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10>
“……흐윽. 정말 슬프다아…”
나는 손에 들고있던 콩나물이 모조리 신문지 위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TV화면을 뚫어지게 바라
보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얼른 입고있던 앞치마 자락을 들어올려 꾹꾹 눈가를 눌렀다. 그러는 사이에
도 브라운관 안에서는 가냘픈 여주인공이 남자의 발 밑에 엎드려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드라마 <슬픈 사랑>
평일 오전에 하는 드라마야 다 그렇고 그런 불륜 소재지만 그래도 역시 일상에 찌든 주부들에게는 이
런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드라마가 삶의 위안이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또는 그냥 콩나물이나 시금치를 다듬다가 심심해서 틀어놓곤 하던 나도 이
제는 이 드라마가 할 시간이 되면 하던 일도 멈추고 TV 앞으로 달려가서 앉게 된다.
청순가련형의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던 남자와 결혼해 행복하다고 생각했으나 남자는 옛연인을 잊
지 못하고 방황한다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한 장면 한 장면 혼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정
말 심금을 울린다고나 할까.
“…역시 뭐니뭐니해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누구에게인지도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조연들이 출연하는 사이사이 콩나물을 다듬으며
열심히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는 사실 무엇을 건드려도 겁이 나 아무 것도 못하
고 집안 일만 죽어라고 했지만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겨서 가끔씩 거실에 있는 오디오로 음악을 듣
고 이렇게 일하는 틈틈이 TV를 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청소를 하다 우연히 전원을 건드려서 켜진
거였지만 놈이 먼지가 앉을 정도로 전혀 가전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기에 가끔 보기 시작한게
이제는 이렇게 버릇이 되었다.
단 한 가지 이 TV가 집안에 있는 다른 가전제품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화질의 대형이어서 이따
금씩 주인공의 얼굴이 갑자기 클로즈업되면 깜짝깜짝 놀라기는 하지만.
이 집에 온지 거의 삼주째가 다 되어가지만 놈이 TV같은 걸 보는 건 한 번도 못봤는데 도대체 이
렇게 큰 TV를 사놓은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하긴. 새벽에 나가 밤늦게나 돌아오는데 뭘….”
중얼거리는 사이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이 올라갔지만 나는 자리에 그대로 신문지를 펴놓고 앉
아 남은 콩나물을 기계적으로 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직업이 뭐길래 그렇게 날마다 꼬박꼬박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걸까?
옷은 매일매일 공작새처럼 갈아입고 나가지, 차는 엄청나게 값비싼 일제지, 만원짜리 지폐는 툭
하면 집안 여기저기서 튀어나오지. 하고 다니는 걸 보면 패션모델이요, 차를 보면 갑부집 아들,
돈이 많은 걸 보면 조직을 서너개 거느린 나이트 클럽 사장쯤 될 것 같은데….
“에이. 알게 뭐냐.”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적당한 해답이 나오질 않아 나는 마지막 남은 콩나물을 마저 다듬
어 바구니 안에 넣고 나서 거실에 깔아놓았던 신문지를 주섬주섬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국을 끓이려고 한건데 내 방의 알람시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늦
게 일어나보니 여느때와 다름없이 집안이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마도 아침일찍 나간 모양이
었다. 혹시나해서 살펴보았지만 아래층 식당에도 어젯밤에 맞춰놓은 커피 메이커가 혼자 끓
고 있을 뿐 누군가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치만 내가 어제 잠든게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는데 이렇게까지 기척이 없다는 건 안 들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게까지 아침도 안 먹고 집 안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쳇,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정말이다. 놈이 늦게 들어오던 아예 안 들어오던 나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누구는 저를 기다리느라고 새
벽 한 시까지 잠도 못 자고 있는데 혼자서 외박이나 하고.
“하여튼 괘씸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내가 팅팅거리며 신문지와 콩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갑
자기 맞은편 소파 위에서 무언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하고 빛났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내 손바닥의 반밖에 안되는 놈의 은색 핸드폰이었다.
“이건 왜 놓고갔지?”
아무 생각없이 핸드폰을 집어들어 플립을 여니 액정화면이 밝아지면서 <강성욱> 이라는 세글자가 나타났다.
“흥, 뭔가 다른 말이라도 써있길 기대한 내가 바보지.”
나는 핸드폰을 다시 소파 위에 있던 대로 던져놓고 식당으로 가 토스터기에 넣을 식빵을 찾
기 위해 냉장고를 뒤적였다. 놈이 외박을 했던말든 아침은 먹어야 하고 일주일 전에 사다놓
은 식빵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상하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 아랫칸 깊숙이 집어넣은 식
빵봉지를 끄집어내며 안을 살펴보니 냉장고 안은 어젯밤 내가 물을 마시러 내려왔을 때와 똑
같이 하나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정말로 외박을 하긴 했군.”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원래 <외박>이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게 바로 나다. 전 애인이랑 살 때 하도 노름판
이니 술집에서 외박을 해대서 매일 매일 소리치며 싸웠었는데 이 집에 와서까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신세라니 이건 너무나 처량하지 않은가?
한 번만 더 말도 없이 그러면 집을 나간다고 해버릴 테다! (갈데도 없으면서….ㅡㅡ;;)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토스터기에 상하기 직전의 푸르스름한 빵을 집어 넣었을 때였다.
갑자기.
쨍그랑 ㅡㅡㅡㅡㅡ
방음이 완벽한 집안에서도 깜짝 놀랄만큼 커다랗고 날카로운 파열음에 이어 우당탕
ㅡ 하면서 뭔가가 한꺼번에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뭐, 뭐야!”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냅다 뛰어갔다. 그런데 뜻
밖에도 그 요란한 소리가 난 곳은 다름아닌 복도 안쪽의 놈의 방이었다.
평소같으면 상식적으로 ‘ 아, 방에서 소리가 나는구나. 그럼 집에 있는 거겠지.’ 라고
생각해서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겠지만 원래 그렇게 논리적인 사고에 약한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문을 벌컥 열고 ㅡ 다행히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ㅡ 우당탕탕 소리
를 내며 놈의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무, 무슨 일이야!!!”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은 조금 어질러져 있었지만 여느 때처럼 옷가지 뿐이었고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라
고는 흐트러진 침대시트 뿐이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욕실로 통
하는 복도 앞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발견하고는 본능적으로 창백해졌다.
‘욕실이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닥닥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세상에 내 방의 두배는 되는 욕실 바닥에 예의 그 청색 실크가운만 걸친 놈이 죽은 생선처럼 널부러져 있는게 아닌가!
게다가 넘어지면서 창가에 놓여있던 쟈스민 화분을 깼는지 욕실바닥은 온통 도기조각과 깨진
셰이빙 로션병의 파편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바닥이 온통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로 가득했지
만 나는 맨발에 밟히는 파편들도 개의치않고 미친듯이 타일을 밟고 놈이 쓰러져있는 욕조로 다가갔다.
“이, 이봐! 여기! 저, 여보세요!”
제기랄. 급해죽겠는데 호칭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놈의 가운깃을 틀어쥐고 놈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로 정신없이 흔들어대다가 문득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놈의 머리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정신없이 맨발로 욕실 안을 서성였다.
“어,어떡하지. 시, 심하게 다친거면, 아, 잠깐, 그럼 우선, 의, 의식을, 아냐,그것보다, 머, 먼저, 병
원에, 병원? 아,아냐, 그, 그럼, 그래! 119!”
나는 횡설수설하다 별안간 정신이 든듯 거실로 다시 뛰어나가 전화기를 들었다. 거실 안을 헤맨
끝에 간신히 무선전화기를 찾아 버튼 세개를 누르는데 어찌나 손이 떨리던지 이대로 놈이 여기서 죽
으면 어떡하나,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여기 주소를 불러주고 전화를
끊은 다음 다시 미친듯이 욕실로 뛰어들어가보니 놈은 아까 내가 눕혀놓은 그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도저히 그 건방지고 버릇없는 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
어 나는 놈의 어깨를 부여잡고 펑펑 울면서 구급차가 올 때까지 말 그대로 통곡을 했다.
“주, 죽지 마! 죽으면 안돼! 엉엉….내가 잘못했어….!!! (도대체 니가 뭘 잘못했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