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37/141)

 비운의 신데렐라 <1>   

제 1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 오랫만이다, 보경아?”

“진이형 보러왔냐?”

오후 네 시를 갓 넘긴 시각이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

내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알아본 몇몇 웨이터들이 테이블을 닦다말고 아는 척

을 했지만 고개를 들기도 창피스러워 나는 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얼른 홀 안쪽의 바로 걸어들어갔다. 

“어? 네가 연락도 없이 왠일이냐?”

언제나처럼 바에서 크리스탈 텀블러를 닦고있던 진이형이 나를 보고 반갑게 웃었지만

… 그것도 잠시, 가까이 다가온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친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묻지 말고 나 술이나 좀 줘.”

나는 입술을 깨물며 진이형 앞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너 턱이 왜 그렇게 부었어? ”

“묻지 마. 부탁이야.”

애원조로 말했지만….그 말에 넘어갈 진이형이 아니다.

“설마 너!…. 같이 사는 그 자식한테 맞은 거야?”

“…….” 

침묵은 곧 긍정의 대답.   

“정말이야? 아니 그 자식 가진 것 하나도 없이 너한테 빌붙어 사는 주제에 뭐가 맘에 

안 들어서 너한테 주먹질까지 해? 도대체 이유가 뭐야!”

“…돈을 못 벌어오는게 마음에 안 든대.”

아무래도 진이형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은 기세가 아니길래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랬더니 역시나…..흥분한 진이형은 금방이라도 천장을 뚫고 올라갈 것 같은 기세로 길길이 날뛴다.

“아니 뭐가 어쩌고 어째! 이게 스무살짜리한테 얹혀 살면서 뭐? 돈을 못 벌어와? 하, 참! 지

가 그 멀쩡한 허우대로 좀 벌어와보지? 아니 무슨 그딴 새끼가 다 있어? 너 내가 뭐랬어?

 그렇게 생긴 자식들은 재수없다 그랬지!”

“형…그러지마. 안 그래도 나 지금 참고있단 말야.”

간신히 입술을 깨물며 울먹였더니 흥분한 얼굴의 진이형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듯 씩씩거

리며 인상을 쓰다가 에이, 하면서 잔을 닦던 수건을 카운터 위로 내던졌다.  

“….바보같은 자식.” 

책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말투다.

“…..바보라서 미안하다.”  형의 말에 눈물이 글썽해서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울지 마. 그런 자식한테 맞고 왜 우냐!”

“울고 싶어서 우는거 아니야. 그냥 눈물이 나오는 거야.”

“말이나 못하면. 그나저나 이 개새끼를 어떻게 작살을 내지?”

진이형은 입을 앙다물며 움켜쥔 주먹으로 카운터 위를 두들겼다. 

이마에 핏줄이 서는게 엄청나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래봤자 나랑 엇비슷한 체구에 깜찍한 얼굴이어서 별 박력은 없었지만.

“형이….어떻게 그래. 걔, 얼마나 살벌한데.”

내 말에 형은 녀석의 얼굴을 생각해냈는지 조금 창백해졌다.

“….그래?”

“응.……”

“야,야! 걱정마. 그런 새끼들은 한 번 손을 봐줘야 정신을 차려. 이 새끼를 그냥!”

“형. 말만으로도 고마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형 그러니까 꼭 친정엄마같다. ” 

“새꺄. 친정엄마가 별거냐. 먹여주고 입혀주고 걱정해주면 친정엄마지.”

진이형은 머리를 툭 치며 바아 아래의 휴대용 렌지에 불을 올리고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자, 마셔.”

“술은 없어?”

“…상처난 데 덧나. 이거 마셔.”

나는 진이형이 건넨 머그잔을 두손으로 꼭 움켜잡고 코를 훌쩍였다. 이래서 진이형한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직 진이형 뿐이다. 

열 다섯살 때 고아원에서 둘이 도망쳐나와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 때부터 진이형은 항상 

나에게 얼굴도 모르는 엄마 대신이었다. 

“제기랄. 버리려면 좀 좋은 고아원에다 버리던지. 하필이면 다 쓰러져가는 시립 고아원 앞에다가 버리냐?”

인상을 쓰는 진이형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동감이야. 형.”

나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뜨거운 우유를 후후 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

더니 진이형은 별안간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낀다.

“그래서 집은? 아주 나온 거야?”

“…..응….뭐 당분간만.….”

말끝을 흐리자 진이형은 좀 난감한 표정이었다.

“어쩌냐. 지금 가게 뒷방은 수리중이고…어디 가 있을 데가…”

“아냐. 형. 나 괜챦아. 이삼일 여관에라도 숨어있다가 잠잠해지면 들어갈꺼야.”

사실 좀 신변의 위협을 느끼긴 했지만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진이형이 펄펄 뛸테고 그렇다고 

가게에서 먹고 자는 형에게 폐를 끼치기도 미안해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지만 수중에 가진 돈

이라고는 달랑 십만원이 전부인데 며칠씩이나 여관을 돌아다닐 수도 없다. 게다가 지금은 가게

도 수리 중이라서 진이형에게 돈을 빌릴 수도 없었다. 

“돈은? 가진 거 있어?”

“…십만원.”

“휴우……어쩌냐…..”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되겠지.” 

“아냐. 잠깐만 기다려봐.”

진이형은 손을 내젓더니 카운터 아래에서 수첩을 찾아 뒤적이며

 무선 전화기를 들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형에게는 수상한 친구들이 꽤 있다.

“어, 너냐? 난데, 응, 그래….”

그치만 이렇게 갑자기 있을 곳을 구하기는 역시 힘들겠지.

서너번 비슷한 내용의 통화를 더 하더니 진이형은 손가락 끝으로 

카운터를 두들기며 전화기를 밑도 끝도없이 노려보았다.

“왜? 잘 안돼?”

“…..”

“….저, 아니면 나 그냥 들어가도 돼. 괜챦을거야.”

그 자식한테 맞아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아냐. 한군데가 아직 더 있긴 있는데….그게 참….”

진이형은 말을 하다말고 뭔가 한참 더 고민을 하는 표정이었다. 

“….왜? 연락이 안돼?”

“걔가 좀….문제가 있어서.”

“문제? 무슨 문제?”

“ …..엄청난 포비아(무언가를 몹시 혐오하는 사람. 여기서는 그러니까 게이나

 호모 포비아정도로 이해하시면 됨….^^;;)야. 걔가.”

“음…..”

그건 좀 곤란한데….

“게다가….”

“게다가?”

“이제껏 네가 만나보지 못했던 타입이라….”

“어떤 점이?”

“….여러가지 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 

내가 입을 다물고 머그잔만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 진이형은 그래도 괜챦겠어? 

하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내가 뭐…이것저것 따질 처지인가…”

“그건 그렇다.”

웅얼거리듯 말하자 진이형은 수긍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이형한테 말한 것보다 사

태가 훨씬 심각해서 지금 여기로 피신해 온 것도 조마조마한데 그 자식만 피해다닐 수 있다

면 호랑이굴엔들 못 들어가겠는가. 맞아죽으나 물려죽으나 매한가지지.

“그럼 좋아. 대신.”

“대신?”

“니 정체를 반드시 숨겨야 돼. 알았지.”

“정체?”

놀라서 반문하자 형은 입을 꽉 다 문 채 고개를 끄덕한다. 저기 형…설마 그 정체란 게 내 성적 취향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치만 진이형 얼굴을 보니 내 짐작이 대충 들어맞는 것 같다.

“괴물이냐. 정체를 숨기게.”

“장난하지 말고. 그거 들켰다간 너랑 나랑 다 끝장이야. 끝장! 알았어?”

“알았어.”

형이 하도 진지한 얼굴로 강조를 하길래 나는 피식 웃다말고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다짐을 했다. 

사실 오래도 아니고 한 달 정도만 있을 건데 설마 그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싶었다. 

게다가 내가 뭐 이마에 나 남자랑 사귄적 있어요. 라고 써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알았어. 절대 안 들키고 잘 할께. 형.”

“그래. 그럼 지금 출발하자.”

“지금?”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로 전화를 한 진이형은 몇마디 주고받지도 않더니

 바로 승낙을 받았는지 서둘러 자리를 뜨려했다. 

“지금 가자구?”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구. 가자.”

“이 얼굴로?”

“상관없어. 잠깐. 너 옷도 안 가지고 왔지? 기다려. 티셔츠 몇장이랑 스웨터는 챙겨가야지. 

마침 엊그제 내가 사둔 거 있으니까 그거 가져가자.”

“저기, 형! 잠깐만, 저기!”

“시간없어. 서둘러!”

진이형이 나를 데려간 곳은 뜻밖에도 청담동에서도 가장 화려한 번화가였다.

스치는 건물 하나하나가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예쁜 로바다야끼, 퓨전 레스토랑, 일식집, 

바아, 카페테리아를 지날 때마다 내가 햐아, 하면서 창가에 시선을 주니까 형은 운전을 하면서도 그렇게 좋냐? 하며 물었다.

“응. 여기는 진짜 부자동네인가봐. 형. 저렇게 좋은 가게는 또 처음이야.”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진이형은 불쌍한듯 나를 한 번 보고는 하긴…그동안 변두리에서만 살았으니…하고 중얼거렸다.

뭐, 우리가 피차 다 그렇지 뭐.

“그 사람이 여기 살아?”

“아니.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렇구나…..”

운전을 하면서 간간히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던 진이형이 차를 세운 곳은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별장풍의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다. 

그 사람 혹시 여기서 일하는 웨이터인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들어갈만한 데가 아니어서 이런데는 밥 한끼가 내 하루일당만큼 될텐데

….밥값은 각자 내야겠지? 하며 두근두근 하고 있는데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입구에

 서있던 웨이터가 예약자리를 묻더니 반으로 접은 메모지 한 장을 건네준다.

“이게 뭐죠?”

“방금전 어떤 손님이 나가시면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진이형은 의아한 얼굴로 메모를 펼쳐보더니 다 읽고나선 나가자, 하며 내 팔을 잡아끈다.

“왜? 그 사람이 안된데?”

“그게 아니고 지금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들어가니까 직접 오래.”

“집으로?”

“응.”

어쩐지….이런 부자동네는 수상하다 싶었지. 그 사람도 밥값이 아까웠을거야.

“한 번밖에 안 가봐서 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진이형이 시동을 걸며 중얼거리는 걸 들어보니 무지하게 찾기 어려운 산동네에 사는 모양이었다.

“형. 난 괜챦아.”

“응?”

“난 산동네라도 상관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말에 진이형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하면서 눈을 크게 뜬다.

“아니. 어떤 집이라도 안 놀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내 말에 진이형은 풋, 하고 웃더니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놀라지 마라.”

“응. 각오는 돼있어.”

그치만 그런 내 짐작과는 다르게 진이형이 한참동안 차를 몰고 다다른 곳은 강변에 세워진 아파트 

쪽이었다. 여기는 달동네랑은 상관이 없는 지역인데도 형은 자꾸만 더 안쪽으로 근접해서 달리고 있었다

. 뭐, 알아서 샛길로 가고 있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는데 열중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차를 타고 나온 것은 꽤나 오랫만이었다. 평일 오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하늘

을 향해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들만 눈에 들어왔다. 밤이면 한강을 지나는 유람선이 내려다 보인다는 인상적

인 고층 아파트들을 보며 나는 부러운 얼굴로 진이형에게 말했다.

“형, 저런 집들은 집값이 엄청 비싸겠지?”

“뭐, 그렇겠지.”

“휴우….난 언제 저런데서 살아보나.” 

“…..멀지 않았다. 그런 날이.”

“응?”

“아냐. 아무 것도. 다 왔으니까 내릴 준비해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은 휙 하고 우회전을 하더니 갑자기 그 고층 아파트쪽으로 향해있는 진입로로 순식간에 들어섰다.

“내려.”

“….형? 여긴….!”

뜻밖의 일이라 말도 못하고 멍 하니 서있자 진이형은 뭐해? 하면서 내 등을 밀며 재촉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눈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연푸른색 대리석 건물은 세상물정에 어

두운 나도 매스컴이나 잡지에서 여러번 본 적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스타일 초고층 아파트 <타워 팰리스>가 아닌가!

“형? 설마…여기야?”

“그래. ”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진이형의 뒤를 따라 황망하게 아파트 입구로 쫓아들어갔

다. 그런데 그게 말이 좋아 아파트지 입구에서부터 길게 깔려있는 붉은색 카페트에 스르르 열리는 자

동문이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들어서자마자 잎이 매끄럽게 닦인 관엽식물들이 일렬로 늘어서있는 커다

란 로비에 체스판을 연상시키는 모자이크 무늬의 타일은 내 얼굴이 그대로 비쳐보일 정도였다. 주위로

부터 완벽하게 차단되는지 등뒤에서 자동문이 닫힌 후에는 아주 미세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고 공기중

에서는 희미하게 레몬향기가 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고상한 클래식 음악도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싱싱한 관엽식물들이 일렬로 들어서있는 로비에서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고 있자 푸른색 

정복을 입은 경비 아저씨가 다가와 정중하게 물었다.

“네?”

“아, 저희들은 친구를 찾아왔는데요.”

내가 깜짝 놀라 반문하자 앞서 가고있던 진이형이 얼른 나를 구해주러 나섰다. 

“친구분 성함은요?”

“저, 강성욱이요.”

진이형의 대답에 경비 아저씨가 아, 하더니 아까보다 더욱 정중한 태도로 엘리베이터 쪽을 가리켰다.

“죄송합니다. 그쪽에서 미리 전화를 주셨었는데. 이리 오세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살아오면서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정중한 대접을 받은게 난생 처음이라 난감한 얼굴을 했더니 내 옆에 

선 진이형도 나못지 않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최고층 펜트 하우스 입니다. 아마 그 한 집밖에 없으니 찾기 쉬우실 겁니다.”

친절하게 그런 설명까지 곁들이면서 경비 아저씨는 직접 45라고 씌여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기까

지 한다. 가격이 얼마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호두나무로 조각된 엘리베이터문이 닫히고 층수를 나타

내는 붉은 불빛이 바뀌는 걸 바라보다 나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진이형에게 큰소리로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형.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 그리고 또 펜트 하우스는 뭐야?”

“이런 고급 아파트의 제일 윗층을 펜트 하우스라고 하는데 걔가 바로 여기 산다는 말이지.”

“형. 설마 그럼 내가…”

“그 설마가 바로 맞는 거지.”

진이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디리링 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발목까지 푹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와 튜울립 모양의 등이 벽을 따라 

일렬로 빛을 반사해내고 있는 복도를 바라보다 눈을 크게 떴다. 아까 그 경비 아저씨의 말대로 

다섯발자국쯤 되는 그 복도의 끝에는 단 한 개의 문밖에 없었다.

       < 강 성 욱 >

육중한 검은색 문에는 그런 세련된 글씨체의 금빛 이름표 하나만이 붙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순금인 것처럼 보이는 그 명패를 얼굴을 바짝 대고 바라보던 진이형과 나는 동시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야?”

“그런가 봐. 나도 잘 모르겠다, 야.”

진이형과 나는 문 앞에서 수근거리다가 머뭇머뭇 초인종을 눌렀다. 

지잉 ㅡ 

그러자 대뜸 기계음과 함께 문이 덜컹 하고 열렸다.

우왓. 깜짝이야. 누군지도 안 물어보고 문을 열어주나? 

라고 중얼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진이형의 뒤를 따라 들어서다가 나는 그만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실내가 넓은 집은 처음이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거실의 커다란 창 앞에서 한 남자가 이쪽에 등을 돌리고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

다가 잠시 기다리라는듯 손을 내저었지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호화스러운 

내부에 기가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그 자리에서 눈만 깜박거렸다. 

창밖의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전면창이 모두 페어글라스로 된 거실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스타

일의 크림색과 연하늘색의 스웨덴제 소파세트와 엷은 등나무 빛깔이 번진듯한 느낌의 값비싼 카핏으로 

장식된 응접실과 벽 한쪽을 온통 술과 크리스탈 잔으로 채운 티크재의 바아(Bar)로 구분되어 있었다. 벌꿀

빛 벽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고도 섬세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반투명한 물결무늬의 유리 파티션으로 

구분해 놓은 식당과 어지럽게 빛을 반사해내는 샹들리에, 게다가 바닥은 모두 진짜 떡갈나무로 하나하나 짜맞춘 것이었다.

“형. 이것봐. 나는 이정도 넓이에 우드륨이라도 깔아보는게 소원인데…”    

내 멍한 중얼거림에 진이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봐도 정말 믿겨지지가 않는구나.”

“형. 나 진짜 집세 안 내도 돼?”

“그래. 너 횡재했다, 야.”

우리 둘이 기가 죽어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현관에서 그렇게 소근거리고 있는데 그 사이 그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섰다.

“안 들어오고 뭐해?”  

명령을 하는데 아주 익숙한 듯한 어조였다.

“응? 아, 그래.”

진이형은 그 말에 서둘러 신을 벗고 내 손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형의 손에 잡혀 억지로 그 엄청난 집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앉아서 얘기하자. 앉아.”

우리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창가에 놓인 커다란 하늘색 소파를 가리키며 자신도 맞은편

에 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소매를 걷은 고급스런 청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편안해 보이는 치노팬츠, 집안인데도 낡은 테

니스화를 구겨신고 있었다. 끝이 약간 치켜올라간 날카로운 눈매에 반듯한 콧날, 오만해 보이는

 입매가 저절로 보는 사람을 주눅들게 할만큼 강렬한 인상이었다.

도대체 뭐가 내가 여지껏 만나보지 못했던 타입이라는 거야? 

좀 건방지게 잘생긴 얼굴이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를게 없쟎아? 그

러나 그러한 감상도 잠시, 그는 뒤로 기대앉아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포개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부은 턱과 눈가의 멍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푹 숙였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냐는 곤란한 질문따윈 하지 않았다. 다만 오만한 어조로 내뱉듯이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긴장해서 그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것도 

진이형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온 대답이었다.

“화,황보경인데요.”

“흠, 웃기는 이름이군.”

캑! 진이형이 말한게 바로 이거였구나!

나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뭐 이런 예의없는 놈이 다 있나? 초면에 대뜸 반말을 하더니 멀쩡한 남의 이름을! 

“둘 다 따라와. 어떤 방인지 형도 궁금하지?”

내가 놈의 무례함이 던져준 충격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데 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보경아, 뭐해! 따라오라쟎아!”

진이형은 얼른 그를 따라 일어나며 내 옷소매를 잡아 끌었다. 생각같아서야 그 뒤통수에 대고 너같은 놈하

고는 한시도 같은 집에서 살 수 없어! 라고 소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고생고생해서 있을 

곳을 구해준 진이형 얼굴을 봐서도 그렇고 엄동설한에 갈 데 없는 내 처지를 생각하면 그건 아니될 말. 나

는 하는 수 없이 찢겨진 자존심을 뒤로 한 채 눈물을 삼키며 그 뒤를 쫓아갔다.

“이 방이야.”

이층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맨 처음 보이는 왼쪽 방문을 열며 그가 말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가장 처음 눈에 띈 것은 검은색 앤틱제의 커다란 침대였다. 그 위에는 갓 세탁한듯 청결

하고 포근해 보이는 흰색 시트가 깔려있어 나는 순간적으로 집주인에 대한 적의는 까맣게 잊고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집도 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때의 기억 때문인지 빈약한 식사나 낡은 옷은 참을 수

 있어도 지저분한 잠자리는 질색을 하는 나였다.

물론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욕실 깔개 위에서 자라고 해도 기꺼이 그래야겠지만.

“안쪽 문은 욕실이야. 욕실 뒤에는 탈의실이 있고. 아, 순간 온수기가 가끔 나갈지도 몰라. 그럴 때는 저기, 

보이지? 전등 스위치 옆에 온수기 케이스를 열고 점검 버튼을 누르면 곧 들어올 거야. 조만간 다시 손을 봐야겠지만.”

문틀에 한쪽 어깨를 기댄 채 그는 조금 의외다 싶을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이야. 임시거처라 그래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상상외로 굉장히 좋다. 고맙다, 야.” 

“그래?”

쭈뼛거리며 계단을 오르던 때와는 달리 방에 들어서자마자 꼼꼼하게 내부를 살펴보던 진이형이 만족하

면서도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웃자 그는 의외라는듯 한쪽 눈썹을 조금 치켜올렸다.  

“맘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러더니 다시 아래층으로 휑 하니 사라져 버린다.

“아니, 형.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녀석에게는 절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형에게 참았던 분통을 터트렸다. 

“보경아. 네가 이해해라. 쟤가 원래 성격이 그래. ”

진이형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그렇지! 어우…정말 진이형만 아니면 내가…..”

“그래. 그래. 한 달만 참아. 응?”

진이형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나도 더 이상 화를 내 수가 없다. 게다가 당장 폐를 끼쳐야 할 신세

가 아닌가. 앞 뒤 정황을 떠올린 내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짓자 진이형은 자자, 우리도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하면서 계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진이형의 얼굴이 왠지 초조해보이는 건 내 기분탓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마지막 계단에 발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어, 너 어디 가는 거야?”

“음. 볼 일이 좀 있어서.”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놈이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값비싸 보이는 슈트를 아래위로 

걸쳐입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언제 올 건데?”

“몰라.”

그러더니 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 마디 말도 없이 휙 하고 문을 열고 나가 버린다.

쾅 - 하고 문이 닫히자 철컥 하고 오토락이 잠기는 소리가 넓은 집안을 울렸다. 

정말 도대체가 예의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놈이었다.   

“…..이제 어쩌냐?”

놈이 사라진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진이형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지만…

.나라고 뭐 별 수가 있나? 나도 생전 처음 와본 집인데. 

“몰라. ”

내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진이형은 음, 음, 하면서 한참동안 뭔가 생각하더니 걸음을 돌려 식당으로 향했다.

“우선 밥부터 먹자. 너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지?”

“남의 집에서 그래도 돼?”

“그런 거 신경쓰는 놈 아니야.” 

형은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가더니 구석에 있던 집채만한 냉장고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와 ㅡ”  

촌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꼭 TV에 나오는 광고처럼 칸

칸마다 랩으로 씌워진 요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나. 참. 역시 부르죠아의 식생활이란…..보경이 너 랍스터 먹어봤니?”

안쪽에서 야채까지 완벽하게 곁들여져 있는 붉은 가재요리 접시를 들어보이며 진이형은 혀를 찼다.

“텔레비전에서 본 적은 있는데….”

“이것봐. 연어 스테이크를 접시째 냉장고에 넣는 놈은 아마 걔밖에 없을 거다. ”

별의별 희귀한 음식접시들을 다 들어보인 다음 진이형이 선택한 것은 가장 안쪽에 들어있는 연어 스테이크였

다. 나는 과연 남의 집에 와서 이런 걸 마음대로 먹어도 될까, 하고 의심스러웠지만 시장했던 터라 일단 내 앞에 

음식이 놓이자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먼저 밥을 먹자던 진이형은 식욕이 없는지 내내 포크로 생선을 부

스러뜨리기만 하는 것이다.

“형은 안 먹어?”

“응? 아. 먹어야지.”

“무슨 일 있어?”

“아냐. 아무 것도.”

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푹 쉬는데….그 마음 내가 다 알지. 

“형.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눈치껏 잘 할께.”

우물거리다말고 웃으면서 말하자 진이형은 휴우…하면서 꼬리가 긴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고 내 손을 꼬옥 잡는다.

“보경아.”

“응?”

“미안하다.”

“뭐가? 이렇게 좋은 집 구해줘서?”

농담처럼 한 말에 진이형은 더욱 착잡한 얼굴이 되었다.

“나 너를 위해서 한 일이니까. 형을 이해해라.”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했지만 이해하라는데 별 수 있어? 이해해야지. 

형한테 원래 이렇게 엉뚱한 구석이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는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형

은 그래. 하면서 뭔가 애절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가게가 바빠질 시간이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그래야지. ”

“그래. 지금 한창 바쁠 테니까.”

막상 이 커다란 집에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이 들자 좀 무서워졌지만 형이 걱정할까봐 나는 애써 밝은 얼

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이형은 한숨을 푹푹 쉬더니 절대 정체를 들키면 안된다고 몇번이나 다

짐한 다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형. 잘가.”

“그래. 전화할께.”

나는 문을 나서는 형한테 손을 흔들었다. 진이형은 복도에 나가서도 몇번이나 나를 

돌아보더니 불과 얼마되지도 않는 엘리베이터까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걸어갔다. 꼭 6개월전  

클럽에서 만난 바텐더와 15만원짜리 반지하 삯월세방에 살림을 차린 나를 보러왔을 때하고 비슷

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우울한 얼굴이라고나 할까…..낯선 집에 나를 혼자 남겨두고

 가는게 무척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쓸쓸해져 나는 터벅터벅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다 크고 나서도 나의 문제점은 항상 사람을 너무 잘 믿어 성급한 판단을 내

린다는 것이다. 기껏 만난다는게 그런 나쁜 놈을 만나 집도 절도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니….

게다가 성질나쁜 집주인한테까지 정체를 숨겨야하는 서글픈(?) 운명…..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우울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풀썩 드

러누웠다. 사실 완전한 의미로 내 방은 아니어서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크

고 좋은 방은 생전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는 또래의 고아원 아이들과 열명씩 부대끼며 살았고 도시

로 도망쳐 나온 뒤에는 두평밖에 안되는 변두리의 습기찬 지하방에서 진이형과 근근히 살았으니…

..사실 뭐 그 뒤에도 사정은 비슷했지만. 

“좋겠다. 이렇게 큰집에 살면…..”

진이형이 말한 게 특별하다는게 바로 이렇게 부유하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외국영화에서나 보던 화려

한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외로 너무나 크고 어마어마한 집에 놀라긴 했지만 그

러면 그럴수록 이상한 부담감이 가슴 한 구석을 짓눌러 왔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에이, 모르겠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귀챦아 나는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어차피 여기에 있으면 안전할 테니까 집주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얌전히 있다 조용해지면 어떻게든

 방을 구해 나가면 되겠지. 어차피 그동안 서로 얼굴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대충 그렇게 정리가 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집주인이 좀 못됐으면 어때. 내가 좀 참으면 되지 뭐….”

푹신한 침대에 등을 대자 그동안 누적됐던 피로가 몰려와 나는 둥글게 몸을 말았다. 시트에뺨을 대자마

자 부드러운 섬유린스의 향기와 함께 서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너무나 기분좋은 냄새였다. 그래서 잠깐만, 

아주 잠깐만 침대에 누워본다는게 나는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행복한 꿈을 꾸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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