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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신데렐라 (109/141)

 비운의 신데렐라 <3>   

“오늘은 내 방만 치워. 옷이 제법 많으니까 세탁까진 할 필요없고 적당히 알아서 드라이 크리닝 보내.

 아, 그리고 일이 끝나면 오후엔 쉬어도 좋아.”

다음날 아침.

나는 졸려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거실로 끌려나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놈을 멍청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다 지쳐 그대로 쓰러져 자는 바람에 더러워진 나의 옷차림과는 대조적으

로 놈은 날아갈 듯 상쾌한 흰색 반팔 스포츠 셔츠 차림으로 그 말만 남기더니 스쿼시 라켓을 들고 또 휑하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멍한 머리로 곰곰히 그 말뜻을 생각해보니

…하아? 오늘 오후는 쉬어도 된다?

“이 자식! 그게 무슨 커다란 선행이라도 되냐! 어제 그렇게 나를 혹사시켰으니 쉬게 해주는게 사람의 도리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어제 그 드넓은 마룻바닥을 닦느라 목, 어깨, 팔, 허리, 무릎, 다리 등등 성한 데가 

없는데 거기가 또 중노동을 시키면 그게 사람이냐? 짐승이지!

나는 씩씩거리며 세수를 하고 난 뒤 하얀 머릿수건을 머리에 묶고 쿵쾅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이형한테는 하루종일 연락도 안되고ㅡ바에 전화해봐도 없다는 대답뿐이다. ㅡ 하루종일 쓸고 닦아야할 집안

은 이백평인지 삼백평인지 올림픽이라도 개최할 수 있을 정도로 광활하기만하니….정말 앞날이 막막하다. 

그래도 놈이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오후 시간을 쉬라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오갈 데없

는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정부 노릇은 하고 있지만 꼬박 한달동안이나 저런 상식도 없는 놈하고

 동고동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일단 놈이 시킨 일을 후딱 해치우고 얼른 진이형을 찾아가서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는게 최우선이다.

“하여튼 난 정말 되는 일이 없다니까.”

중얼거리면서 방문을 연 순간,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면서 다시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쭉 흘렀다.

…모, 몸이 허해졌나?  왜 헛것이 보이지?

“아냐. 내가 뭘 잘못 본걸거야.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

음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에서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뜨아아아 ㅡ 

“아,아니, 이,이게, 도대체….!!!”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입 밖으로 잘 나오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방의 최소 다섯배는 될 듯한 엄청나게 넓은 방안이 발디딜 틈도 없이 온통 갖가지 옷들

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커다란 카핏이 깔린 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킹사이즈의 침대, 창가의 테이블, 책상, 탁자

, 소파, 열린 옷장 안까지 눈길이 닿는 곳마다 산처럼 쌓인 옷들로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뭐? 오늘 오후까지 쉬어도 좋아? 야 이 자식아! 이것만 분류하는데도 석달 열흘은 걸리겠다!

나는 이를 으드득 갈며 보지 않으면 믿지도 못할만큼 수북히 쌓인 옷 중에서 흰 셔츠를 하나 집

어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 눈이 의심될 정도로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깔에 천연섬유 특유의 

손에 휘감기는 촉감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폴 스미스?”

생전 이런 걸 입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촉감만 봐도 무지무지, 엄청나게, 나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값비싼 외국 브랜드가 틀림없었다. 혹시라도 옷이 손끝에 스쳐 흠집이라도 날까 두려워 나는 침대 맡

에 그걸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다른 옷들을 살펴 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방안에 던져진 옷들은 모두 얇

은 티셔츠 쪼가리 하나도 마가렛 하웰이니 아르마니, 프라다, 기 라로쉬, 헤르메스 같은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어

디서 듣도보도 못한 최고급 브랜드였다. 게다가 놈은 전직이 패션모델인지 셔츠에, 스웨터, 슬랙스, 니트, 재킷,

 무스탕, 코트까지 옷이란 옷 종류는 죄다 섭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해서 반쯤 열려진 탈의실안을 살펴보

았더니 그 안에도 이백여벌이 넘는 슈트가 비닐 케이스가 씌워진 채 일렬로 걸려 있는데… 이쯤되면 이건 거의 호러수준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말도 안해. 

탈의실 안쪽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 오십켤레가 넘는 구두까지 모두 발리 아니면 스테판 켈리앙의 수제화였다.

“무,무서운 놈….”

니가 도대체 필리핀의 마르코스냐 이멜다냐. 사치스럽기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크래커처럼 얇은 백금시계를 주워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새삼 솟아오르는 두려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세계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만명이 넘는다는데 한켤레 백만원도 넘는 수제화에 방안 가득

한 몇백만원짜리 옷들. 그러면 이 방 안에 있는 옷값만 대충 따져봐도 강남에 있는 왠만한 고급맨션 서너

채 값은 충분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짜증나….”

불현듯 온몸에도 기운이 쭉 빠져 나는 옷들이 가득 쌓인 바닥 위에 풀썩 누워버렸다.

재벌 2세들에 대한 어설픈 콤플렉스 따윈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세상에는 고귀하게 태어나 고귀하게 살다

가는 사람과 평생 밑바닥에서만 허우적거리다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서

글펐다. 나랑 진이형은 지금껏 한 벌에 오만원 이상가는 옷은 입어본 적도 없고 항상 죽어라고 일하고 날마

다 아끼고 또 아끼지만 평생 이런 비싼 옷은 한 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방 하나 구할 돈이 없어서 가

정부로 위장취업해야 하는 이 서글픈 심정을 도대체 누가 알아주겠는가?  

“에휴….”

한참을 더 옷 위에 누워있다가 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해야 할 일. 이 집을 박차고 뛰쳐나갈

 근성 따위는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시키는대로 해야지 별 수 있나?

“…..오늘 안에는 끝나겠지, 뭐…..”

체념의 한숨을 쉬며 바닥에 쌓인 재킷과 코트를 집어드는데 갑자기 현관에서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 반사적으로 시계를 올려다보니 오전 10시 40분.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놈은 새벽에 나가면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니 놈일리는 없고 혹시….

“진이형?”

내 예상대로 현관 인터폰에 비친 것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진이형이었다. 그나마 커다란 코트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형!”

“….들어가도 되냐?”

현관문을 여는 방법을 몰라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간신히 문을 열고 말했더니 진이형은 처음 이 집에 왔

을 때보다 더 망설이는 얼굴로 문가에 서있다. 

“ 어, 응. 들어와.”

“…성욱이는?”

말을 하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는게…..

“나갔어.”

“그, 그렇구나….”

“커피줄까?”

커피는 커녕 티스푼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나는 태연하게 싱크대를 뒤졌다. 사실 진이형 얼굴을 보고 

화가 안났다면 거짓말이지만 밤잠을 못자 눈가가 거뭇거뭇해진 진이형을 보니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사르

르 눈녹듯 녹아버렸다.

“….미안하다.”

평소 성격대로 진이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사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진이형이 날 속인게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형이나 다름없는 진이형한테 더 이상 뭘 어떻게 해? 

“당연히 미안해 해야지. 한 마디 말도 없이 나를 이런 호랑이굴로 밀어 넣었는데.” 

내 말에 진이형은 그렇쟎아도 숙인 고개를 더욱 푹 수그렸다.

“걔가….많이 괴롭히냐?”

그걸 괴롭힌다고 표현해야 하나….한참을 고민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괴롭히진 않아.”

다만 무시할 뿐이지.

“그래?”

순간 진이형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치만 곧 집을 구해서 나갈꺼야.”

“왜? 걔가 괴롭히지도 않는다며?”

내 말에 진이형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올라갔다.

“그렇다고 내가 하루종일 마룻바닥을 닦을 순 없쟎아. 형 눈으로 봐서도 알겠지만 이게 어디 거실이야? 운동장이지!”

“그건 그렇지만….”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진이형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호소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생각해보면 안돼?”

“뭘?”

“니가 그동안 살아봐서 알겠지만 이 시기에 금방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집 구하기가 어디 쉽냐?”

그, 그건 그렇지만….

“집 넓겠다, 뜨거운 물 잘 나오겠다, 또 걔가 꼭두새벽에 나가서 야밤에나 들어오는데 널 괴롭혀봤자 얼마나 괴롭히겠냐?”

“그, 그런가?”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귀가 얇다.

“그럼! 물론이지!”

내가 좀 수긍하는 눈치를 보이자 진이형은 눈을 빛내며 본격적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야.”

“게다가?”

“이 바닥 생리야 너도 잘 알겠지만 니가 아무리 피해다녀봤자 성도 그 새끼한테 들키지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꺼야?”

헉 ㅡㅡㅡㅡㅡ

진이형의 그 말은 정말 결정타였다.

맞아. 나 쫓기고 있었지.

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는 일순 멍해져서 창백한 얼굴로 되물었다.

“혀,형. 나 그, 그럼 어떡하지?”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진이형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바싹 다가앉았다.

“어떡하긴! 꼼짝말고 여기서 시키는대로 슬슬 일하는 척 하면서 얌전히 숨어있다 한달쯤 지난 후에 놈

이 좀 수그러드는 기색이 보이면 방을 구해 나오는거지.”

“그, 그래…..성도 그 자식이 형 많이 괴롭혀?”

“아냐. 괜챦아. 그정도야 뭐. 그보다 너 내 말대로 할꺼지?”

“응. 응. 그럴께.”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자, 이거나 먹자.”

진이형은 비로소 안심한 얼굴로 들고있던 종이백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응. 지섭이네 도너츠. 너 이거 좋아하쟎아. 오는 길에 들러서 가져왔어.”

“와 ㅡ 맛있겠다.”

“얼른 먹어.”

그 누가 나한테 단세포라고 돌을 던지겠는가. 

사람들이 말하듯 어디에서나 단순, 쾌활, 명랑한게 나의 최고장점이라면 장점.  

형의 말에 나는 방금 전까지 머리가 터질 만큼 고민을 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진이형이랑 도너츠를 나워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사실 고민해봤자 별 수 있나 뭐?

어차피 이렇게 된 일. 한 달 동안 꾹 참고 견디면서 광명의 날을 기다려야지.

그래. 기껏해야 한 달인데 뭐. 

놈이 속을 뒤집어놓는 것도 한 달이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집안일을 하는 것도 한 달뿐인데.

고행한다 생각하면서 참아야지 뭐.

딸기잼이 묻은 손가락을 핥으며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치명적인 실수가 되리라고 그때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구 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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