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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전-1화 (1/102)
  • 1화

    달그닥, 달그닥, 궤짝을 실은 달구지 여러 대가 산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앞에는 무사들이, 그리고 뒤에서는 갓을 쓴 양반이 거드름을 피우며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금산의 경계로 들어간 지 한참지났을 때 휘이-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고 수풀 사이에서 낯선 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웬 놈들이냐?”

    그들 중 덩치 큰 곰 하나가 능글거리며 웃더니 의자를 들고 와 한가운데를 딱 가로막는다.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수인들 사이로 눈에 띄는 한 명이 등장하였다. 커다란 키와 단단한 몸집. 그리고 쫑긋 솟은 두 귀까지. 양반과 무사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토, 토끼?”

    설마, 저놈이 그 악명 높은….

    토끼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기대앉아 장죽을 물고 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양반은 기선 제압을 하려 고함을 쳤다.

    “비켜라. 이것이 어느 댁으로 가는지 알고 감히!”

    그러자 갈색 귀를 가진 곰이 앞으로 나섰다.

    “너야말로 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고 떠드느냐,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토끼가 손을 내젓는다. 집어치워라. 저놈하고 혼인할 것도 아닌데, 소개는 해서 뭣 하게.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들 앞으로 간다. 어울리지 않는 귀를 달고서 뿜어내는 위압감은 말도 못 하게 섬뜩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눈동자는 이승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며 단단한 몸은 어지간한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도 이기기 힘들 것 같았다.

    칼자루를 쥔 무사들의 손에선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고 토끼는 어울리지 않게 싱긋 웃었다.

    “검을 뽑아 봐라. 어떻게 되는지.”

    무사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었고 양반은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없애지 않고!”

    무사 하나가 선두로 나서 용감하게 달려들었는데, 토끼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하더니 무사의 다리를 걷어차고, 앞으로 고꾸라지기 무섭게 팔을 비틀어 버린다. 우두둑 뼈가 부서지며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고 지켜보던 이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간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저리 빠른 자는 보지 못하였어.

    다들 겁을 먹은 가운데 양반은 아랫것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 밥값도 못 하는 버러지들! 보고만 있을 거냐! 저놈을 당장,”

    탁, 토끼가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발끝으로 튕기고는 그대로 칼자루를 걷어찬다. 직선으로 날아간 검은 양반이 쓰고 있던 갓을 관통했다. 졸지에 머리 위로 칼이 꽂히자 놀란 양반이 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말들이 날뛰었다. 사태 파악이 빠른 무사들은 일제히 달아났고 결국 남은 건 갓에 칼을 매달고 있는 양반뿐이었다. 양반은 코앞까지 다가온 토끼를 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아,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소, 나는 그저,”

    토끼가 손을 뻗자 양반이 비명을 지른다. 토끼는 갓에 꽂혀 있던 검을 슥 빼서는 볕에 비추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날이 엉망이구나. 하여튼 요즘 것들은 장인 정신이 없다니까. 한마디를 뱉더니 검을 홱 던지고는 뒤돌아 가 버린다. 양반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고, 곧 토끼의 부하들이 갈취한 수레를 끌고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

    “그래, 전하의 상태는 어떠하신가.”

    모여 있던 대신들은 조금 전 용왕의 진맥을 마치고 나온 어의를 향해 몰려들었다. 어의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전혀 차도가 없사옵니다.”

    어의의 말에 좌의정 고래가 버럭 호통을 내질렀다.

    “아니, 이보게! 벌써 스무닷새가 넘어가질 않는가!”

    “명의라고 하여 믿었더니, 에잇!”

    “자네가 그러고도 용궁 최고의 의술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는가!”

    비난이 이어지자 어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긴 꼬리만 파들파들 떨었다. 대신들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으나 그들 역시 다른 방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바다에 사는 용하다는 명의들이 모두 다녀갔지만, 왕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병의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였다.

    서로 탄식만 하는 가운데 잠자코 듣고 있던 상어 대신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방도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대신들의 이목이 상어에게 쏠렸다.

    “왜 작년 전하의 탄신일에 육지에 사는 신령이 다녀간 일이 있었지요.”

    “그 곱상하게 생긴 신령 말인가. 기억나네. 어찌나 건방을 떨던지.”

    “혹, 그자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다들 나이가 많아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작년 일을 기억해 내라니.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였고 상어는 말을 이어 갔다.

    “그날 제가 전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전하의 체면에 누가 될지도 모르지만….”

    말끝을 흐리자 대신들이 채근하기 시작했다.

    “이보게. 뜸 들이지 말고 본론을 말하게. 숨넘어가겠어.”

    “전하께서 색사를 밝히시는 건 모두 아실 겁니다. 그래서 정력에 좋다는 건 죄다 구해다 드셨지요.”

    흠, 대신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용왕이 색을 밝히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후궁만 해도 이름을 외우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자손은 매우 적었고 거기다 하나뿐인 아들은 후궁도 아닌 기녀의 몸에서 태어나 후계로 삼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신령의 말인즉 전하의 체질상 색에 빠지면 건강을 해치기 쉽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색을 멀리하고 마음을 정갈히 하여 백성을 돌보는 일에 힘을 쓰라 하였습니다.”

    대신들은 탄식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계속하여 후궁을 들이셨단 말인가.

    “전하는 그때 무어라고 답하셨는가.”

    “그러니까 그게… 시중들던 나인의 치마 속에 손을 넣느라 정신이 없으셨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왕이라지만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쩌랴. 후사가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지금 왕이 죽기라도 하면 남해, 동해, 북해를 다스리는 용왕들이 이곳을 넘볼 게 뻔한 일인데. 당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용왕의 목숨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 신령이 다른 말도 하였는가.”

    상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살폈고 궁인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그자가 전하의 병환이 깊어지거든 육지에 가서 약을 구해 오면 된다, 조언을 주었습니다.”

    대신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육지에서 약을? 자네 그 얘길 왜 이제 하는 게야. 어서 말해 보게. 그 약이 무엇인가? 어디서, 어떻게 구하면 된단 말인가? 대신들의 재촉에 상어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바로….

    “토끼입니다.”

    “토끼?”

    처음 듣는 이름이다.

    “토끼란 자는 본래 다산의 상징으로 그 신체 일부를 떼어다 고아 먹이면 전하의 병이 씻은 듯 나을 거라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사옵니다.”

    대신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잡아다 병을 치료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신체 일부를 고아 먹인다? 오래전 육지와 전쟁을 치른 후 교류가 끊긴 지 수백 년이 지났다. 이런 상황에서 육지에 있는 수인을 잡아다 왕의 병을 치료한다는 건 영 찜찜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부위가 어디라든가.”

    여태 잠자코 듣고 있던 우의정 가자미가 나섰다. 평소 대신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받는 자였다.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 이런 거면 뭐 어려울 건 없겠지. 내 적당한 이를 보내 가져오도록 하지. 역시 우의정이라며 다들 우러러보는데 상어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가자미에게 다가갔다.

    “그게….”

    속닥속닥.

    순간 가자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뭐라, 고환?!”

    ***

    시장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서책방은 별주부 방율이 쉬는 날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하나였다. 케케묵은 종이와 먼지 냄새, 그리고 문밖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걱정이 사라지고 그 옛날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마음이 평안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선반 제일 위에 있는 책을 꺼내 먼지를 탈탈 털어 낸 뒤 창가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첫 장을 막 넘기려던 순간 책장과 벽 사이 틈에서 삐죽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빼내자 겉면이 붉은 천으로 싸인 책이 딸려 나왔다.

    왜 이런 곳에 숨겨 뒀지?

    무심코 앞 장을 펼친 율은 곧바로 기겁하고 그것을 내던졌다.

    헉! 이게 뭐야.

    혹여 누가 봤을까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조심스럽게 책을 주워 앞 장을 다시 넘겼다. 거기엔 암컷과 수컷의 교미가 그림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망측해라. 대체 이런 책을 왜 여기에…. 라고 말은 하면서도 율은 얼굴이 빨개져 눈을 떼지 못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책에선 자신이 아는 구멍이 아닌 다른 구멍에다가 양물을 집어넣고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정신이 팔려 입을 벌리고 쳐다보던 그때 얼굴과 책 사이로 누군가 불쑥 나타난다.

    “율. 자네 무얼 보고 있는 건가.”

    으악, 율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손에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하필이면 양쪽으로 펼쳐져 암수가 서로의 아래를 핥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율은 하얗게 질려 책과 앞에 서 있는 단정한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런 모습을 들키다니. 수치심에 게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기진은 말릴 새도 없이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아, 아니 됩니다. 보지 마십시오!”

    황급히 일어나 그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려다 몸이 기우뚱하며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기분 좋은 향이 훅 코끝을 간지럽혔고, 그것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가슴을 뛰게 했다. 율은 황급히 떨어졌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소리쳤다.

    “마마, 제, 제가 보려던 것이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구석에 떨어져 있길래 무엇인지 궁금하여 펼쳤을 뿐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저는 일부러 보려던 게 아닙니다.”

    조용하다.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드니 기진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달달한 당과와도 같은 미소에 얼마나 많은 용궁의 처자들이 밤을 지새우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엔 처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율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떨구자 기진이 책을 덮어 한쪽으로 치운다.

    “약관이 되었는데 자네가 그걸 본다고 하여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율은 여전히 발끝에 시선을 두고 귀를 붉힌 채 서 있었다.

    “진짭니다…. 제가 보려던 게 아닙니다….”

    “알았네. 내 믿어 주지.”

    고개를 들자 그가 그림처럼 웃고 서 있다.

    “한데, 마마께서는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오늘따라 그의 얼굴이 어둡다. 기진은 용왕의 자식 중 유일한 아들로 기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엔 궁 밖에서 자라다 왕에게 후사가 없으니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출신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율은 그런 기진이 안쓰러웠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 주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근심이 있으십니까…?”

    근심이라…. 기진은 조금 전 율이 한 말을 입으로 한번 되뇌더니 몸을 돌려 율을 마주 봤다. 훌쩍 큰 그의 키를 따라잡느라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궁에서 자네를 찾길래 내가 대신하여 나왔네.”

    궁에서 찾는다는 말에 율은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은 오늘 쉬는 날이었고 말단 보직으로 하루 없다고 하여도 티가 나는 자리가 아니었다. 영문을 몰라 쳐다보자 기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일단 가세. 가면서 얘길 나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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