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22>
제 7화: 수(受)들의 저녁시간
“그건 사랑이야.”
헉 ㅡ
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들고있던 스무개 들이 치즈 한 상자를 바닥에 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사랑이라니, 무슨 사랑?
“사, 사랑?”
“그래. 사랑. 펄링 인 러브.”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자신있
게 단언하더니 다시 자신이 골라놓은 우유의 유통기한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치만…..사랑이라니! 말도 안돼!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이라는 거야?”
입 밖에 내기도 겁이 나는 말이라 있는대로 식은땀을 흘리며 묻자 윤아는 흐음,
하며 우유를 쇼핑카트에 내려놓더니 “자는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온다며?” 하고
삐딱하게 되물었다.
캑. 고작 그것 때문에?
“그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너무 좀…억지스럽지 않아?”
속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자칭 면허없는 정신과 전문의의자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위한 전문 카운셀러인 윤아의 기분을 생각해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더
니 윤아는 역시나 기분이 나쁜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너 같으면 믿을 수 있겠냐?
사랑이라니 누가 누굴? 내가? 그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놈을?
“아니. 우리 둘은 만난지 두 달밖에 되지도 않았고, 또,”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하자 윤아가 그런 나를 가소롭다는듯 쳐다보며 말했다.
“야. 황보경.”
“응?”
“너. 성도랑 만나서 같이 살기로 할 때까지 며칠이나 걸렸냐?”
“…….일주일.”
침묵끝에 나온 내 대답에 윤아는 흐음, 하고 팔짱을 끼더니 봤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야, 너 절대 오해하면 안돼! 그건 어디까지나 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연애는 다 개인적이지, 원래.”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지금!
“너도 알다시피 그 바닥이 원래 다 그렇고, 또, 성도랑은 경우, 그래! 경우가 틀리쟎아!”
“틀리긴 뭐가 틀려? 같이 살면 다 똑같은 거지.”
니 말대로 그게 그렇게 쉽냐….ㅠㅠ
애초에 내가 놈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데 하챦은 자존심 때문에 어물쩡 넘어갔더니 이런 쓸데없는 오해를!
“야! 내가 아무리 애정에 굶주렸어도 그렇지 어떻게 걔 상대로 그런!”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바락 소리치며 흥분했지만 그런 어설픈 모션 따
위 천하의 한윤아를 상대로는 씨도 먹히지 않는다.
“강성욱이 어때서? 흥, 니 옛날 애인보다야 훨씬 낫지. 키 크지, 얼굴 끝내
주지, 돈은 또 좀 많아? 게다가 대학생이라며? 나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얼른
물고 늘어지겠다.”
누가 그걸 몰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란 말야. 그게!
“그치만, 그치만 성욱이는 스트레이트란 말야.”
내 말에 윤아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야. 누군 아니었어? 이거 왜 이러셔. 우리 승화도 맨 처음엔 오리지날 스트레이트
였다구! 알아? 내가 이 미모로 끊임없이 꼬리를 쳐대고 집적거렸으니까 이렇게 된
거지 나 아니면 지금쯤 어디서 어떤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구!”
자랑이다, 자랑이야.
그거야 너네 케이스가 특별한 거지…. 스트레이트를 아무나 넘길 수 있는 줄 알아?
애초에 윤아한테 이런 얘길 꺼낸 내가 잘못이다. 그냥 시장을 보러 나온 김에 둘이서
가벼운 이야기를 하던 것 뿐인데 어디서부터 대화가 이렇게 옆길로 샜는지 정신을 차
려보니 나는 윤아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고 있었다. 뭐 모조리 털어놓
았다고 해봤자 놈의 얼굴만 보면 이상하게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뛴다거나 가끔씩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온다는 것 뿐이지만.
그런데 그게 무슨 사랑이야? 하루종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무슨!
이건 그날 밤 밤새 잠도 못 자고 뒤척이는 내 옆에서 쌕쌕거리며 자더니
다음날 아침 흔적도 없이 일어나서는 사흘내내 새벽에 나갔다 새벽에 들어오고.
덕분에 난 사흘내내 놈의 누나들 뒤치닥거리를 하며 언제 들어오나 하
고 목을 빼고 현관에서 놈을 기다려야만 했다. 누나들의 말이 사실이라
면 놈은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산단 얘긴데 도대체 무슨 공부를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지 사흘동안 놈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잠이 들면 언제 들어왔다 나갔는지 침대아래 벗
어놓은 셔츠가 유일하게 놈이 남겨놓고 간 흔적이었다. 누나들은 누나들
대로 하루종일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지, 나는 나대로 누나들 밥 해먹이
랴 간식 만들어 먹이랴 틈틈이 집안 치우고 빨래하랴 몸이 열개라도 모자
라니 내가 가정부지 베이비 시터냐구.
아무리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이런 상황에서 사랑, 운운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 이 말이지. 내 말은.
괘씸한 놈!
“안 그래?”
분한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는데 윤아가 동의를 구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응? 지금 뭐라고 그랬어?”
내가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자 윤아는 쯧쯧 하고 혀를 찬다.
“넌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성욱이는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물
었다. 도대체 너네 둘은 그런 사이도 아니면서 왜 한 집에 사는 거야? 도대체?”
“….그게…말했쟎아….내가 당분간 갈 곳이 없어서…..”
내가 우물쭈물 하자 윤아는 쳇, 하고 팔짱을 낀 자세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지. 아무리 진이형과 잘 아는 사이라 해도 생판 남인
너를 이유도 없이 자기 집에 묵게 해줄 리가 있어? 그것도 두 달이 넘게.”
이유가 없긴 왜 없어. 내가 그 집안일을 죽도록 하고 있단 말이다!
그치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지.
나 황보경 자존심 하나로 이 날 이 때까지 버텨온 사람이니까.
그러니 제발 더 이상은 나한테 묻지 말아줘. 말 못하는 나도 괴롭단 말야.
내 무언의 애원이 통했는지 그로부터 한동안 윤아는 고개만 갸웃할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저….윤아야. 승화는 언제 와? ”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윤아가 더욱 심각하게 추궁을 할 것 같은 분
위기길래 나는 시계를 보는 척하며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승화? 음…다섯시쯤 오겠다고 했으니까….조금 있으면 오겠네. 그런데 그건 왜?”
왜긴 왜야. 아무래도 상황이 나한테 불리하게 가니까 그런 거지!
“으응…그냥 궁금해서. 승화는 잘 해줘?”
“응. 그, 그렇지 뭐.”
애인 이야기가 나오자 방금 전까지 흥분하던 윤아는 언
제 그랬냐는듯 금방 부끄러운 얼굴로 뺨을 붉혔다.
쳇. 나보고 맨날 단세포라고 놀려대지만 너도 만만치 않아. 한윤아.
휴우….하지만 그 얼굴을 보니 정말 절로 한숨이 나오는게….
파트너를 잘 만나야만 하는 이 세계에서 단박에 그런 대어를 붙잡아
들어앉아버린 윤아는 정말 초행운아라고나 할까. 나야 지난번 우연히 한 번 본
게 다지만 정말 그 부드러운 외모하며 다감한 성격이 누구랑은 진짜 천지차이다
. 물론 윤아가 그 이전에 다른 시시한 남자들과의 사소한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게 좋은 거라고 자기들이 행복하다는데야 할 말이 없지.
“승화는 너랑 있으면 무슨 얘기해?”
이번에는 정말로 궁금해져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자 윤아는 에…하면
서 고개를 숙였다가 들리듯말듯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좋아한다거나…뭐 너 밖에 없다거나…그런 거지. 뭐.”
으으….듣기만 해도 정말 간지럽지구나. 그런 얘기를 진짜 하는 사람이 있단 말야?
나야 이십평생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들어봤어야 말이지.
도대체가 복이 없는건지 팔자가 이런 건지 만나도 꼭 이상한 놈들만 만나니….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놈이 평소에 나한테 무슨 말을 자주 하는지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치만 생각나는 거라고는 하나같이
<됐어>
<필요없어>
<싫어>
이런 말들뿐이니…..크흐흐흑. 사랑은 무슨….! ...ㅠㅠ
“야. 우리 이제 그만 가자.”
생각하니 서글퍼져 나는 카트를 계산대 쪽으로 밀며 기운없는 어조로 윤아를 재촉했다.
“왜? 벌써 다 샀어? 집에 먹을게 하나도 없어서 이것저것 살게 많다며?”
“아냐. 나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얼른 가서 밥해야 돼.”
“너도 참 고생이다. 그래 그 시누이들은 언제 가는데?”
캭. 누가 시누이냐! 누가!
“윤아 너 자꾸 그럴래!”
내가 핏대를 올리자 윤아는 하하, 하고 웃으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미안해. 보경아. 그치만 넌 놀리면 바로바로 반응하는 그 단순한 점이 정말 귀엽다니깐.”
크흑. 너한테 귀염같은 거 아무리 받아도 하나도 즐겁지 않다구.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카트를 밀고 계산대로 향했다.
“화났어?”
뒤따라온 윤아가 조금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걸었지만….
“화 안났어.”
그런 걸 가지고 뭘 화를 내냐. 내 성격이 원래 그런 걸.
“정말?”
“그래. 그리고 나 화나도 오래 안 가쟎아.”
“아유우~ 귀여운 것!”
풀이 죽어 말하는데 윤아가 갑자기 내 몸에 팔을 꼭 두르고 쓱쓱 얼굴을 비벼댔다.
“야아! 사람들이 다 쳐다보쟎아. 뭐하는 거야!”
나보다 덩치도 작은 주제에 날 안아서 어쩌겠다는 거냐. 답답하단 말야! 놔!
품 안에서 마구 버둥거리자 윤아가 내 한 쪽 볼을 죽 잡아당긴다.
“이뻐서 그래. 이뻐서. 요렇게 깜찍한데 짝사랑이라니.”
“야, 너!”
“헤헤헤헤.”
우리 둘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계산대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을 때였
다. 갑자기 맞은편 입구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우리를 발
견하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윤아! 너 또 보경씨 괴롭히는 거야?”
“어? 승화왔다!”
윤아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더니 금방
그 팔에 매달려 끌고 오다시피 이쪽으로 데리고 온다.
“안녕하세요. 보경씨. 오랫만이네요.”
인사예절 90점.
“두 사람 얘기하는데 방해한 거 아니죠?”
붙임성 90점.
“아, 그거 무거울텐데 이리 주세요.”
매너 90점.
“야! 너 뭐해. 사람이 말을 하는데!”
“응?”
갑자기 윤아가 내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제서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미안. 저, 안녕하세요.”
그러자 승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반말 하세요. 보경씨. 제가 나이도 어린데.”
흐윽….성격까지 90점이구나. 놈과 비교하면 이건 정말 날개만 안 달렸지 천사야, 천사.
“….뭐 얼굴은 놈이 훨씬 훨씬 잘 생겼지만.”
나는 입 속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계산대에 나란히 서서 산 물건들을
비닐봉지에 집어넣고 있는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승화도 눈에 띄게 깨
끗하게 생긴 얼굴이기는 하다. 대학생답게 단정한 옷차림에 흰 피부, 놈처럼 무지
막지한 부자는 아니어도 꽤나 부유한 집안출신이라고 들었다. 승화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윤아의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두사람
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인이에요♡>라는 행복의 오라를 마구
뿜어대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업 끝나고 바로 오는 거야?”
“응. 리포트 좀 내고. 우리 지금 시험기간이라 정신이 없쟎아.”
“대학은 무슨 시험을 일주일도 넘게 보는 거야? 쳇, 이해가 안 간다니까.”
“하하. 나도 그래. 어쨌든 내일까지만 보면 끝이니까 좀 봐줘.”
아아….좋겠다. 윤아는. 저렇게 다정한 애인도 있고.
나는 부러운 얼굴을 하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는 두사람을 바라보다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태어난 지 육개월도 안되어 고아원 문앞에 버려져
남들처럼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금 큰 다음부터는 도시로 도망나와 먹고 사는데
급급해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고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은 소망이 절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항상
버림받고 혼자 남겨졌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에게는 평생 그런 운명이 따라다니는지도 모른다.
“보경아. 야. 뭐해?”
그때 갑자기 윤아가 내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나를 불렀다.
“응?”
왜 그러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윤아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 앞에 서있는 아가씨를 눈짓했다.
“너 계산해야지.”
“아, 미안. 저기…얼마예요?”
“칠만팔천 육백원입니다.”
“아, 네에.”
우울한 건 우울한 거고 현실은 현실이지.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등에 멘 가방 안에서 지갑을 찾아 카드를 건네었다. 지난번 놈
이 필요한게 있으면 사라고 건네준 카드였다. 나야 뭐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몰
랐지만 이 카드를 처음 보는 순간 윤아는 기겁을 하며 어디서 났냐고 나를 닥달했다.
그래서 놈이 줬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자기가 일하는 나이트 클럽 사장한테도 없는 골
든 플러쉬 카드라나? 세상에. 내가 뭘 알았어야지. 기껏 장보는데 도대체 무슨 그런 거창
한 이름의 카드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아는게 병이라고 윤아한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 카드만 꺼내려고 하면 손이 덜덜 떨렸다.
제기랄. 다음부터는 평범한 카드로 달라고 그래야지. 직불카드나 뭐 그런 걸로.
“몇 개월로 하시겠습니까?”
“그냥…. 일시불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계산을 끝내고 영수증과 카드를 확인한 다음 윤아를 보며 물었다.
“지금 바로 집에 갈거야?”
“글쎄. 우리는 저녁먹고 들어갈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가자.”
“아니야. 나는 집에 들어가야 돼.”
토끼같은 자식들…은 아니지만 어쨌든 집에는 이제나 저제나 내
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구.
으휴우…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께요.”
한숨을 쉬며 무거운 장바구니를 드는데 승화가 웃으면서 대신 손잡이를 잡는다.
“아니. 괜챦아요. 그쪽 것만으로도 무거울텐데.”
거듭 거절했지만 승화는 맡겨두세요. 라면서 웃더니 혼자서 다섯개를 들고 낑낑거리면서 입구쪽으로 간다.
“진짜 승화 성격좋다.”
그 서글서글함에 감탄한 얼굴로 칭찬했지만 윤아는 뭔가 불만스러운듯 입을 삐죽였다.
“저건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헤픈 거라구. 저러니까 여자들이 맨날 따라다니지. ”
“내가 보기엔 다정하고 좋은데.”
“니가 같이 한 번 살아봐. 좋은가. 성욱이는 안 그러지? 남잔 그게 좋은 거다.”
그러긴 커녕 너무 쌀쌀맞아서 걱정이라구. 내가 저렇게 상냥하게 놈이 웃는 얼굴 한 번만
볼 수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이건 물건을 사러 가서 여직원들이 말을 걸어도 제대로 한 번
대답을 해주길 하나 웃어주기를 하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서있는 모습만 봐도 찬바람
이 쌩쌩 부니 감히 누가 말을 걸겠어?
그 사교성 없는 성격으로 여태까지 살아온 거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니까.
“너 셔틀버스 타고 갈거지?”
입구의 주차장 쪽에서 멈춰선 윤아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버스를 보며 물었다.
“그래야지.”
“짐이 이렇게 많은데 택시타고 가요. 보경씨.”
“괜챦아요. 매일 타는데요. 뭐. 들어다줘서 고마워요. 윤아 너도 이만 가라.”
“너 가는 거 보고.”
“아냐. 차 이십분은 더 있어야 출발할거야. 먼저 가라.”
나는 고개를 흔들며 등을 떠밀다시피해 두사람을 보냈다. 윤아는 가면
서도 “내가 아까 말한 거 잘 생각해봐.” 라고 윙크를 하며 의미심장하게
손을 흔들었다.
“알았어. 얼른 가.”
“다음에 또 전화할께!”
석양 속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뒤돌아서서 사라지는
두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조용히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평일 저
녁무렵이어서 그런지 버스 안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다. 좌석 옆에 시장 바
구니를 내려놓고 나는 창가에 머릴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머릿 속에서 윤아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건 사랑이야. 그건 사랑이야. 그건 사랑이야. 그건 사랑...
“아아. 정말 알 수가 없네.”
나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버스 창문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윤아의 말대로 시도때도 없이 심장이 아프고 얼굴만 봐도 입 안이 마르는게 사랑이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사실 나 놈을 보면 윤아한테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가슴이 뛰고 마음이 어지러운데.
윤아한테 말은 안했지만 놈한테 선물을 받았을 때도 나 무지 기뻤다구.
“….아아. 진짜 그런 거면 정말 어떡하지.”
말도 안되는 소리긴 하지만 세상에 기가 막히고 황당한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쟎아.
알 수 없는게 사람 마음이라고 내 마음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
사실 나도 어렴풋이 그런 눈치를….채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게 눈 앞에 뻔히 보인다 하더라도 부정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무리 놈이 쌀쌀맞고 냉정하고 버릇없고 돈만 많은 냉혈한이라 하더라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구.
안돼. 절대 인정하면 안돼. 그럼 그 순간부터 내 인생 완전히 끝장나고 종 치는 거라구.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절대 보답받지 못할 짝사랑.
아아. 그런 상상만 해도 척추를 타고 흐르는 한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나는 겨울이라 일찍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리를 막막하게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게 나 황보경. 인생의 진정한 첫번째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