 약재를 써 봐도 모친의 병은 낫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에 빠져 일도 관뒀고, 날이 갈수록 가세는 기울어 일하던 하인들도 떠난 지 오래였다. 혹시 육지에 가면 모친에게 맞는 약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율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으…. 으….”

    그녀가 마른 입술을 달싹여도 새어 나오는 건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뿐이었다.

    율은 모친의 손을 잡고서는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집을 떠나 먼 곳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제가 없더라도 끼니는 꼭 드셔야 해요.”

    끼니라고 해 봤자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건 멀건 미음뿐이었다. 마치 대답하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그것도 힘든지 이내 감아 버린다. 율은 헝클어진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이불을 목 아래까지 꼼꼼하게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던 율은 이제 막 집 안으로 들어서던 선과 마주쳤다. 머리에 짐을 이고 있던 그녀가 이크 하며, 보따리를 등 뒤로 얼른 감춘다.

    “선이, 너!”

    선이 헤헤,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야단치지 마십시오. 저 오늘 학당에 갔습니다. 가다가 좌의정 댁에서 일거리를 주신다고 하여 잠깐 들른 것뿐입니다.”

    보따리를 빼앗으려 하자 선이 요리조리 피한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이 시각에 어쩐 일이세요. 궁에 계신 줄 알았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아픈 어머니를 어린 동생에게 맡겨 놓고 육지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았으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누군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뜻밖의 손님에 율은 화들짝 놀라 뛰쳐나갔다.

    “왕자마마!”

    선도 놀랐는지 돌아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왕자마마. 기진이 궁 밖으로 나와 돌아다닐 때는 늘 혼자였는데 오늘은 같이 온 시종들이 있었다. 그들은 집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커다란 자루를 메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어디다 옮기면 됩니까?”

    “저기, 창고에 일단 쌓아 두게.”

    율은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쳐다봤다.

    “이게 다 뭡니까, 마마.”

    “자네를 육지로 보내는 데 급급하여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어. 없는 동안 식솔들은 내가 보살피겠네. 모친을 돌볼 이도 알아보라 하였으니 염려치 말게.”

    “그,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미안해서 그래. 자네한테 무거운 짐을 떠맡긴 거 같아 마음이 좋지를 않아.”

    속상한 표정을 하던 기진은 율의 손을 잡았다. 놀라서 빼려고 하자 손에 힘을 준다. 손이 불에 덴 듯 뜨겁다. 아니 뜨겁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 것이다. 그 불이 목과 뺨으로 순식간에 옮겨 갔다. 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기어코 빼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자네 얼굴이….”

    “송구합니다. 고, 고뿔에 걸린 듯한데 마마께 옮길까 염려되어 그만….”

    혹 열이 나는 게야? 이마를 만지려 하기에 율은 후다닥 뒤로 도망쳤다. 그 모양새가 웃겼는지 기진이 살짝 당황해하다 미소 짓는다. 율 또한 창피하고 당혹스러워 말을 둘러댔다.

    “아주 가벼운 고뿔입니다. 떠나는 덴 지장 없을 것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지그시 바라보던 기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혹시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알려 주게.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리겠네.”

    “예.”

    “건강히 잘 다녀오고.”

    “예….”

    “그리고 말일세….”

    율은 고개를 들어 기진을 바라봤다.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하여 눈빛을 반짝이는데 기진이 말을 잇는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주저 없이 돌아와.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한테는 자네도 중요해.”

    아, 율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하였다.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끄덕이자 기진이 어깨에 잠시 손을 얹더니 돌아선다. 그만 가도록 하지. 기진과 그를 따라온 시종들이 사라지고 난 뒤 율은 마루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선이 잽싸게 다가오더니 실실 웃는다.

    “오라버니. 설마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한 겁니까?”

    “무, 무슨 소리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율은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손바닥으로 뜨거워진 뺨을 감쌌다. 어릴 적, 그러니까 수컷과 암컷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간 궁에서 기진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에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해 혼인하고 싶다고 큰 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다.

    기진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은 아직도 종종 율을 놀려 댔다. 어린 것이 기억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옛 추억을 떠올리던 율의 얼굴은 현실로 돌아오며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 일단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마음을 다잡은 그는 곧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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