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27>
첫번째 날 ? 작전실패
나는 식탁에 앉아 달력을 펼쳐놓고 어제 날짜에 붉은 사인펜으로 X 표시를 한 뒤 입안에
든 하드를 아드득 아드득 깨물어 먹으며 아직도 놈이 잠들어 있는 방 쪽을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첫날의 실패야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정말 성질 나는군.
하드를 다 먹고 난 뒤 남은 나무막대기까지 으적으적 씹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띄는 행주란 행주는 죄다 꺼내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넣은 다
음 세제를 붓고 사정없이 부글부글 삶아대기 시작했다.
흥. 너가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말야,
야. 강성욱. 너 사람 잘못 봤어.
나 보기보다 대범한 사람이야.(….누가 ㅡㅡ;;) 너가 그런다고 내가 눈이나 깜짝할 줄 알아?
세탁용으로 쓰는 긴 나무 젓가락으로 찔러대고 있는 행주가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살기어린 얼굴로 거품을 내며 끓고있는 행주를 연신 이리저리 뒤집었다.
한 시간 전에 아무래도 더 이상 자면 학교에 늦을 것 같아 잠들어 있는 놈을 살살 건드
려 깨웠더니 놈은 <귀챦아! 자게 내버려 둬.> 하고 한 마디하고는 눈도 뜨지않고 다시
휙 돌아 누워버렸다. 순간 어젯밤 일까지 떠올라 배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들고있던
쿠션으로 눌러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을 안한 것도 아니지만….
진짜 앞날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참자…참아….”
으휴! 그 놈의 사랑이 뭔지.
이 자식아. 내가 죽으면 너 때문에 아마 사리가 칠백개는 거뜬히 나올 꺼다!
새하얗게 삶아진 행주들을 찬물에 빨아 테라스에 널다 말고 나는 놈이 잠들어있는
복도 안 쪽을 사나운 눈길로 일별했다. 내가 이 바닥에서 십 년 넘게 살면서 별의별 놈
들을 다 만나봤지만 저 방에 잠들어 있는 놈처럼 말 한마디로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진짜 처음이었다.
아니 한 번만 쳐다보고 예쁘다고 해주면 그 잘난 입이 닳기라도 해?
아우~ 신경질 나!!!
뻗쳐오르는 분노의 에너지를 어쩌지 못하고 나는 이를 갈며 마른 걸레를 찾아 올림
픽 스타디움같이 드넓은 거실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집안일 하는 사이
사이 시간 날 때마다 가구용 왁스로 윤을 내기 때문에 마룻바닥은 거울인지 바닥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청결하게 반짝거렸지만, 아 성질나는 데 지금 그게 문제야?
이거 다 닦고 이층 복도까지 닦아도 분이 안 풀린다구. 나는.
성질 같아서는 그냥 확!!!
손을 홱 치켜올리며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가 열리더니 뻐꾸기가 불쑥 뛰쳐나와 삐리리 삐리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앗! 열 한 시쟎아!
큰일났다. 다른 때 같으면 벌써 학교에 갔어야 할 시간인데!
방금 전까지 펄펄 뛰고있던 것도 잊고 나는 놀라서 걸레를 손에 든 채 나는 듯
이 놈의 방으로 뛰어갔다. 복도를 돌아 벌컥 하고 방 문을 열어보니 놈은 아까
내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등을 보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야! 일어나! 일어나란 말야!
그러나 말은 생각과는 정반대.
“일어나세요…네? ”
예민한 놈 답지 않게 서너 번을 더 애타게 부르고 나서야 놈은 겨우 움찔하며 눈을
떴다. 천천히 긴 속눈썹이 열리고 그 안의 동공이 초점이 맞을 때까지의 그 짧은 순간
을 나는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아유. 이뻐라.
누구네 집 아들인지 얼굴 하나는 진짜 끝내주네.
“몇 시야, 지금?”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놈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피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왔다.
“지금요?”
반사적으로 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더니,
“머리 치워. 시계 안 보이쟎아.”
크흑. 왕싸가지….ㅠㅠ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돼?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열 한시인데요..>라고 대답했더니 음….하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커피 드릴까요?”
아무리 놈이 싸가지없이 굴어도 놈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게 내 인생의 비극. ㅠㅠ
“….조금 있다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놈은 상체만 일으켜 세운 자세로 고개를 뒤로 젖혀 피곤한듯 눈을 감았다.
“누나들은 일어났어?”
두근두근.
약간 열린 놈의 입술이 시야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어…저기, 그러니까…그게…”
내가 갑자기 말을 더듬자 놈이 목 뒤로 손을 가져가다 말고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안 일어나신 것 같은데…”
….무지 섹시하다아….
“지금 아침 차릴까요?”
지금 샤워하고 아침 먹고 나가도 다른 때보다 서너 시간은 더 늦은 것 같은데 오늘따
라 왜 이리 늑장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심스런 어조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놈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사이드 테이블에 걸쳐두었던 가운을
집어들었다.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저 머리카락 좀 한 번만 만져봤으면….
“나 아침 안 먹어.”
“네?”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다 깜짝 놀라 마른 걸레를 손에 든 채 반
문했다. 그러자 놈은 붙박이장 안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며 나
른하게 말했다.
“그동안 논문 때문에 바빠서 누나들이랑 시간을 못 보냈어.
오늘은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갈 생각이니까 너도 옷 갈아입고 준비해.”
그리고는 곧바로 욕실행.
방 안에 남은 것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침대 가에 서있는 나.
그러니까 그 말은….나도 데리고 간다는 뜻?
“학교에 안 간다고?”
정말? 리얼리?
기쁨보다도 믿을 수가 없어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물소리가 나는 욕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날만 새면 학교에 가서 새벽별 뜰 때나 들어오는 너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들이 온 지 벌써 한 달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두 사람 다 놈과 보낸 시간보다는
나랑 보낸 시간이 더 많으니… 둘이서도 외출은 커녕 하루종일 나랑 집 안에서 뒹구니
오죽하면 내가 낳지도 않은 딸이 둘이나 생긴 기분이었겠어.
“자기도 그동안 좀 미안했던 모양이지?”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쟎아!
혼잣말을 하다 불현듯 정신이 들어 나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넓은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소위 말하는 <나들이>!!!
놈에게 잘 보이려면 나도 얼른 씻고 예쁘게 꾸미고 가야 하는데.
“욕실, 욕실, 아니, 참, 지금 들어가 있지, 그러면 이층으로…”
붙박이장 서랍을 뒤져서 잘 개놓은 타올을 꺼낸 다음에 나는 서둘러 이층 계단을 뛰어올
라 복도 맞은편의 세탁실에 딸린 욕실로 달려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나보다 먼저 타
올을 터번처럼 머리에 감은 가운차림의 강세련이 한 팔을 화장대에 짚은 채 속눈썹에
공들여 마스카라를 바르고 있었다.
씨이…나도 급한데.
수건을 비비 꼬며 거울 속으로 쳐다보자 왜? 욕실 쓰려구? 하고 묻는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자
“자.” 하고 몸을 살짝 피해주는 것 까진 좋은데…
뜨아아아!!! 이게 뭐야! 엉망진창이쟎아!
초록빛 나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아직 녹지않은 입욕제 캡슐과 샤워기의 샴푸거품
, 욕조턱에 걸쳐진 이태리 타올, 거기다 목이 길죽한 크리스탈 샴페인 글라스는 아슬아슬하
게 창가에 올려져 있었다.
내가 못살아 정말~~~
생각 같아서는 다시는 욕실에 들어오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들들 들볶고 싶었지만 시간이 얼
마 안 남은 관계로 타올에 쌓인 뒷모습을 향해 눈만 한 번 짝 하고 흘긴 후 나는 푸푸푸푸 초스피드
로 세수를 했다. 그런 다음 타올로 물기를 닦고 있는데 쾅쾅쾅 작은 누나가 급하게 문을 두드려댔다.
“두 사람 다 빨리 나와! 성욱이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그리고는 총총총 멀어지는 발소리.
“설마 쟤도 우리랑 같이 가는 거야?”
세수를 마치고 비누거품이 묻은 세면대를 샤워기로 대충 씻어내고 있는데 화장을 마치고 욕
실문을 열던 강세련이 못믿겠다는듯 작은 누나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가 무슨 집지키는 셰파트도 아닌데! 당연히 같이 가는 거지!
그런 무신경한 발언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해대는 얄미운 강세련이 바닥에 남기고 간
슬립에 탁탁하고 발길질을 하는 작은 보복을 가한 후 나는 타올을 목에 걸고 재빨리 아
래층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거실에서 작은 누나와 놈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걸보니
놈은 벌써 준비를 끝마치고 방에서 나간 모양이었다.
“헤헤~ “
침대 위에 던져진 놈의 가운을 보니 새삼스럽게 놈과 외출한다는 실감이 나 나는 들뜬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꽃단장 ♪ 꽃단장 ♬
너무 늦으면 안될 것 같아 토닥토닥 냄새가 좋은 핸드 로션을 조금 볼에 펴바르고
(세 개에 2000원짜리 할인매장 특가세일 상품…ㅡㅡ;;) 앞머리를 귀 옆에 이쁘게
꽂은 다음 놈이 사준 패딩코트를 입고 뒤뚱뒤뚱 방을 나섰다. 얼마 전 놈에게 다시 되돌려 주겠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가
<자꾸 까불면 다 갖다 버린다>는 놈의 말에 황급히 다시 내 방에 올려놓았던 건데 어차피 입을 거라면 이런 날에 입어야지.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성욱이 벌써 주차장에 내려갔는데.”
어? 벌써?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캬라멜색 그라데이션의 휘메일 밍크 반코트를
입은 강세련뿐이었다. 보기에도 무시무시하게 가느다란 검은색하이힐을 신고 완벽하게
셋팅된 머리를 어깨로 늘어뜨린 강세련은 나를 보자마자 모양좋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와. 늦으면 두고 간댔단 말야!”
앗, 그러면 저 여자랑 집에 둘이 남는 거쟎아!
<그것만은 절대 싫다>는 일념으로 우리 둘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놈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완벽한 옆얼굴을 보이며 옆에 선 강세련한테서는 이국적이면
서 달콤한 꽃향기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느껴질 듯 말 듯 은은한 라임향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두 사람 뭐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지하 주차장의 맨 안쪽에서 주차해놓은 차에 기대서서 놈과 무슨 이야기를 하
고있던 작은 누나가 우리를 보자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서 타요.”
“나는 성욱이 옆에…!”
그럴 순 없지!
작은 누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잽싸게 놈의 옆좌석으로 몸을 날렸다.
“앗. 거긴 내 자리란 말야!”
그런 게 어딨어. 먼저 앉으면 임자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듯 순진한 얼굴로 <어. 그럼 자리를 바꿀까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무슨 자리를 바꿔. 그냥 가. 성욱아. 출발하자.”
캬하하하. 내가 노린 게 바로 이거란 말씀이지.
백미러에 비친 강세련의 뿌루퉁한 얼굴을 회심에 찬 표정으로 훔쳐본 뒤 나는
차창을 통해 맑게 개인 겨울하늘을 즐거운듯 올려다보았다.
어딘가로 떠나기에는 정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게다가 이렇게 놈 옆에 앉아서….(평소에는 짐이 많아 맨날 뒷자석에만 타봤음 ㅡㅡ;; )
하아…이 차를 타고 둘이서 멀리 바닷가에라도 가면 좋겠다.
월미도나…아니면….
한쪽 손을 뺨에 고인 채 꿈꾸는 표정으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갑자기 강세련이 뒤에서 볼멘 소리로 말했다.
“성욱아 나 배고파.”
아니 차가 출발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심술을…
놈이 운전을 하다 말고 백미러로 흘깃 쳐다보자 강세련은 본격적으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침도 안 먹었쟎아. 나 배고프단 말야.”
차려준다고 해도 싫다고 할 때는 언제고…ㅡㅡ
“참아, 두 시간이면 도착할 테니까.”
“싫어. 배고프단 말야.”
점점…ㅡㅡ#
“성욱아, 그럼 우리 먼저 <산정>에 갔다가 가자. 어차피 오후에 들를 생각이었쟎아.”
강세련이 계속 떼를 쓰자 보다못한 작은 누나가 중재에 나섰다
. 놈은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래?”
“네?”
“너도 배고파?”
그야 아주 안 고픈 건 아니지만…왠일이냐. 너가 내 의견을 다 물어보고.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조짐이 이상하더니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다.
“…전 아무 거나 상관없는데요.”
내 말에 놈은 <그래?> 하더니 사거리를 지나자마자 유턴을 해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산정>이라니…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그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조금 뒤 차가 한남대교를 지나자 어, 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길은….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하는 사이 놈은 조금은 거칠다 싶을 정도의 능숙한 운
전솜씨로 한남동 외국인 주택가를 지나 남산 드라이브 웨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생각났다! 여기!
놈이 차를 세운 곳은 지난 번에 와 봤던 남산 아래 한식집이었다. 맑게 개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어있는 기와지붕을 본 순간 나는 지난번 이 집에 왔을 때의 기억
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며 문손잡이를 꼭 움켜잡았다.
그래. 저기서 그 무지막지한 할아버지한테 붙잡혀 손을 땄었지.
그때 정말 기절할 정도로 아팠는데 성욱이 놈 소 닭 보듯 구경이나 하고…!
아주 먼 옛날일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날로부터 불과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할아범! 할아범! 나 왔어!”
내가 뼈아픈 추억(?)에 잠겨있는데 성질급한 강세련은 그 새를 못 참고 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박차고 자갈길을 달려갔다.
15센티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용케도 안 넘어지고 잘도 뛰어가는군.
신기해 하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놈이 <안 가?> 하고 묻는 바람에 나는 네?네. 하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으려는데 갑자기 휘청 하면서 몸이 기우뚱했다.
“앗…!”
자갈길 위로 구르기 직전 간발의 타이밍으로 나의 팔을 잡은 것은 한 발 앞서가고 있던 놈이었다.
“에…바닥이 미끄러워서…”
내가 무안한 표정으로 변명하자 놈은 잡았던 팔을 놓으며 <너 남보다 평형감각이 한참 모자라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캿~ 뭐라구!
나는 발끈한 표정으로 놈을 올려다 보았다.
“이건…!”
다 너가 사준 뚱뚱한 패딩코트 때문이쟎아!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순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놈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분명히 웃음기였다.
조금은 즐거운 듯한 가볍고도 유쾌한 미소.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놈의 뜻밖의 표정에 당황해서 나는 그만 말을 멈추었다.
내가 뭘 잘못 봤나?
“가자.”
놈은 그런 나의 태도에 아랑곳없이 내 손목을 잡고 얼마되지 않는 자갈길을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시 넘어질까봐 그러는 건가. 하고 생각은 했어도 어쨌든 뭐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왠지 화낼 타이밍을 놓친 것 같은데….
뭐, 이제와서 그런 생각해봤자 아무 소용없지만. ㅡㅡ
“어서오세요. ”
현관에서 우리를 맞은 것은 지난번의 그 노인이 아닌 연자주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놈의 누나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인형처럼 예쁜 이
목구비의 그 아가씨는 강세련이 그 노인을 찾자 <사장님은 잠시 외출하셨는데…어쩌죠?>
하고 곤란한듯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식사하시면서 기다리세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럼요. 이쪽으로 오세요.”
작은 누나의 말에 여종업원은 상냥한 웃음을 띄며 복도 안 쪽으로 앞서 걸었다. 가끔씩
풍경이 바람에 날리는 맑은 소리와 함께 한복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이 방입니다. 곧 식사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할 나위없이 정중한 태도로 우리가 안내된 방은 홀을 건너 정원의 포석을 지나 외따
로 떨어져 있는 별채에 있었다. 지난번과 비슷한 실내 장식이었지만 난이 쳐진 병풍이 꽤나
멋스럽고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대체 할아범은 어딜 간 거야? 이렇게 오랫만에 우리가 왔는데 말야.”
방 안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밍크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쳐놓던 강세련이
못마땅한 어조로 말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연락도 없이 온 우리가 잘못이지, 뭐. 온김에 맛있는 거나 먹고 가자.”
작은 누나의 말에 끝남과 동시에 미닫이 문이 열리며 기억에 남아있던 것보다
더 화려하게 차려진 상이 하나하나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아…하면서 커다란 상 위
에 하나씩 하나씩 정성스럽게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놈이 휙 팔을 뻗
어내 앞에 놓인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먹어.”
”고, 고맙습니다.”
난 손이 없냐? 어울리지 않게 왠 친절?
나는 예상밖의 놈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수저를 손에 쥔 채 아무 일도 아니라는듯 물을 마시
고 있는 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얀 백자그릇 안에 들어있던 것은 군침이 널어갈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 잣죽이었지만 나는 놈의 눈치를 보며 한참동안 죽을 수저로 뒤적이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조금 이상하단 말야…
무슨 맛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몇 수저 떠먹다가 너무 싱거운 것 같아 수저를 놓고
무심코 내 앞에 놓여진 생선접시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넌 그거 손대지 마.”
어마 깜짝이야.
나는 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놀라 막 먹으려던 생선에서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놀
란 것은 나 뿐만이 아닌듯 밥을 먹던 누나들도 뜨아한 얼굴로 공중에서 젓가락을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이..뭐야. 안 먹으면 될 거 아냐. 누가 다 먹을까봐 그러냐!
무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다음 순간 놈은 제 앞에 놓여진 생선을 쓱쓱하
고 날렵한 손놀림으로 발라내더니 흰 생선살만을 골라 내 개인접시 위로 얹어주었다.
“넌 이거 먹어.”
헛 ㅡ 너,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친절도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지 네가 그러면 내가 불안하쟎아!!!
놈을 꼬드겨서 팔자를 고치기로 마음먹은 몸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겁부터 난단 말이지.
도대체 놈이 왜 이러는 걸까… 하며 두근두근 하고 있는데 강세련이 그런 우리 둘을 보고 분하다는듯 말했다.
“성욱아 나도 이거 발라 줘.”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가차없는 거절뿐.
“누난 누나가 알아서 먹어. ”
“그런게 어딨어 왜 쟤는 해주고 나는 안 해줘!”
강세련의 말에 놈은 귀챦다는듯 대답했다.
“얘랑 누나랑 똑같애?”
“틀린 게 뭐가 있어!”
“누나 쟤 젓가락질 하는 거 봤어? 저런 손놀림으로 이런 거 먹다가는 하루종일 먹어도 다 못 먹는다구.”
캭 ㅡ 너 정말!
그러니까 뭐야 보고있기 속이 답답해서 지금 이랬다는 거야?!!!!
울그락 푸르락하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놈은 상 위의 간장을 작은 종지에 따르며 한술 더 뜬다.
“너 꼭꼭 씹어먹어. 저번처럼 체해서 또 손 따지 말고.”
이게 정말 말 끝마다 이래라 저래라야! 내가 무슨 두 살 먹은 어린애냐!
그리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구! 저번에 손 딴 게 내 잘못이야?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가 멋대로 오해해서 그런 거쟎아!!!
혼자서 젓가락을 쥐고 열을 올리고 있는데 놈은 제멋대로 지 수저로 간장을 뜨
더니 내가 먹고 있던 죽그릇 위에 물어보지도 않고 팟팟 뿌려댄다.
순식간에 눈처럼 흰 죽 위에 무슨 전위예술처럼 뿌려진 검은 간장자국. (…..ㅡㅡ;;)
“싱거우면 말해. 더 넣게.”
난 원래 이런 거에 간장 안 쳐 먹는단 말야…니 맘대로 이게 무슨 짓이야….
순식간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속으로 울상을 짓고 있는데 놈은 뭔가 몹시 만족한 얼굴로 제 몫의 죽을 떠먹기 시작한다.
저 얼굴 표정은…굳이 설명하자면…뿌듯한 것도 같고….
겨우 죽 한 그릇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내 앞에 놓여진 죽을 한 숟가락씩 떠서 겨우 겨우 삼켰다.
어우~ 짜 ~
저도 모르게 눈이 꽉 감기며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너 이 자식. 간이라도 좀 맞았으면 너가 나름대로 나를 생각해주고 있구나. 라고 조금이라도 감격했을지 모르지만 뭐야 이게!
기분좋게 식사를 하고 있는 놈의 옆얼굴을 아무도 모르게 째려보며 나는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제일 먼저 저 좋을대로 하는 저 못된 습관부터 뜯어고쳐야지. 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내 앞에
놓여진 죽 한 그릇을 간신히 다 비웠다.
인간 황보경. 인생은 험준한 가시밭길의 연속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처절하게 깨달은 사건이었다.