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139/141)

 비운의 신데렐라 <33>   

성명: 황보경

생년월일: 1979년 12월….

최종학력: 경기도 광명시 ** 중학교 2학년 중퇴.

특기: 다림질

취미: 제과제빵

에….또…..

음…..

쓸 게 없군.

“에휴……”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이력서 쓰던 손을 멈추고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지하에 있는 진이형의 가게 뒷방은 한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침침하다. 서랍장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디지털 시계가 오후 6시

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곧 진이형이 올 시간인데….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나도 나가서 홀도 한 번 쓸어줘야 하고 쟁반도 날라야 하고 테이블도 정리해야 하는데…..

그치만 아무 것도 하기 싫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함에 빠져 차가운 방바닥에 기운없이 뒹굴거리고 있

는데 덜컹 하고 가게의 주방과 뒷방 사이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진이형이 어깨

에 묻은 눈을 털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보경아 밖에 눈 너무 많이 온,…야. 너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뭐해?”

말하다 말고 놀란 얼굴로 방 한구석에 누워있는 나를 쳐다본다.

“으응…그냥…”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구겨진 종이들을 더듬더듬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맨바닥에 그냥 누워있어? 전기장판이라도 좀 켜지.”

말을 하며 진이형은 목도리를 풀어 방 한구석에 던져놓고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밥은 좀 먹었어? 영우가 그러는데 너 오늘 하루종일 꼼짝도 안했다면서?”

“맨날 일도 안 하고 노는데 밥은 무슨….”

“쯧, 또 그런 소리한다.”

“그런 거 신경쓰지 마, 형. 내가 알아서 할께.”

기운없는 내 목소리에 진이형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

거렸다가 이내 포기한듯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들었다.

“….또 이력서 쓰는 거야?”

“응…언제까지 이렇게 놀고먹을 수는 없쟎아…”

“너도 참…” 

걱정스러운 얼굴의 진이형은 끝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잠시 우리 둘 사이에는 익숙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형.”

“응? 왜.”

낮은 목소리에 진이형은 깜짝 놀라더니 곧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한테….연락온 거….없지?”

“…응.”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일그러지는 얼굴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보경아.”

내가 고개를 숙이자 진이형이 안스러운듯 내 이름을 불렀다.

괜챦아, 형. 나는.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괜챦아.

“….너네 둘…너무…사는 세계가 다르쟎아.”

무릎 위에 떨구어진 내 손을 잡으며 진이형이 조심스레 말한 한 마디.

망설이다 망설이다 한 말인 걸 아는만큼 나는 고개를 들고 밝은 표정으로 웃어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집을 나와서 하도 울어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여전히 놈을 생각하면 죽고 싶을만큼 심장이 아프다.

그 집을 나온 날 새벽녘의 거리를 헤매다 아무래도 갈 곳이 없어 진이형에게 전화를 하

자 형은 놀란 얼굴로 택시를 타고 달려와 주었다.

한 손에는 익숙치 않은 새벽냉기에 잎이 뻣뻣해진 벤자민 화분을 들고 한 손에는 낡은

 슈트 케이스를 든 채 나는 눈물이 얼어서 아프게 느껴지는 얼굴을 진이형의 어깨에 묻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울면서 진이형에게 말했다.

형에게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택시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40분이 넘게 걸리는 형의 가게까지 가며 나는 그 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형에게 말해 버렸다.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진이형은 내가 이야기를 다

 마치고 탈진해서 자리에 눕자 형이 잘못했다며 나만큼이나 서럽게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흘째.

당연한 일이겠지만 놈에게서는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

안할 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런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사실은 날마다 놈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버렸으니 내가 간 곳을 모르더라도 진이형에게라도 연락하지 않을까.

아니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라도 나를 찾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나는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그렇게 힘들게 나를 찾을 필요는…..없는 거다.

어차피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두 달 동안 자신의 집을 채웠던 그 빈자리는 다시 다른 사람이 채우면 될 테니까.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 후회하고 있단 말야.

이렇게 네가 보고싶을 줄 알았다면 어떤 수모를 받더라도 그 집에서 참고 견디는 건데.

말없이 집을 나와버리기 전에 너를 좋아했었다고 한 마디 말이라도 해볼 걸.

네가 내 첫사랑이라고, 태어나서 누군가를 그렇게 절실하게 좋아해 본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지.

바보같이 왜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이렇게 슬플 줄 몰랐다.

성도에게 두들겨 맞고 한겨울에 맨몸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는데.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나 자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절망하진 않았는데.

“씨이….아무리 그렇다고 찾지도 않냐?”

진이형이 나가 버리고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나는 볼을 적

시는 눈물을 닦으며 야속한 놈을 원망했다.

차라리 차라리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아무리 놈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언제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비탄에 잠겨있을 수도 없어 나는

 상처입은 마음을 추스리고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일도 안하고 누워만 지내면서 진이형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너무 미안해 이리저리 알

아본 결과 진이형이 아는 친구의 선배가 한다는 작은 도시락집에 취직이 되었다. 열다섯

평이 채 못되는 작은 가게였지만 주변에 오가는 사람도 많고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젊

은 부부만으로는 힘들어 시간제로 나를 채용해 준 것이다.

비록 아르바이트지만 일하는 시간에 비해 보수도 제법 좋고 주인 부부도 친절해 될 수 있으면 오래 이곳에 있을 생각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주문이 들어오면 소연씨 ㅡ 이 집 부인의 이름이다 ㅡ 가 만들어 놓은 반

찬을 예쁘게 담아 포장하고 가끔씩 단체주문으로 들어온 김밥을 싸는 정도였다. 일견 쉬운듯 

보이지만 포장이 많으면 정신이 없고 단체주문까지 겹치면 두 세시간은 물마실 시간도 없을 정

도로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처음 일주일간은 집에 들어와서도 팔다리가 뻐근했다.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자 일은 편해졌고 한가할 때는 새벽에 들여놓은 야채들을 다듬는 일도 싫지 않았다.

바쁜 게 좋았다. 정신없이 생각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쁜게 좋았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않게 될 테니까.

끊임없이 머릿 속에 떠오르는 놈의 이름을….잊을 수 있을 테니까.

저녁에 일이 끝나면 클럽에 나가기 전의 윤아와 함께 방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가진 돈이 적어 선택의 폭은 그렇게 넓지 않았지만 발이 부르트도록 둘이 돌아다닌 결과 윤

아네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동네에 욕실과 부엌 하나가 붙은 간소한 방을 월세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이었지만 장판에 담뱃불 자국이 좀 있는 걸 제외하면

 내부는 깨끗했고 무엇보다도 남향이라 볕이 잘 든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하는 날엔 아르바이트 하는 가게의 명규형과 진이형, 윤아와 승화가 모두 와주었다.

진이형은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같은 얼굴로 내가 싫다는데도 억지로 중고 냉장고

와 티비를 들여주었고 윤아는 안 쓰는 밥솥과 냄비같은 것을 잔뜩 승화에게 들려서 가지고 왔다.

그렇게 구한 집에서 나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밥을 먹고 조용히 잠을 잤다.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기대 소란스럽게 노는 동네 아이들을 구경하다 시간이 

되면 명규형네 가게로 출근하고 저녁 때 집에 돌아오면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이 차차 안정되어 가는 듯 싶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놈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그 집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마치 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새벽에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나를 부르던 놈의 목소리, 놈에게서 나던 라임향의 가벼운 체취,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눈썹을 약간 모으는 특유의 버릇까지도.

나는 꼭꼭 마음 속에 송두리째 잘 싸서 앙금처럼 깊이 가라앉혀 버렸던 것이다.

다시는 물 위로 뜨는 일이 없도록.  

이대로 영영 다시는 놈을 생각하지 않도록.

그치만 그게 잊으려고 한다고 잊어지는 일인가.

“너…어째 좀 너무 마른 것 같다?”

윤아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 소리부터 했다.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슬슬 

그 언저리만 맴돌며 말을 참는 진이형과는 달리 윤아는 성격이 직설적이라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참지를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화제가 곧바로 제일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옮겨간다.

“성욱이 한테는 연락없지?”

욱신, 하고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반응한다.

아아 극복해야 해.

안 그러면 지난 한 달 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구.

“몰라.”

“하긴. 없으니까 네가 이러고 있지.”

가까스로 카레가 끓고있던 냄비를 뒤적이던 손길을 멈추고 평온을 위장했지만

 윤아는 눈치가 빠른 건지 둔한 건지 무신경하게 그런 말을 꺼내 내 속을 뒤집는다.

이럴 때 보면 이건 정말 친구도 아냐 ㅠㅠ  

“밥이나 먹자.”

냄비 속에서 다 끓지도 않은 카레를 들어 상에 내려놓고 나는 굳은 얼굴로 밥을 퍼서 부엌바닥에 앉았다. 

더 이상 놈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마! 라는 내 무언의 위협을 느꼈는지 윤아도 별다른 말없이 나를 따라 상 앞에 앉는다.

“야, 그 수저는 뭐야?”

빈약한 수저통을 뒤적여 숟가락을 놓고 있는데 별안간 윤아가 놀란 얼굴로 말하고 상 위를 가리켰다. 

“응?”

“이거 말야. 왜 수저를 세 개씩이나 놨어? 너랑 나 둘뿐인데.”

“아 이거….”

나는 멍한 어조로 말하며 상 위에 놓인 다른 싸구려 스텐레스 수저와는 질

적으로 다른 은수저 한 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거 성욱이 건데….”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나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상 위에 올려놓곤 하는 게

 버릇이 되어 윤아앞에서도 세 개를 차려놓은 것이다.

“얘가 진짜!”

윤아는 딱 소리가 나도록 내 머리를 때리더니 거친 몸짓으로 상 위에

 올려진 수저를 쓸어버리듯 수저통으로 떨어뜨렸다.

“왜 그래에, 너. 그거 이리 줘.”

그게 있어야지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야.

이렇게 놈의 수저를 맞은편에 올려놓으면 어디선가 놈이 젖은 머리를 털

며 나타나서 내 앞에앉을 것 같단 말야.

하지만 내 애처로운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윤아는 수저통을 멀리 치워

버리더니 수저로 밥그릇을 땅땅 치며 화를 냈다.

“너 진짜 음산하게 왜 그래? 제사 지내냐? 멀쩡히 살아있는 걔 수저는 왜 

밥상에 놓고 밥 먹을 때마다 머리를 조아려? 걔가 죽기라도 했냐?”

차라리 죽어서 헤어진 거라면 낫지. 

보고 싶어도 못 만나는 이 마음….넌 몰라. 한윤아.

“안되겠다. 내가 이번 기회에 새 애인을 구해줄 테니까 니 이상형을 말해봐.  

승화 대학 친구들 중에 잘난 놈들 쌔고 쌨으니까 최대한 근접한 놈으로 해줄께.”

“…이상형?”

“그래. 얼른 말해. 내 맘 바뀌기 전에.”

윤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손 안에 쥔 수저만 만지작거렸다.

내 이상형은…..

“키 크고….”

“응.”

“얼굴 잘 생기고….”

“또.” 

“돈도 많고….”

“……”

“옷도 잘 입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아가 또 딱 소리 나게 내 머리를 때렸다.

“아야!.”

“야, 차라리 강성욱이라고 그냥 이름을 말해!”

“아퍼어….”

“아프라고 때린 거야! 넌 자존심도 없냐? 너를 그렇게 내쫓은 놈

이 뭐가 좋다고 헤어나지를 못해! ”

“…넌 승화가 너 내쫓아도 그렇게 금방 잊을 수 있어?”

내 말에 윤아는 뭐? 하더니 아까보다 더 무섭게 화를 냈다.

“야! 어디다가 우리 승화를 대는 거야! 그런 무자비하고 싸가지없고 냉정

한 놈이랑 우리 천사같은 승화가 똑같애?!”

예를 잘못 들었나…

하지만 윤아의 입으로 놈에 대한 험담을 들으니까 심히 기분이 안 좋았다.

그치만 여기서 윤아의 말을 반박했다간 밥 먹는 내내 윤아가 놈의 이야기만 할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물고 싸구려 리놀륨 바닥에 난 담뱃불 자국만 바라보았다.

누가 낸 자국일까.

둥그렇게 패인 담뱃불 자국은 방바닥에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성욱이는 담배같은 건 피우지 않는데.

국은 항상 조용히 숟가락으로 떠먹고 반숙한 계란은 먹지 않아.

아침을 먹기 전에 신문을 읽는 버릇이 있고 홍차에는 꼭 우유를 넣어주어야만 해.

그리고 또….

리놀륨 바닥으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보경아…!”

윤아가 당황한듯 내 이름을 불렀지만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하지만 놈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놈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몇 번의 눈이 더 오고 비가 내리고 날씨가 풀려 어느새 계절은 봄이 되어 있었다.

*

*

*

“보경씨. 오늘은 좀 피곤한가 봐요?”

“그래요?”

“응…다듬는 손놀림이 어째 더딘 것 같아. 뭐 그래도 나보다 배는 빠르지만.”

“잘 하시는데요.”

“설마, 보경씨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소연씨는 웃으며 그렇게 말하더니 끝이 약간 말려 들어간 시금치잎을 조심스레 뜯어냈다.

한차례 점심 손님이 지나가고 한가해진 오후, 나와 그녀는 홀에 나와 테이

블 위에 수북히 쌓인 시금치를 다듬고 있었다. 

원래 재료준비는 자신의 일이라며 소연씨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만삭

의 몸으로 가게 의자에 기우뚱하게 앉아 일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 위태

로와 내가 억지로 칼을 빼앗앗던 것이다. 하지만 한 포기 더 집적거리더니 역

시 힘들었는지 소연씨는 칼을 놓고 비스듬히 의자 뒤의 냉장고에 머리를 기대며 부른 배에 손을 얹었다.

“이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몰라. 길 건너 미용실에 또 배달가야 하는데.”

“아, 제가 다녀올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가지 말아요. 나 혼자 있으면 무서워요. 이 사람 금방 올 거야.”

“…..네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눈 앞의 시금치를 다듬기 시작했다. 언제

 진통이 있을 지 모르니까 나라도 있어주는 게 안심이 되겠지.

시금치를 다듬는 내 모습을 바라보다  소연씨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유리문 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날씨 참 좋다….언제 이렇게 꽃들이 피었나 몰라….”

그녀의 말대로 거리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사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외투를 벗어버리고 여자들은 소프

트 아이스크림 같은 색깔의 봄옷차림으로 행복한듯 웃고 있었다.

“나한테도 언제 저런 때가 있었나….싶어….”

지나는 여자들을 보며 한탄하는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왜 웃어요?”

“…저도 저런 때가 있었나 싶어서요.”

저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었을 때가.

“맞아.”

우리 둘이 그렇게 미소짓고 있을 때였다. 딸랑 하고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리

며 붉은색 배달 바구니를 든 명규형이 느긋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여, 두사람 나 없는 동안에 가게는 잘 지키고 있었겠지?”

“당신 왔어요?”

“형 또 배달 있는데….”

“맞다, 거기 미용실? 얼른 줘. 그 아줌마 늦으면 또 신경질 내니까.”

“네, 제가 아까 준비해서….”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고 명규형을 향해 일어서려다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유리문 사이로 가게앞을 지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몹시도 낯익었기 때문이다.

큰 키에 빛을 반사해낼 것 같은 하얀 셔츠, 그리고 몹시도 날카로운 턱선.

“보경씨!!!”

소연씨의 놀란 외침을 뒤로 하고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유

리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어디, 어디로 간 거지?

주위를 미친듯이 두리번 거렸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모

습은 찾을 수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정신나간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

느 한 순간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하얀 셔츠가 눈에 띄었다.

저기 있다!

무작정 그 뒤를 따라 달려가려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성욱이가….아니었다.

아주 많이 닮았지만…한 팔로는 키 작은 여자의 허리를 안고 담배를 피우며 건너는 남자는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니야.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었어.

“왜 그래, 보경아. 무슨 일이야?”

놀란 명규형이 내 뒤를 따라 가게 밖으로 달려나왔다.

“아니에요, 형. 아무 것도….”

“깜짝 놀랐쟎아”

“그냥….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나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걷어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맑고 화사한 봄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끊임없이 뺨에 부딪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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