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33/141)

 비운의 신데렐라 <32>   

쾅쾅쾅쾅!

쾅쾅쾅쾅!

<야! 문 열어! 너 그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야! 문 열지 못해!>

누군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발로 현관문을 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이건?” 

덕분에 나를 누르고 있던 놈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 내 몸 위에서 일어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야! 문 안 열어! 황보경!!! 너 없는 척 해도 소용없어! 끌어내기 전에 나오지 못해!!!>

헉, 이 목소리는! 설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그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라 내 얼굴의 핏기가 순식간에 싹 가셨다.

아닌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야! 안 나와? 진짜 안 나온다 이거지! 야! 야!!!>

미친듯이 생각하는 사이에도 바깥에서는 계속 고함을 지르며 쾅쾅 문짝을 부술듯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야! 그게 얼마나 비싼 문짝인지나 알아? 당장 그만두지 못해! 

어떻게든 달려나가 이 위기를 넘겨보려 했지만, 

“어떤 자식이야?” 

나보단 거실 가까이에 있던 놈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안돼에에에ㅡㅡㅡㅡ문을 열면!!! 

그러나 슬라이딩까지 해가며 뛰어든 보람도 없이 놈은 현관으로 가 벌컥 문을 열더니 그에 맞먹는 성량으로 소리쳤다. 

“너 뭔데 남의 집에서 시끄럽게 야단이야?!!” 

아아….안돼….!! 

“하, 니가 바로 그 잘난 황보경이 새애인이라 이거지?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야! 보경이 어딨어! 당장 나오라고 그래!”

엄마야 ㅡㅡㅡㅡ!!!!

기억에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살벌하고 기세등등한 성도 자식이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선 

순간 나는 충격과 공포로 그 자리에서 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하나 살벌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 

씩씩거리며 코뿔소같은 콧김을 내뿜는 성도자식도 성도자식이지만 손을 허리에 얹은 채 현관

에 선 놈도 이제껏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도자식도 그 기세에 주눅이

 든듯 잠깐 움찔했다가 놈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는 날 발견하자마자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라, 니가 거기 숨어있었다 이거지? 야! 니까짓게 도망가면 나한테 안 잡힐 줄 알았

어? 이 자식, 너 당장 거기서 안 나와!” 

어떡해, 무, 무서워….ㅠㅠ 

내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사시나무떨듯 벌벌 떨자 화가 난 놈이 사납게 성도 자식 앞을 막았다.

“뭐야 너! 끌어내기 전에 당장 안 나가?”

“야! 내 물건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야?” 

성도 자식도 눈에 보이는게 없는지 대놓고 행패를 부릴 기세다. 허나 성질이 불같기로는 

결코 놈도 만만치 않다. 

“니 물건? 누구 멋대로 다 니꺼야? 내 집에 있는 건 다 내 꺼지!!!” (개싸움…ㅡㅡ;;) 

“뭐? 야!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나 저 자식이랑 6개월이나 같이 살았다구. 내가 저

자식 기둥서방이라 이 말씀이야! 긴 말 필요없어! 너 이리 나와! 안 나올래!”

“시, 싫어. 안 가! 안 갈꺼야!” 

나는 구둣발로 성큼 거실로 들어서 내 어깻죽지를 붙잡으려고 하는 성도에

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버텼다. 

“너 좋은 말로 할 때 그 손 놔. 안 놔?!” 

“비켜, 이 새끼야!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너 이리 안 나와?”

“싫어어어….! 싫단 말야!!!”

“안 나온단 말이지?! 썅! 다 때려 부셔버릴 테다!”

버럭 소리지르며 나를 끌고 나가려다 놈에게 막혀 뜻대로 되지않자 성도 자식은 눈을 희번

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 엄청나게 값비싼 크리스탈 장식품을 머리위로 집어 들었다. 

너, 너, 너…그거 얼른 놓지 못해! 

경악한 나와는 달리 놈은 흥, 하고 코웃음치더니 팔짱을 끼고 그 사이 냉정을 되

찾은듯 명백히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너 그거 7억 5천만원 짜리인데 변상할 자신 있으면 깨.” 

“뭐! 이 새끼가!!!” 

아무리 성도자식이 무식해도 지금 자기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자각정도는 있었다. 

“그럼 내가 못 던질 줄 알아?!!”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개져 치켜올린 크리스탈 장식품을 막 내던지려는 찰

나 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그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안 돼! 그거 놔! 깨지면 큰일난단 말야! “ 

그거 니가 평생 벌어도 다 못 갚는단 말야! 나만 때리면 되지 그건 왜 건드려!!!

“이 자식이, 어딜 붙잡아!”

하지만 다음 순간 매달린 보람도 없이 나는 성도가 크게 휘두른 팔에 맞아 악

,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야야야….” 

그 동안 놈과 살면서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데...성도 이 자식은 얼굴 보자마자…!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ㅡ 하는 무시무시한 파열음과 함께 거실과 식당사이의 강화유리로 된 파티션이 박살이 나며 성도가 그 위로 뒹군 것은. 

세상에~ 얼마나 세게 쳤으면 그 두꺼운 강화유리가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너, 두고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니가 아직 무서운 꼴을 못

 본 모양인데 어디다가 감히 손을 대? 넌 오늘이 제삿날인 줄이나 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놈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쓰러진 성도자

식 멱살을 붙잡아 거실로 끌어내 무차별로 두들겨 패는데…

난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끔찍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미 최초의 

일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쓰러져 있는 성도자식을 집어던지며 퍽퍽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대는데 저러다 죽이지나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일어나! 두 번 다시 그 손을 못 쓰게 해줄 테니까!”

거실 바닥의 값비싼 호피무늬 양탄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나

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길길이 날뛰는 놈을 붙잡고 말렸다. 

“이제, 이제 그만하세요! 그러다 죽으면 어떡해요! 엉엉….!” 

“지금 그게 문제야! ” 

그, 그럼 뭐가 문제야….니가 이 자식을 죽여서 교도소라도 가면 난 어떡하라구….! 

결국 간신히 그 소란이 진정된 것은 일이 벌어지고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뒤늦게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고 방범대원에 경찰까지 출동해 피투성이로 의식을 잃은 성도자

식은 <무단 가택 침입죄>와 <소란 및 기물파손죄>로 끌려갔다. 성도 자식이 항상 가죽잠

바 안에 넣고 다니던 잭나이프도 증거물로 더해져 <특수강도> 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경

찰은 말했다. 그 뒤에 남은 건 아수라장이 된 실내와 그 와중에 깨져버린 크리스탈 장식품의 파편, 그리고…. 

“그래, 그랬단 말이지, 너랑 진이형이 날 속였단 말이지,”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놈이 이를 악물며 그렇게 말하고선 총맞은 사자처럼 거실 안을

 서성대는데 정말이지 나는 너무 무서워 그 자리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아까 성도 자

식이 쳐들어왔을 때도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몇천배는 더 공포스러운 것 같았다.

“저기요…처음부터 속일려구 그랬던 게 아니구요….”

맨발로 온통 깨진 유리조각 투성이인 거실을 서성대다 발이라도 베일까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시끄러! 손 똑바로 못 들어!!!” 

히익 ㅡㅡㅡ 

나는 놈이 소리 지르기가 무섭게 기겁을 하며 엉거주춤 들어올리고 있던 팔을 번쩍 더 위로 치켜올렸다. 

놈은 거실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벌벌 떨고있는 나를 죽일 듯

 쏘아보더니 너무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듯 힘줄이 파랗게 일 정도로 주

먹을 움켜쥐고 격렬한 발걸음으로 거실 이쪽부터 저쪽까지 수백번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켜보는 내 심정은 어떻겠어. 차라리 두들겨 맞는게 낫지 너무 무서워서 그 자

리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뭐?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애니까 잘 해주라고? 시골서 갓 상경해서 아는 사람 하나 없으

니까 밖에 내보내지 말고 집에만 있게 하라고? ” 

뜨아아아 ㅡㅡㅡ 진이형, 그런 새빨간 거짓말까지 한 거야? 

놈이 쏘아붙이는 말을 듣고 나는 사색이 되어 등 뒤의 벽에다 몸을 딱 붙였다. 

엉엉, 차라리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녹아 없어지고 싶어….ㅠㅠ 

내 통탄한 심정은 아랑곳없이 놈은 수십번은 더 그렇게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거실 창 앞에까지 가서 홱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

헉!

“…왜, 왜요?”

“솔직히 말해. 너 정말 그 자식하고 같이 살았었어?” 

그, 그런 치명적인 질문을…!

“왜 대답을 못해?! 같이 살았었냐고 묻쟎아!” 

내가 머뭇거리자 놈이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놈의 화

만 더 돋굴 것 같아 나는 움찔, 하며 얼마…안되는데…하고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나?”

“유,육개월….” 

“하!” 내 대답을 들은 놈은 기가 막히다는듯 다시 돌아섰다.

“육개월? 육개월이라구?!!”

오, 오개월이라고 할 걸 그랬나…ㅠㅠ 

놈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듯 아까 성도자식과 난투극을 벌일 때 

ㅡ 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두들겨팼지만 ㅡ 흐트러졌던 자신의 머리칼을 난폭하게 쓸어올렸다. 

“육개월, 육개월이란 말이지, 응?” 

어떡해…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더니…성도 자식보다 화난 놈이 더 무서워….

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무릎 꿇고 손 든 자세 그대로 눈을 꼭 감고 흑흑, 비어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 

넌 정말 끝까지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구나, 오성도. 하필이면 그때 쳐들어와서…! 

“울지 마! 뭘 잘했다고 울어? 지금!”

히끅 ….!

“아,안 울어요….” 

나는 놈의 고함소리에 끅끅거리며 목구멍으로 울음을 삼켰다. 

정말이지 나란 놈의 팔자는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걸까….어떻게 어떻게 놈을 꼬드겨서 잘되나 했더니만…. 

닥쳐올 일이 두려워 꼼짝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놈은 그런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온갖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내며 거실 안을 휘저었다. 

“너 바보야? 사람 볼 줄 몰라? 척 보면 그런 인간들이 어떤지 몰라서 두

들겨 맞으면서 육개월이나 살았단 말야? 이 바보 멍청아!! ” 

그, 그렇게 심한 말을….ㅡㅡ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 싶어도 놈의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아 항의의 표시로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성질 같아서는 정말 그 자식을 두들겨 패서 죽여 버리고 싶은 걸 참은 거야, 알아?”

헉, 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자…. 

너무나 살기등등한 놈의 기세에 나는 끽 소리도 못하고 놈의 화가 가라앉

기만을 빌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했다. 

“너 같은 바보는 정말 보다 보다 처음이야! 알기나 해?!” 

그래, 나 바보야, 알아. 알고 있으니까…. 제발 왔다갔다 하지 좀 마 무서워 죽겠어….ㅠㅠ

한참을 더 그렇게 거실을 서성대며 나를 기절직전까지 몰아가던 놈은 이윽

고 시간이 지나자 좀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바라보며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다행이다 이 정도로 끝나나 봐!

나는 이게 어디냐 싶어서 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층에 올라가서 내가 내려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말/고 있어. 알았어?”

“이, 이층에요?” 겁먹은 눈을 들어 그렇게 묻자, 

“그래. 지금 니 얼굴만 봐도 화가 나서 아무 거나 다 때려부수고

 싶으니까 올라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내려오지 마. 알았어?” 

놈은 그렇게 말하곤 꼴도 보기 싫다는듯 다시 돌아서서 흘러내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나는 놈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서 그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얼굴만 봐도 화가 나서….라고 지금 분명 그렇게 말했지. 

….싫어? 내가? 얼굴조차 보기 싫을 정도로?

“뭐해! 올라가라는데!” 

그 말뜻을 깨닫고 눈가에 눈물이 괼 것 같아 멍하니 있는데 놈이 다시 소

리쳤다. 나는 흠칫 놀라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가 나를 바라보는 놈의 시선을 깨닫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면…되쟎아, 가면…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모르게 이층으로 올라와 내 방 침대에 앉았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일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

를 대하는 놈의 살벌한 태도에 겁을 먹은 건지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설움이 치밀어 올라 나는 펑펑 눈물이 났다.

“흑..흑…흐윽…흐으윽…흑…” 

한 번 시작된 울음은 쉽게 그치질 않는다. 처음엔 침대에 걸터앉아 옷소매로 눈물

만 훔치다가 나는 너무 서러워서 침대에 엎드려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꼈다. 

“엉엉….이제 어떡해….!”

다 끝났어. 이제 다 끝나버린 거야! 내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데….어떡해….!!! 

어쩌면 이미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연히 와야 할 일이 조금 더 빨리 온 건지도 모르지만. 

울고 울고 또 울고…. 

나는 침대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날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이제나 저제나 혹시라도 놈의 화가 풀려 나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까지 잠

도 안 자고 기다렸지만….끝내 놈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동이 터올 무렵. 쾅 하고 세차게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가 버렸어….흑…..”

나는 텅 빈 집안에서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더듬

더듬 낡은 슈트케이스를 찾아 그 안에 아무렇게나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 

놈이 나를 다시 보면 이제 분명히 나가라고 할텐데 그렇게 되기 전에

 알아서 없어져 줘야지. 여기서 더 이상 비참해지기 전에. 

“진이형…미안해…이렇게 될 줄은…나도 몰랐어….” 

놈이 형한테까지 화를 내면 어떡하지. 형은 다 나를 위해서 한 일인데. 

그치만 진이형 나도 할 수 있는데까지 했다구. 나도 이렇게 쫓겨나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울고도 아직도 눈물이 남았는지 축축히 젖어오는 눈가를 닦으며 나는 낡은 슈

트케이스 안에 내 옷가지들을 모두 넣고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차림 그대로 얇은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남은 것은 침대 아래 흩어져 있는 놈이 얼마 전에 사준 라벨도 떼지 않은 새 옷가지들. 

그 중에는 내가 제일 소중하게 아끼는 푸른색 스웨터도 섞여 있었지만 나는 쓰라린 마음

을 참고 그 옷들을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슈트 케이스를 질질 끌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놈의 방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지만 열려진 현관문 사이로 들어오

는 찬바람이 그런 나의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었다. “…가야지….” 

놈이 돌아오기 전에. 놈이 와서 나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나는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놈에게 매달리고 말 것만 같으니까….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현관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생각을 바꿔 천천히 식당으로 향했다. 

“그게…여기 놔뒀을텐데…..” 

이 집에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을 거지만….그래도 단 한 가지. 내가 

찾는 것은 놈이 밥 먹을 때마다 쓰던 숟가락과 젓가락 한쌍이었다. 싱크대 서랍 안에는 이

거랑 똑같은 수저가 가득 들어있으니까 하나쯤 없어졌다고 해도 놈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여깄다….”

놈이 쓰던 수저를 소중하게 가슴에 품어안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러다가 생각

을 바꿔 이번에는 테라스로 향했다. 

“이것도 가지고 나가야지….” 

품 안에 든 것은 얼마 전 슈퍼 옆 꽃집 아저씨가 떨이로 팔기에 사다놓은 작은 벤자민 화분 하

나. 아침 저녁마다 물을 주면서 키운 건데 내가 없어지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

“잘 있어. 얘들아….” 

마지막으로 옹기종기 테라스에 모여있는 화초들을 향해 작별인사를 한 후 나는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화분을 끌어안고 다른 한 손에는 낡은 슈트케이스를 끌며. 

“……안녕.”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문이 닫히기 전 작별을 고했다.

이제 두 번 다시 잠에서 깨어난 너를 볼 수 없겠지. 

두 번 다시 너를 위해 커피를 끓일 수도 없겠지. 

네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고 

현관에 서서 너에게 인사를 할 일도 없겠지. 

그래도….건강해야 해. 

너는 위가 안 좋으니까 꼬박꼬박 아침도 챙겨먹고 

하루에 커피는 꼭 한 잔만 마셔야 해. 

너무 밤늦게까지 책보지도 말고.

감기들면 하루종일 콜록거리니까 샤워후에 머리는 꼭 말려야 해. 

그리고….. 그리고….

“흑 ….이 나쁜 놈아…..”

나는 너를 정말로 좋아하는데. 

니가 나한테 아무리 바보라 그러고 니가 나한테 아무리 멍청하다고 그래도 나는 그런 네가 정말정말 좋은데.

니가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았어도 니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눈에 띄게 잘 생기지 않았어도 나는 너를 좋아했을텐데. 

너는 얼굴도 보기 싫을만큼 내가 싫은 거야?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새벽녘의 거리를 나는 여기저기 정처없이 헤매었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서웠어도 그 집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아아 나는 아마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를 좋아했었나봐.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걸꺼야. 

“잘 있어….”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내가 4개월 동안 살았던 아파트를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애처롭게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총총히 어슴프레한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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