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60/141)

 비운의 신데렐라 <24>   

우우....다른 때는 길거리에 지천으로 널린 게 택시더니 막상 잡으려고 하니까 왜 한 대도 눈에 띄질 않는 거야!

나는 책을 가슴에 안고 아파트 단지 앞 인도 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차는 잡힐 기색도 없고, 결국 이십 분동안 추위에 새빨개진 얼굴로 발

을 동동 구르다가 차도까지 뛰어나가 손님을 내려주던 택시를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잡아탈 수 있었다.

“아저씨! ** 대학으로 가주세요! 저 지금 급해요. 빨리요!”

뒷자석에 뛰어들다시피 타자마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을 겨를도 없이 나는 운전석 뒤에 달라붙어 기사아저씨를 재촉했다.

“아따, 깨딱허다 숨 넘어가겄네. 젊은 사램이 뭔 일이 그리 급하당가?”

계속되는 재촉에 <평창동 조기축구회> 라고 씌여진 빨간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 

50 대 중반의 기사 아저씨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아듣지 

못할만큼 내 마음은 조급해져 있었다.

“아저씨, 얼른요! 늦으면 큰일나요. 정말이에요! 빨리요!”

“아, 알았소. 근디 지금이 젤로 막히는 시간이라….서둘러도 한 시간은 걸리겠는디?”

“하, 한시간이요?”

“아 러시아워 아니당가. 그것도 서둘러야지 안 그랬다가는 한 시간이 될 지 두 시간이 될 지 그건 나도 몰르는 문제여.” 

남은 급하다 못해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이 아저씨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

로트에 맞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박자를 맞춰 핸들까지 두드려대며 여유롭게 말했다.

“아, 알았어요. 빨리 가주기만 하세요!”

설마하니 진짜 한 시간이나 걸리지는 않겠지. 막혀도 사십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아

무리 퇴근시간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퇴근길의 러시아워로 혼잡한 도로 위에서 10초 간격으로 미터기 옆의 초록색 디지

털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무릎에 올려진 손을 초조하게 틀어쥐었다.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 전화를 해서….!

놈이 나에게 뭔가를 부탁한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물론 집안일이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은 신경쓰지 않게 내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고 있지만 이번처럼 놈이 개인적으

로 전화까지 한 것은 이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라 나는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까봐 애가 탔다. 

하지만 한 시간이 걸릴지 두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고 한 기사 아저씨의 말은 결코 과

장이 아니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금방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처럼 날씨가 흐려지더니 

차들로 넘쳐나는 도로에서 몇 번이나 불법유턴을 하고 아슬아슬하게 신호위반까지 해

가면서 간신히 놈이 다니는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위가 완전히 어둑어둑해

져 있었다.

“여기 차비요! 감사합니다!”

차가 완전히 정차할 때까지도 기다리지 못해 나는 성급히 주머니를 뒤져 돈을 내밀고 차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이! 잔돈은 안 가지가는가?”

“필요없어요!”  

다른 때 같았으면 잔돈 700원에 목숨 걸었을 나지만 지금은 위급상황이라구.

나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완만한 경

사의 진입로를 전속력으로 다다다다 달려 올라갔다. 그래봤자 다리가 짧아 보통 걸음으

로 앞서가는 남학생을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였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최대한의 

노력이었기 때문에 10여분을 그렇게 달리고 나자 어떻게 할 수도 없을만큼 숨이 찼다. 

하지만 무슨 놈의 학교를 그렇게 높은 산중턱에다 지어놨는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주

변에 흩어진 서너개의 건물들 뿐 달려도 달려도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도 이렇게 젖먹던 힘까지 다해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아, 하아, 도대체….도서관이, 어딨는 거야?”

지친 얼굴로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다 이러다간 도저히 시간 내에 놈을 찾을 수가 없을것 같아 나는 지나가는 여학생을 붙잡았다.

"저기요, 여기 도서관이 어디에 있죠?" 

“저기 위에 붉은색 벽돌건물이에요.”

헉!

엄청나게 산꼭대기에다 지어놨쟎아...ㅠㅠ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서 아까보다는 조금 기운이 떨어진 발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야 어쩌다 한 번 올라온다지만 매일 공부하러 오는 애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높은 데다 도서관을 짓고 그러는 거야?

하여튼 일류대학이란 건 다 이름뿐이라니까.

이러니 가뜩이나 잘 먹지도 않는 놈이 날이 갈수록 턱선이 더 날카로와지지.

수험생 아들을 둔 어머니같은 심정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도서관 입구의 긴 계단을 힘

겹게 터벅터벅 오르니 방학 중일텐데도 학교 안은 책가방을 메고 서너명씩 짝지어 다니는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책을 가슴에 안고 즐거운듯 이야기하며 다니는 

내 또래 아이들을 보고 가슴이 쓰라렸을 테지만 나는 놈을 얼른 찾아서 책을 건네줘야 한다는 일념에 가득 차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휴우….” 

가까스로 시간 내에 왔네.

천신만고 끝에 현관에 도착해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긴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이게 왠 

걸, 바로 눈앞에 수위실에 무시무시하게 생긴 수위 아저씨가 떡 하니 버티고 있는게 아닌가.

산 넘어 산이라더니…..

이 학교 학생 아니라고 안 들여보내주면 어쩌지?

한참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단에서 왔다갔다 하며 고민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불안하게 

수위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며 입구로 다가갔다. 때마침 바로 앞에 앞서 들어가는 일행이 있

어 그 뒤에 바싹 붙어 입구를 지나자마자 사사삭 꽃게처럼 벽에 붙어 간신히 그 앞을 통과할 수 있었다.

됐다!

수위 아저씨에게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로비를 지나자마자 향한 곳은 제 1 도서실. 조금 열린 도서실 

문 앞에는 여러가지 내용의 크고 작은 메모지가 여러 개 붙어 있어 나는 그 중 누군가 연습장을 뜯어 

쓴 듯한 <조용히! 공부하는 중입니다.>라는 엄숙한 내용의 메모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 커다란 문을 

살그머니 열고 조심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좌석수가 200개가 넘을듯한 커다란 도서실 안은 3분의 1가량이 학생들로 차 있었다. 저녁 시간이

라 그런지 책만 펼쳐진 채 주인없이 비어있는 자리도 꽤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대부

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1층에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저 안쪽에 들어가 있나?

나는 문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안을 살피다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

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통로를 지나며 주의깊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도서실

 안을 한바퀴 다 돌고 나서도 놈은 커녕 그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찾지 못하자 진작에 놈의 핸드폰 번호

를 알아둘 걸 하고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늦으면 안되는데….

맞은편에 있는 제 2도서실로 향하며 나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확인한 바로는 1층에는 제 1 도서실 말고도 세 개의 도서실이 더 있다. 그 중 제일 끝

에 있는 제 4도서실은 논문관련 서적이 비치되어 있으니 우선 제외한다쳐도 아직 두 군데나 더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집에다 전화를 해야 할까?

이대로 도서실 두 개를 뒤지는 것과 로비까지 가서 집에 전화를 해 놈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는 것

하고 어느 쪽이 더 빠를까 하고 고민을 하며 내가 제 2 도서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이 열린 순간 마

치 거짓말처럼 정면의 창가에 앉아있는 놈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 있다!

놈을 알아보고는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펄쩍 뛰어오르려 하다가 나는 여기가 도서관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핫. 하고 당황해 숨죽인 채 문 뒤에 숨어 놈을 바라보았다.

놈은 재킷을 벗은 채 셔츠 소매를 걷은 차림으로 창가에 앉아 두꺼운 책을 보며 이따금씩 무언

가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눈 내리는 어두운 창가를 배경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학생이라기 보다는 마치 공부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미남배우같았다.  

햐아…..멋지다아….

나는 여기에 왜 왔는지 본래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도서실 문에 달라붙어 넋을 잃고 놈의 옆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을 제외하고는 머리카락조차 날리지 않는 차가운 분

위기는 그대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주변에 앉은 다른 남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

큼 근사해 보였다.

역시 날마다 죽어라고 셔츠를 다려 입히는 보람이 있어.

내가 흐뭇한 얼굴로 티 하나 없는 놈의 흰 셔츠 깃을 따라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놈의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놈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치며

 뭔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놈은 책을 보다말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까지 보고있던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핫! 맞다!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책 가져다 주려고 온 거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 놈의 뒷모습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나는 황급히 도서실 안으

로 들어가 반대편 통로로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나보다 20cm씩은 더 

큰 두 사람의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뒷문 가까이 와서야 겨우 놈을 잡을 수 있었다. 

“저, 저기요!” 

모깃소리만하게 낸 인기척에 막 복도로 나서려던 놈이 의아한듯 뒤돌아 본 순간 나는 움찔,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 늦어서 죄송해요. 차가 밀려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놈은 그런 것에는 관심없는 모양이었

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라고 눈짓을 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책은?> 하면서 묻는다.

“아,네. 여기요.”

대답과 동시에 나는 품 안에 안고있던 책을 꺼내 공손하게 두 손으로 놈에게 건네주었다. 

그 세찬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책을 날라왔으니 수고했어, 라든지 고마워, 라는 놈의 인사를 조금은 수줍게 기대하면서.

그런데 책을 받아든 놈은 표지를 확인하고는 작은 한숨을 쉬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가져왔어.”

“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을 하자 놈은 나에게 다시 책을 내밀며 말했다.

“이 책이 아니야. 원자 물리학 원서랬쟎아. 이건 번역본이야.”

헉! 어떡해!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만 착각을!

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순간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까 너무 서두르다가 영어

 원서라는 걸 깜빡 잊고 물리학이란 책제목을 보는 순간 앞 뒤 생각없이 그냥 집어들고 와버린 것이다.

난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죄, 죄송해요. 제가 금방 택시타고 다시 가서,”

“됐어. 어차피 지금 세미나 들어가야 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지만 놈은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어조로 내 말을 중간

에서 사정없이 자르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서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

보고 있던 친구인 듯한 그 남자가 누구야, 하면서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묻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놈

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멀어져 가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어떡해. 무지 화났나봐….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멀어져가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화내는 게 당연하지.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기껏 가져온 게 다른 책이었다니….나라

도 화가 났을 거야…..이런 심부름 하나 제대로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지….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냐?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다가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돌아섰다. 

아까는 마음이 급해서 잊고 있었지만 놈이 싸늘한 말만 남기고 가버리자 도서관 안의 빈

약한 난방에 새삼스레 기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 기관지가 약해서 겨울이면 항상 감기를

 달고사는 나였다. 하지만 올 겨울에는 난방이 하도 잘 되는 놈의 아파트에 있다보니 그런 건 까

맣게 잊고 있었는데 멀어져 가는 놈의 뒷모습을 보니 두꺼운 패딩코트 안에서도 오싹 하는 한기가 느껴졌다.

괜히 택시까지 타고 왔쟎아….심부름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내가 콜록, 하고 가벼운 기침을 하며 힘없이 한 발 내딛었을 때였다. 

“야, 너.”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잘못 들은게 아닌가 싶어 커다래진 눈으로 홱 뒤돌아서자 놈이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다시 올라오더니 턱짓으로 도서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늦어도 한시간이면 끝날 테니까 가지말고 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 저 

문으로 들어가서 일곱번째 창가자리야. 어딘지 찾을 수 있어?”

에….그게….

“찾을 수 있어, 없어?”

내가 멍한 얼굴을 하자 놈은 미간을 좁히더니 참을성 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네, 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봤다. 

그러자 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럼, 하고는 계단을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니까…그건…가지 말고….

“아!”

다행이다! 화난 게 아니었나봐.

그럼 그렇지 그런 걸로 화를 낼 리가 있겠어?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나는 그 사이에 놈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얼른 도서실 안으

로 들어가 놈의 자리를 찾았다. 놈의 말 한마디에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붕 떠올라 헤헤거리는 게 간사하다면 또 간사하지만….좋은 걸 그럼 어떡해?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건 집에 함께 돌아가자는 뜻이겠지?” 

헤헤…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런 뜻일꺼야. 

입 밖으로 미소가 번져나올 것 같아 목도리에 얼굴을 폭 파묻고 나는

 종종걸음으로 놈이 말한 일곱번째 창가자리를 찾아갔다.  

‘어…저기다!’

놈의 자리에는 낯익은 놈의 은색 핸드폰과 두꺼운 원서들, 무슨 뜻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숫자들로 가득 찬 노트가 펼쳐진 채 흩어져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책상 위를 기웃거리다가 살짝 핸드폰을 열어보고서 놈의 이름 세 글자가 뜨자 

나는 안심한 얼굴로 조심스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야….. 여기가 놈이 공부하는 자리구나.

왠지 감개가 무량해 나는 놈의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와 책, 만년

필 등을 가만가만 만져보았다. 집에서야 하루가 멀다하고 놈이 벗어놓는 옷가지들을 빠

는 나지만 밖에 나와서 이렇게 놈의 물건들을 보게되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글씨를 이렇게 쓰는 구나…

펼쳐진 노트에 가득 씌여진 한쪽이 약간 치켜 올라간 반듯한 글씨체가 너무도 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노트를 들여다보며 잠시 웃었다. 이전까지는 놈이 학생

이라는 것을 조금은 믿기 어려운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히 집에 있는 것

보다는 조금 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었다.

“에…콜로이드 입자가….부딪쳐 침전하지 않고….현탁 상태를….유지하는 것은….입자

가…하전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며…에…또….”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네.

더듬더듬 서투른 발음으로 놈의 노트에 씌여진 글씨들을 발음해보다 나는 머쓱해진 얼굴로

 노트를 덮었다. 뭐 생각해 보면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내가 무슨 재주로 저렇게 유식하고 어

려운 문장들을 이해하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건데 한 문장도 똑바로 읽

지 못하는 내 자신이 스스로도 조금 창피해졌다.

치, 맨날 이렇게 어려운 것만 공부하니까 성질이 나빠지지.

가만히 있자니 답답하고 뭘 읽어보자니 다 뜻 모를 소리들 뿐이라 나는 입을 삐죽이다 말고 하

는 수 없이 어질러진 책상 위를 조금씩 치웠다. 캡이 벗겨진 채 책상 끄트머리에서 떨어질락말

락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고 있는 금색 만년필을 집어들고 보니 헉, 소리나게 값비싼 몽블랑이었다.

‘하여튼 내가 없으면 다 이 모양이라니까.’

이렇게 비싼 걸 누가 집어가면 어쩔 거야 도대체! 

지문자국이 남지 않도록 옷소매로 슥슥 닦아 책갈피 사이로 올려놓는데 한 구석으로 

삐죽이 금으로 된 책갈피가 고개를 내밀었다.

헛! 순금!

누가 볼 새라 무서워 나는 얼른 책갈피를 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뒤 주위를 슬슬 둘

러봐도 아무도 나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살살 끄집어내자 번쩍번쩍 유난한 광

채를 발하는 얇은 직사각형의 순금 책갈피가 한꺼번에 세 개나 딸려나왔다.

하여튼 이 자식은 걸어 다니는 보물 창고라니깐.  

평소에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만 해도 수백만원어치는 족히 될 텐데 가지고 있는 것들

도 하나같이 이런 고급품들뿐이니 돈이 하늘에서 눈 날리듯 펑펑 쏟아지는 줄 알지.

“이거 봐. 코트는 또….”

혀를 쯧쯧 차며 나는 책상 옆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던 놈의 캐시미어 코트를 집어 들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하루만 입으면 칼같이 벗어놓고 세탁하기 전에는 두 번 다시 손도 대지 않

는 성격이라 속으로는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그저께 헐레벌떡 문닫은 세탁소 셔터까지

 두들겨대서 찾아온 건데 이 먼지많은 데서 이렇게 함부로 굴리니 옷이 안 상하고 배겨?  

오기만 해 봐. 넌 죽었어. 

방금 전까지 놈의 말 한 마디에 납작 엎드렸던 것은 까맣게 잊은 채 나는 미간을 찌푸린 표

정으로 재킷을 잘 펴서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았다. 그래놓고는 한참을 기다려도 놈이 오

지않아 책상 위를 마저 정리할까…하다가 놈의 책들은 왠지 건드리면 안될 것 같아 그대로

 두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학교 자체가 고지대에 위치해있어 창 밖으로는 서울시내의 야경이 그대로 내려다 보였다.

아까부터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더니 창밖에는 벌써부터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오래 걸리려나?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 도서실 입구에 붙은 커다란 벽시계를 보니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밥도 안 먹어서 너무 늦으면 배고플텐데….또 누나들도 기다리고….

턱을 괴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앉은 자세가 불편한 것 같아 시선은 그대로 창

밖에 둔 채 조심조심 펼쳐놓은 책을 피해 엎드렸다. 낮에 하루종일 돌아다닌 피로가 쌓여서일

까. 긴장이 풀려서인지 눕자마자 나도 모르게 사르르 눈꺼풀이 감겼다.  

음….

자면 안되는데…..

창밖에 내리는 눈이 반짝반짝 꿈결처럼 희미해진다.

달칵, 하고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

저벅저벅, 하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어, 잠들었쟎아?”

“조용히 해. 그러다 깬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누구야? 애인이라도 돼?”

“좋을대로 생각해.”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 애인도 아니면, 설마 숨겨둔 와이프?”

“비슷해.”

“하, 이 사실을 알면 이공대 여자애들이 난리가 나겠군.”

에이…졸려 죽겠는데 누가 이렇게 지척에서 시끌시끌 떠드는 거야!

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우웅, 하고 항의의 뜻을 담아 소리를 낸 다음 몸을 반대

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저벅저벅 다시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제야 좀 편안하군.

만족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돌리려는데 왠지 얼굴이 따가운 것 같은….

응?

불길한 예감에 눈을 번쩍 뜨자 바로 앞에 기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이 왜…..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서서히 위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놈의 눈동자가 보였다.

헉!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제 왔지?

“오, 오셨어요?”

내 말에 놈은 책상 위의 책을 챙기던 손길을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깼으면 가자. 늦었다.”

“아, 예.”

자다말고 침을 흘렸는지 끈적해진 입가를 옷소매로 닦으며 나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

나 놈이 책을 챙기는 걸 도왔다. 놈은 이렇다할 말도 없이 책상 위에 널려진 책을 한군데 쌓아놓

더니 아까 내가 의자 등받이에 반듯하게 걸어놓은 코트를 집어들었다.

“저…세미나는 잘 하셨어요?”

지은 죄가 있어 놈이 단추를 채우는 사이에 눈을 내리깔고 주저주저하며 묻자 놈은 <그런

대로.> 라는 별 성의도 없어보이는 대답을 날리고는 의자를 밀어넣었다.

하여튼 쌀쌀맞기는!

붙임성없는 그 태도에 눈을 짝 흘긴 후 나는 놈을 따라 도서실 밖으로 나왔다.

“어이, 강성욱. 너 지금 가는 거야?” 

조금 전 놈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가 복도 맞은편에서 음료수캔을 두 개 들고 이쪽

으로 오다가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표정을 했다.

“너 아직 갈 시간 아니쟎아?”

“음.”

“지금 밖에 눈도 많이 오는데 좀 기다렸다가 그치면 가지.”

“그렇게 됐어. ”

놈이 그 남자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알게 모르게 나를 향해 있

는 남자의 웃음기 어린 시선을 피해 조금 겁먹었으면서도 순한 얼굴로 놈의 뒤

에 바싹 붙어섰다. 놈과 엇비슷할 정도로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생김새였지만 무

언가 신기한 것을 쳐다보듯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어딘지 불편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아니면 내가 무의식중에 잡아당기고 있는 소맷자락을 눈치

챘는지 놈은 <그럼.> 하고 남자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더니 곧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행여나 놓칠새라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그 뒤를 정신없이 

쫓아가고 있는데 일층의 현관에 다다르자 놈은 우뚝 멈춰서서 함박눈 날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아까부터 왔는데요. 내일모레까지는 폭설이라고….”

운전하는데 길이 미끄러울까봐 그러나?

짧은 머리를 굴려 지레짐작으로 말을 꺼내봤지만 놈은 들은척도 않고 눈 내리는

 장면만 한참을 바라보다 갑자기 손을 뻗어 급히 뛰어오느라 엉망이 된 내 목도리를 똑바로 묶어준다.

“어….”

“이렇게 하면 하나마나 아니야?”

“그, 그렇죠. 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꽉 묶어놓면 어떻게 숨을 쉬냐!

호흡곤란인지 추위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느닷없이 튀어나온 놈의 뜻밖의 행동

에 당황해서인지 나는 코끝까지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 값비싼 캐시미어 목도리에 목이

 감겨 질식사할 것 같은 위험을 꾹 참으며 놈의 곁에 서서 버벅거렸다. 방금 전까지는 뭐

가 그렇게 급한지 책을 챙기자마자 일분도 안되어 아래층으로 내려온 놈이지만 막상 눈보라 

부는 바깥경치를 보자 뭔가 생각하는듯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집에는 안 가나?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놈이 기껏 묶어놓은 목도리에 손

을 댔다가는 놈이 무안해할까봐 나는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 자리에서 놈의 처분만이 떨

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은 눈보라 속에서도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 집까지 걸어갈까?”

뭐?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바싹 치켜들었지만 다음 순간 나는 이

미 놈에게 손목을 붙잡혀 쌩쌩 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한 발짝 들어서고 있었다.

우왓! 추워!!!

야! 갈래면 너 혼자 걸어가!

이 추운 날 미쳤다고 그 먼 데까지 눈보라 맞으며 걸어가냐!

야! 야! 이거 안 놔! 

속으로 발악해봤지만 이미 뭔가 결심을 한듯한 놈에게는 역부족.

결국 나는 놈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한 손을 붙잡힌 채 속절없이 15

년만에 최고의 혹한(酷寒)이라는 겨울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놈도 진짜로 집까지 걸어갈 생각은 없었더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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